제307화. 영혼의 궁전
“저들을 막아라!”
흑각성의 강자들이 몸을 날리려는 찰나, 서천우의 벽력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본원의 장로들은 곧바로 몸을 날려 제각기 흑맹 강자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양측이 대치하는 순간, 이준의 몸이 한샘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곧바로 검은 송곳을 높게 치켜들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샘의 머리를 향해 송곳을 휘둘렀다.
“껄껄, 과연 한샘의 말이 맞구나. 약선의 영혼체가 저 녀석의 몸속에 있는 게 틀림없어!”
하지만 검은 송곳이 막 한샘의 머리통을 박살내려는 순간, 스산하고 기괴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며 평원에서 기이한 검은 안개가 솟아올랐다.
촤르륵!
그리고 준이 무언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검은 안개 속에서 돌연 스산한 한기를 머금은 검은 쇠사슬이 튀어나왔다.
이미 모든 힘을 소진한 이준은 그 쇠사슬을 피하지 못 하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건…왜 영혼의 궁전 놈들이?”
피할 수가 없었다. 한샘을 꺾고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건만…투종 강자인 서천우의 속도라 해도 이제와서 그 쇠사슬을 막기란 무리였다. 마지막을 직감한 준은 허탈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 말았다.
쾅!
“네 이놈들!”
하지만 쇠사슬이 이준의 심장에 닿기 직전, 부드럽고 하얀 손 하나가 나타나 쇠사슬을 단단히 붙잡았다.
허공에서 불쑥 나타난 대리석 같이 새하얀 손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들던 쇠사슬을 낚아채는 장면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미녀 하나가 이준의 앞에 서서 검은 쇠사슬을 붙잡은 채 살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여인의 표정을 보는 순간, 자리에 있던 강자들은 하나 같이 눈을 떼지 못 했다.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 이상으로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염력이었다.
은은한 한기를 뿜어내는 쇠사슬에 이준의 전신에서 비 오듯이 식은땀이 솟았다. 만일 그 손이 1초만 늦었더라도 자신의 머리통은 지금 어깨 위에 붙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대체 왜 이자가 자신을 구해준단 말인가?
“당신…어억!”
퍽!
막 입을 떼려는 순간, 메두사 여왕의 새하얀 손이 이준의 가슴을 강타했다. 불의의 일격을 맞은 이준의 몸이 빠르게 뒤로 날아갔다. 가슴팍을 조여오는 강렬한 통증에 순간 입을 뗄 수조차 없었다.
“쿨럭…쿨럭…!”
준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연신 기침을 해대며 메두사 여왕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나타나 목숨을 구해주고는 다시 자신을 공격하다니…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방금 전 그녀의 손에 조금만 더 힘이 실렸더라면 그 자리에서 목숨이 끊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 때, 쇠사슬을 잡고 있던 메두사 여왕이 돌연 고개를 기울여 생사 불명의 상태로 땅 위에 쓰러져 있는 한샘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녀가 대리석처럼 새하얗고 단단한 다리를 들어 갑자기 한샘의 허리를 걷어찬 것이다.
쾅!
넋이 나간 시선들 속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터져 나오며 한샘의 몸이 허공으로 붕하고 떠올랐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한샘의 몸이 평원 위에 있던 거대한 암석 위로 떨어지며 뼈가 부서지는듯한 섬칫한 소리가 정적이 깔린 평원을 날카롭게 울렸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평원 위로 울려 퍼지는 그 끔찍한 소리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샘이 죽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 하고 땅에 주저앉아 있던 이준 역시 한샘의 숨이 끊기는 순간 갑자기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드넓은 평야 위에 서 있는 모든 강자들은 흑각성의 사람이든, 본원의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흑각성을 호령하던 최정상의 강자가 한 여인의 발길질에 죽어버릴 줄 감히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멀리 떨어진 하늘 위에서는 서천우가 긴장된 시선으로 메두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 메두사 여왕의 발길질에는 명백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한샘에게 한 발길질은 주변을 정리하려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한샘을 죽이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녀와 한샘 역시 원한 관계인 것인가? 어째서 흑각성에 저런 강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지?’
“껄껄, 한샘 저 녀석이 이렇게 어이없게 죽다니. 재미있군, 재미있어!”
그 때, 또다시 검은 안개 속에서 기괴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곧이어 검은 안개가 요동치며 맹렬한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더니 냉기를 품은 검은 쇠사슬이 메두사 여왕을 향해 날아갔다.
냉담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은 쇠사슬을 바라보던 메두사 여왕이 손을 휘두르자, 무지갯빛 염력이 솟구치며 쇠사슬의 중심부에 있던 검은 에너지와 충돌했다. 두 개의 강대한 힘이 맞부딪 히는 순간, 들판 위로 거대한 파문이 일며 폭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메두사 여왕의 염력을 정면으로 맞았음에도, 검은 쇠사슬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드르륵!
메두사 여왕이 거칠게 손을 놓자, 새까만 쇠사슬에서 기묘한 소리가 울리며 한 줄기 검은 선으로 변해 검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쾅!
곧이어 검은 안개가 빠른 속도로 요동치더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음침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넌 누구냐? 감히 영혼의 궁전의 일에 관여하다니!”
“흥, 저 놈은 내 손으로 직접 찢어죽일 것이다.”
메두사 여왕이 검은 안개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내가 저 녀석을 죽이고 나면 시체를 가져가는 것은 허락해주지. 시체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하, 참으로 건방진 계집이구나. 네 년이 지금 누구를 상대로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너야말로 누구를 상대로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메두사 여왕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조금 전의 공방을 통해 그녀는 상대가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상대의 쇠사슬에 담긴 기괴한 힘만 아니었다면, 일격에 상대를 찢어죽일 자신이 있었다.
“껄껄, 미친년이로구나. 좋다. 내 임무는 저놈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저놈 의 몸 속에 있는 한샘의 영혼체를 가져가는 것이니.”
사내가 말을 마치자 안개가 요동치며 그 속에서 기괴한 모양의 그림자가 뻗어 나와 한샘의 시신을 붙잡았다. 곧이어 그림자가 부르르 몸을 떨자, 한샘의 몸에서 투명한 영혼체가 뽑혀 나오더니 그림자에 붙들린 채 검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클클, 6레벨 연금술사의 영혼이라니. 이번 임무는 제법 소득이 있구나.”
한샘의 영혼체를 수거한 검은 안개는 또 다시 음산하게 웃음을 흘렸다.
“애송이. 때가 되면 영혼의 궁전에서 다시 네 놈을 찾아 올 것이니 그 때까지 약선의 영혼체를 잘 맡아 두거라.”
검은 안개는 불길한 한마디를 남긴 채 빠른 속도로 평원을 자로질러 자취를 감췄다.
한참동안이나 저 멀리 사라지는 검은 안개를 응시하던 이준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한샘의 시체로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이미 싸늘하게 변해버린 사형의 육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그의 얼굴에 허탈한 표정이 떠올랐다.
“젠장, 바다의 불꽃이 영혼체를 따라갔어!”
그 때, 욕설을 내뱉으며 발을 구르는 준의 눈이 한샘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에 고정됐다. 사형의 손에 끼워진 반지에는 기묘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잠시 가만히 서서 푸른빛이 감도는 반지를 바라보던 준은 곧 몸을 숙여 사형의 손가락에서 그 반지를 빼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약황’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최고급품 이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준은 반지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천계의 탑에 갇혔을 때 자신의 저장 반지가 깨져버렸으니, 이번 기회에 6레벨 연금술사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고급 저장반지를 챙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또 한 가지, 이준이 알기로 이 정도의 고급 저장 반지는 사용자의 영혼의 힘이 각인되어 있어 그 힘을 지우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덕분에 만에 하나 반지를 빼앗기거나 도둑맞았다 해도, 누군가가 그 각인을 지우면 반지의 주인이 그것을 감지해 반지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반지 자체의 방어력도 상당해, 일단 이런 고급 반지에 보물을 넣어두면 목숨을 잃지 않는 한 그 물건을 절대로 빼앗길 리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비밀 창고인 것이다. 게다가 반지의 주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준은 아무런 걱정 없이 반지에 새겨진 그의 각인을 지우고 자신의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반지를 바라보던 이준은 정신을 집중한 뒤 눈을 감고 자신의 영혼 에너지를 반지속으로 흘려 넣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반지 안에 영혼의 힘을 불어넣던 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예상대로 한샘의 저장반지 안에는 각양각색의 고급약재는 물론이고, 고급 무투기가 기록된 두루마리가 가득했다.
한편, 메두사 여왕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반지를 손에 쥔 채 웃고 있는 이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그녀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이준은 분명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수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고 말았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자신이 진심으로 이준을 해치려던 상대에게 살의를 느꼈다는 점 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실력은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으니, 원래대로라면 진작에 이곳을 떠나 타르사막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타르 사막으로 돌아가지 못 하고 자꾸만 이준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메두사 여왕의 시선을 느낀 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오늘 그녀 덕에 목숨을 건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기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그녀가, 대체 왜 자신을 구했단 말인가. 그리고 뭔가 마음이 바뀌어 자신을 구해준 것이라면, 왜 저렇게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본단 말인가.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그녀와의 관계를 개선하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 저기, 여왕 전하.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 이 은혜는 꼭 기억할게요.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보답할게요!”
하지만 메두사 여왕은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주먹을 움켜쥐었고, 그녀의 주먹에서 서서히 무지개빛 염력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메두사 여왕의 행동에 이준은 순간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것을 느꼈다.
‘젠장…! 설마 진짜로 자기 손으로 날 찢어죽이려고 살려준 거란 말이야?!’
쾅!
메두사 여왕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돌연 검은 옷을 입은 백발노인 이 나타나 이준의 앞을 막아섰다.
“귀하는 어느 곳의 귀인이신지요? 오늘 본원의 학생이 귀하 덕에 목숨을 건졌으니 본원의 대장로로써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투종 강자의 출현에 조금 안도한 이준은 조심스럽게 노인의 뒤로 몸을 숨겼다.
“대장로님, 조심하세요.”
준의 한마디에 순간 서천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도대체 어째서 무지막지한 강자에게 쫓기는 것인지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에 있는 강자와 정면으로 맞선다면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서천우의 등장에 메두사 여왕은 못 마땅한 표정을 한번 지어보이더니 이내 백옥같은 손가락을 들어 그 뒤에 숨어있는 이준을 가리켰다.
“흥,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네 놈의 목숨을 받아가도록 하지.”
메두사 여왕은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