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6화. 뜻밖의 구세주
화련은 손바닥만한 크기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에너지는 방금 전 그 거대한 청록색의 빛줄기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게다가 한샘은 2년 전에도 그 화련에 의해 호된 꼴을 당했으니, 그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심지어 지금 준이 꺼내든 것은 2년 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이 강력했다.
지난번에 준이 사용했던 화련은 대지의 불꽃과 얼음 불꽃의 정수가 융합된 것으로, 타인의 불꽃을 빌려 만든 것이니만큼 그 위력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온전히 자신의 것인 불꽃 두 개를 합쳐 만든 것이니,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제의 손에 피어난 비취색의 연꽃을 바라보는 한샘의 얼굴이 점점 납덩이처럼 굳어갔다.
화련을 만들어내는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 두 개의 불꽃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답은 명확했다. 태양검은 처음부터 화련을 만들 시간을 벌기 위한 한 수였던 것이다.
게다가 준의 얼굴이 저토록 창백함에도 불구하고 부상이 없다는 것은…자신의 공격이 먹힌 것이 아니라 화련을 만드는데 모든 염력을 쏟아부었기 때문임이 틀림 없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샘을 바라보던 이준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하고 있는 에메랄드 빛의 화련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전에도 화련을 만들어 낸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스승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하고 있는 아름다운 화염 연꽃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으니, 실로 감회가 새로웠다.
이준이 화련에 대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화련이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화염 연꽃은 주인의 손을 떠나자마자 광풍을 불러일으키며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화련의 크기가 부풀어 오름에 따라 그 주변에 있던 공간 역시 점점 더 거세게 뒤흔들리기 시작했고, 연꽃 주위로는 자잘한 검은 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연꽃이 품은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감지한 한샘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진청색 화염을 소환해냈다.
투종 강자가 된 주인의 손짓에 따라 바다의 불꽃이 응집되자, 순식간에 십 여미터 높이의 푸른색 화염 바다가 펼쳐졌다.
한샘은 화염바다의 한가운데에 선 채 사나운 표정으로 준을 노려봤다. 그의 등 뒤로 펼쳐진 화염의 바다에서는 마치 파도가 치는듯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두 강자가 만들어 낸 화염이 내뿜는 열기에 온 하늘이 열탕처럼 들끓었다. 투왕급 이상의 강자들조차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온도였다.
“가라…!”
이준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기자, 천천히 회전하던 화련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짙푸른 화염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심해 마수!”
심각한 표정으로 화련이 날아오는 것을 바라보던 한샘은 갑자기 벽력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거대한 화염 벽이 미친 듯이 물결치며 하나로 응집되더니, 이내 거대한 진청색의 마수로 변화했다.
거대한 마수의 출현과 동시에 한샘의 안색이 붉게 달아올랐다. 「심해 마수」를 만드느라 소모된 염력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푸른 마수는 사자와도 같은 모습에 단단하고 커다란 전갈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머리 꼭대기에는 진청색의 뿔이 번쩍이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푸른색의 뿔 주위에서는 화련과 마찬가지로 검은 색 재가 흩날리고 있었다.
거대한 머리를 지닌 사자형 마수의 모습에 준 역시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천지의 불꽃을 응집시켜 저렇게 복잡한 형태의 마수를 만들어내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불꽃 통제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불과 2년 사이, 한샘은 투종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불꽃을 통제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에메랄드 빛의 연꽃은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이미 한샘이 불러낸 화염 마수의 지척까지 도달해 있었다.
한샘이 주먹을 불끈 쥐자, 거대한 화염 마수가 크게 울부짖으며 연꽃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산을 태우고 바다를 말려버릴 정도의 열기가 휘몰아쳤다.
콰앙!
순간 온 천지가 쥐죽은 듯 잠잠해졌다가 돌연 엄청난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터져나가며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주위에서 전투를 벌이던 강자들은 저마다 동작을 멈추고 경악한 표정으로 화련과 마수가 충돌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두 불꽃이 마주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화염 폭풍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수 십 명의 강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싸움을 멈추고 사방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단 한 명, 서천우만은 몸을 피하지 않고 김씨 형제를 향해 더욱 거세게 달려들었다. 등 뒤에서 덮쳐오는 화염 폭풍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듯 더욱 맹렬하게 자신들을 압박해오는 서천우의 모습에 금색과 은색의 옷을 입은 두 사내는 새파랗게 질려 몸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내가 물러서자, 서천우 역시 추격을 포기하고 화염 폭풍을 바라보며 저만치 먼 곳으로 몸을 날렸다.
“내가 이준 녀석을 얕보았구나. 이제 막 투황의 벽을 깬 투종이라고는 하나 투종을 막아낼 정도의 힘을 가졌다니…”
엄청난 화염 폭풍이 천지를 뒤덮자, 온 천지가 후끈 달아오르며 주위의 공기가 버석하게 말라갔다.
하늘 위에서 격전을 벌이던 양측의 강자들은 이미 모두 지상으로 내려와 있었다. 멍청하니 하늘에 떠 있다가는 두 사람의 싸움에 휘말려 어떤 참혹한 사태가 벌어질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정말 괴물이야.”
임동수가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하자, 곁에 있던 임수혁과 류지안 역시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이미 본원의 장로가 되었으며, 이런 대규모 전투에 투입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은 상태였다.
셋 모두 20살을 갓 넘은 나이에 투왕이 되었으니 그 재능은 가히 투기 대륙 전체에서도 인정받을만한 것이었지만, 이준의 괴물 같은 성장 속도를 눈앞에서 목격할 때 마다 스스로가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들은 오늘 전투에서 투황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셋이서 힘을 합쳤다. 그러나 이준은 불과 2년이라는 시간 만에 투종에 이른 한샘을 상대로 막상막하의 대전을 펼치고 있으니, 질투가 나면서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의 이런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류지안 이었다. 불과 2년 전, 이준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강자였다. 하지만 오늘 보여준 실력으로 미루어보건데, 이제는 목숨을 걸고 이준에게 맞선다 해도 5합을 넘기지 못 하고 패배할 것 같았다.
한편 세 사람과 멀리 떨어진 한 그루 나무 위에서는 이찬이 불안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동생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 앞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자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한샘은 무려 투종에 이른 강자가 아니던가.
“제발…무사해야 한다…준아.”
이찬은 초조하게 두 손을 비비며 화염 폭풍 속에서 이준이 뛰쳐나오길 빌고 또 빌었다.
다른 강자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가득 뒤덮은 화염 폭풍으로 시야를 옮겼다.
한참 후, 수많은 강자들의 시선 속에서 하늘 위에 가득했던 화염 폭풍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있는 두 명의 그림자는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땅에 있던 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저 두 사람이 화염 폭풍 속에서 죽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서천우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 가득한 화염 폭풍 속을 쳐다보았지만, 그의 실력으로도 상황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 역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준이 무사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하늘 위에서 돌연 거센 바람 소리가 휘몰아 치더니 한 사람의 그림자가 빠르게 밑으로 내려왔다.
갑자기 움직이는 모습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 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자들 중 누군가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맹주님이시다! 맹주님이 살아계셔!”
그 목소리에 흑맹 강자들의 긴장된 얼굴이 순식간에 풀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한샘이니, 이번에도 내원 놈들은 싸움에 진 개꼴로 가람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그들 역시 흑각성의 다른 세력들에게 한껏 큰소리를 칠 수 있을 것이다. 요 몇 년 동안 본원을 굴복시킨 세력은 흑각성에서 오로지 흑맹 뿐 이었다. 반면 본원의 장로들은 말없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 순간, 살의로 불타는 이찬의 눈이 환호하고 있는 흑맹의 강자들에게로 향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한 표정이었다.
“모두 당황하지 말아라, 뭔가 이상해!”
하지만 서천우가 갑자기 손을 들며 본원의 강자들을 진정시켰다. 그들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서천우가 하늘에서 빠르게 내려오는 한샘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시선을 따라 한샘을 바라보던 이들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화염폭풍을 벗어난 한샘의 자세가 무언가 이상했던 것이다.
쾅!
모두가 사태를 파악하지 못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하늘 위에서 다시 한번 굉음이 터져 나오며 화염 폭풍이 일순 크게 떨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선명한 청록색 날개를 가진 그림자 하나가 뛰쳐나왔다.
“이준이다! 죽지 않았어!”
익숙한 염력 날개에 본원의 강자들이 일제히 환호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익숙한 색의 염력 날개를 바라보던 이찬 역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 정말 걱정하게 만든다니까.”
반면 갑자기 나타난 청록색 날개에 흑맹의 강자들은 목이 졸린 오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곧이어 청록색 화염 날개를 가진 그림자가 벼락처럼 수직으로 떨어지며 빠른 속도로 낙하하고 있는 한샘에게로 향했다. 준의 주먹 위에는 또 다시 공포스러운 청록색 화염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승님을 배반한 죄, 죽어 마땅하다!”
콰앙!
묵직한 충돌음이 하늘 가득 울려 퍼지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또 다시 못 박힌 듯 두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크윽!”
한샘은 붉은 피를 울컥 토해내며 마치 두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힘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이준 역시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아보였다. 양어깨를 가늘게 떨며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는 모양새로 보아 그 역시 이미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한샘이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는데, 그 속에 쳐박힌 한샘은 시체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준은 한샘의 호흡이 약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준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먹을 쥐자, 거대한 검은 송곳이 번개처럼 나타나 그의 두 손에 쥐어졌다.
“맹주님을 구해라!”
이준의 동작에 순간 흑맹의 강자들이 크게 놀라며 일제히 소리쳤다. 그들은 한샘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한샘을 잃는다면, 흑맹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이 자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