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1화. 초월의 비약
한편 흑맹의 수하들은 그 수가 많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실력 역시 만만 치 않아 이찬은 고전을 면치 못 하고 있었다.
물론 이찬은 투왕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중에서 그의 상대가 될 만한 자는 없었으나, 부상을 입은데다가 적이 너무 많아 상황이 녹록치 않아 보였다.
“모두 다 도착했구나.”
다음 순간, 광장 주위를 훑어보던 이준의 시선이 광장 한구석에 멈춰 섰다. 검은 옷을 입지 않은 한 무리의 청년들이 빠른 속도로 전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준이 데리고 온 지원군이 전장에 투입되자, 수세에 몰려있던 이찬의 세력이 빠른 속도로 흑맹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전투에 양측에서는 끊임없이 사상자가 나왔다. 싸우는 소리와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가 온 산과 하늘 곳곳에 메아리쳤다.
“이 의미 없는 싸움을 빨리 끝내는 게 좋겠군.”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이준은 재빨리 날개를 펄럭여 광장으로 날아가며 벽력같은 소리로 적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범로는 이미 죽었다! 네놈들은 계속해서 이곳에 남을 테냐?”
하늘에서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광장에서 사투를 벌이던 흑맹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공으로 향했다.
“모두 저자의 말은 믿지 말아라! 종주님은 투황 강자이다. 어떻게 저 애송이 녀석한테 죽는단 말이냐!”
흑맹의 사람들이 불안해하던 때, 갑자기 누군가가 준의 말을 부정했다. 범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보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피의 종족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 목소리에 흑맹의 사람들 역시 안정을 되찾은 듯 다시 흉흉한 눈길로 산채를 바라보며 저마다 손에 있는 날카로운 무기를 다잡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이에 준의 염력 날개가 다시 한번 크게 펄럭였고, 눈 깜짝할 사이에 광장 가까이에 있던 거대한 나무기둥 위에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목숨이 아깝거든 여기서 썩 꺼져라! 그리고 돌아가서 한샘에게 전해! 범로의 목숨은 나 이준이 친히 거둬주었다고. 다음은 네 차례라고!”
“이준?”
“저 녀석이 그때 약황 한샘을 격퇴시켰던 이준이라고?”
이준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순간, 적들의 발걸음이 일제히 멈춰 섰다. 이준의 이름은 흑각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미쳐 날뛰는 흑각성의 살인마들조차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모두 저놈의 헛소리는 듣지 말아라! 이준은 그 때 가람 아카데미의 천지의 불꽃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겠느냐! 맹주가 약속한 보상을 생각해 보거라!”
흑맹의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또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맹주의 보상이라는 말에 순간 그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죽여라!”
6레벨 연금술사의 포상이라는 유혹 앞에 결국 흑맹의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산채를 향해 달려 나갔다.
“후…죽음을 자초하군…”
여전히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는 적들의 모습에 이준은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손에 있던 무형의 화염이 폭발하며 해일 같은 에너지가 온 천지로 퍼져나갔다.
다음 순간, 모든 사람들이 발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들의 몸에서는 희뿌연 운무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얼굴은 불가마에 던져진 숯덩이마냥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곧이어 이준의 손에 있는 무형의 화염의 파동이 조금씩 격렬해지더니 굉음이 터지기 시작하고, 그와 동시에 흑맹원들이 하나 둘 끔찍한 비명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쾅! 쾅! 쾅!
기이한 폭음이 연달아 울리며 동료들이 하나 둘 재가 되어 사라지자, 살의와 탐욕으로 눈을 번들거리던 흑맹원들의 눈빛이 순식간에 공포로 뒤덮였다. 그들은 황망히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다음으로 무형의 화염에 의해 재가 되어 사라질 사람이 자신이 될지, 옆에 있는 동료가 될지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이 무시무시한 광경에 공포와 놀라움이 뒤섞인 눈빛이 일제히 광장 밖 나무 기둥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청년에게로 향했다.
“저 녀석, 이건… 정말 엄청나구나….”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동생의 힘 앞에 그의 형인 이찬 역시 공포를 느낄 지경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느낀 이준은 천천히 눈을 뜨며 차가운 눈동자로 흑맹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쾅!
이준의 시선이 닿자, 또 다시 한명의 사내가 재로 변해버렸다.
예고 없이 불타오른 그 남자를 바라보며 나머지 흑맹의 사람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나머지 저마다 손에서 무기를 떨구며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쾅!
또 다시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핏빛 도포를 입은 한 명이 또 재로 변해버렸다. 이 순간 사람들은 잿더미로 변해버린 사람들이 모두 앞서 사람들을 선동했던, 피의 종족의 일파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시시각각 조여오는 죽음의 공포 앞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첫 탈주자가 나타났고, 그 뒤로는 마치 썰물이 빠지듯 앞다투어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광장 밖으로 달아났다.
황망히 숲속으로 도망치는 적들을 바라보며 이준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있는 무형의 화염이 조금씩 사라졌다.
이준은 고개를 돌려 산채를 둘러싼 울타리에서 멍하니 있는 자신의 형을 바라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이준이 흑맹의 사람들을 격퇴시키는 순간, 온 산 가득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독안에 든 쥐꼴로 전멸을 기다리던 이찬과 그 수하들은 미친 사람들처럼 환호하며 서로를 얼싸 안고 눈물을 흘려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그림자들이 이찬의 명에 따라 대전투의 여파로 난장판이 된 산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산채 중앙의 대청 안에 이씨 가문의 두 형제와 보람 등이 모두 한데 모였다.
“네가 정말로 범로를 죽이다니… 만약 이 소문이 퍼져나가면 온 흑각성이 뒤집힐 거야.”
이준이 범로를 죽였다는 이야기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임동수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조금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준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인 뒤 임동수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일 뿐 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이 은혜는 나중에 반드시…”
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동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그냥 넘어가. 앞으로도 도와줄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라고.”
“야! 이준! 나는? 나는?”
그 때, 곁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보람이 폴짝 폴짝 뛰며 성을 냈다.
“고마워. 반드시 마수의 구슬을 만들어 줄게. 너한테는 그게 꼭 필요할 테니까.”
준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짓자, 보람 역시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너희 둘에게도 내가 뭐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준이 고개를 돌려 웃고 있는 오하늘과 이윤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본원에 온 이래 비석이라는 세력을 키워나가며 함께 키워나간 세 사람의 우정은 준이 생사의 기로를 헤맨 2년 이라는 시간을 통해 금강석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오하늘은 소박하고 말주변이 없었지만 정이 깊고 한번 마음을 주면 결코 누군가를 배신하는 성품이 아니었고, 이윤영은 영리하고 말도 행동도 빨랐지만 오하늘만큼이나 의리가 깊은 사람이었으니,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준의 제안을 거절하고는 말없이 준에게 눈치를 주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과 회포나 풀라는 의미인 듯 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준은 2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달라진 형의 모습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 이찬의 얼굴에는 살기와 독기가 내려앉아 있었고, 무언가 시커멓고 어두운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도 그러할진대, 이준처럼 민감한 영혼 탐지 능력을 가진 자의 눈에 그것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형, 2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웃음을 머금고 이준과 친구들이 대화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던 이찬은, 이준의 물음에 천천히 웃음을 거두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찬의 침묵에 기쁨으로 가득 차 있던 대청이 갑자기 무겁게 내려앉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이윤영이 오하늘과 보람, 임동수에게 눈짓을 하자, 세 사람은 곧바로 그녀를 따라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대청 안에는 두 형제만이 남게 되었다. 이준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더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고, 마침내 이찬이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준아, 너는 우리 이씨 가문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아이다. 큰 형도 나에게 말했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지켜야 한다고 말이야. 네가 우리 가문의 미래이니까.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말을 고르더니 천천히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때 네가 가람 아카데미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도 너를 습격했던 놈들을 찾아 죽이려 했다. 네가 정말로 죽었더라면, 이씨 가문은 완전히 멸문지화를 당했을 거야. 2달 정도 절망감에 몸부림치다, 그놈들을 찾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운남종에게 원한을 갚기 위한 실력을 쌓으려면, 내 수련 속도로는 때를 기약할 수 없었지. 허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지 반년 정도가 지난 후, 살수들에게 쫓겨 어느 깊은 산 속으로 도망치다 우연한 기회에 어떤 물건을 얻게 되었지.”
여기까지 말을 마친 이찬의 두 눈이 돌연 기이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준은 순간 그 ‘물건’이라는 것이 형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내가 손에 넣은 것은 두 알의 붉은 연금비약이었다. 병은 무척 단순하게 생겼는데, 그 연금비약은 투사 단계 정도의 사람을 단시간 내에 투왕 단계로 끌어올려 준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일단 그 연금비약을 사용하면 3년이라는 시간만이 남는다. 그러니까, 이 연금비약은 내 목숨을 대가로…3년 동안 투왕으로 만들어주는 것이지.”
이찬의 말을 듣던 이준의 머릿속에 순간 한 가지 연금비약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투기 대륙에서 사라진 연금비약이었다.
“초월의 비약?”
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이준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초월의 비약…오래 전 대륙을 경악하게 했던 이 연금비약은 7레벨 최상급 수준의 연금비약으로, 복용하는 자를 즉시 투왕 수준의 강자로 만들어주는 거짓말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평생을 수련에 정진해도 오직 한줌의 천재들만이 투왕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이 약은 평범한 투사를 한순간에 투왕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론…그 대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웠지만 말이다.
하지만 초월의 비약을 만든 연금술사는 그 비약의 조합표를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고 그대로 세상에서 사라졌고, 그 연금비약 역시 영원히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가 사라진 후, 일부 사람들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그 연금비약을 찾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 둘 그 연금비약을 포기했고, 연금술사들조차 그 물건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며 단순한 뜬소문으로 치부했다. 이준 역시 약로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그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 했을 물건이었다.
이준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두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다.
“형은 그게 목숨이랑 힘을 맞바꾼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먹은 거야?”
이준의 고함 소리에 이찬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죽었는데, 내가 뭘 더 어찌해야 하느냐? 네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내 목숨 따위는 아깝지 않았다.”
순간 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자, 이찬은 피식 웃으며 동생을 위로하려 했다.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지금 네가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기쁜 소식이 아니냐. 나는 상관없다. 앞으로 이씨 가문의 목숨이 모두 네 손에 달렸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말을 마친 그가 손바닥을 뒤집자 기이한 모양의 반투명한 병이 그의 손에 나타났다. 이찬은 그 병을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준아, 이게 바로 「초월의 비약」이다. 아마도 이게 대륙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알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