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심장의 불꽃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는 상대의 모습에, 준의 입가에 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 준이 사용한 것은 이전에 불 이무기가 사용하던 「심장의 불꽃」이었다.
「심장의 불꽃」을 차분하게 다스려 염력을 담금질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염력을 단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통제를 벗어나 날뛰기 시작하면 염력을 뜻대로 조종할 수 없게 만들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온 몸을 불살라 상대를 재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불꽃이 얼마나 미쳐 날뛸지 정하는 것은 더 이상 불 이무기가 아니라 놈을 대신해 구름불꽃의 주인이 된 이준이었다.
물론 상대가 투왕급 이상의 강자들이었으니, 단숨에 그들을 불 태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체내로 파고든 구름 불꽃이 미쳐 날뛰는 상태에서는 투왕, 아니, 투황이라 해도 뜻대로 염력을 조종할 수 없었다.
범로와 세 명의 투왕이 심장의 불꽃으로 인해 잠시 멈칫하는 사이, 은색 섬광이 번뜩이며 땅에 있던 검은 송곳이 자취를 감췄다.
피잉!
다음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세 명의 투왕 중 한 명의 목 앞으로 시커먼 송곳이가 날아들었다.
생사의 순간, 그 투왕 강자는 온 정신을 집중해 손에 들린 장검을 휘둘렀다.
검은 송곳과 장검이 맞부딪히자,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거센 돌풍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이 묵직한 공격 앞에 투왕 강자는 그만 버티지 못 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쾅!
곧이어 날카로운 바람이 빠르게 다가오며 그의 가슴에 거세게 부딪히고, 갑작스러운 충격에 투왕 강자는 몇 십 미터나 뒤로 밀려나더니 결국 땅에 깊게 끌린 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멈추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투왕 강자가 큰 상처를 입고 물러나자, 산채내에 은밀히 숨어 있던 이찬의 수하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집어 삼켰다.
“저 녀석… 대체 어디까지 강해진거지?”
이찬 역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순식간에 투왕 강자를 무너뜨리는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준이 투왕 강자 한 명을 공격하는 잠깐 사이, 범로와 다른 두 명의 투왕 강자는 심장의 불꽃을 통제하는데 성공했지만, 저 멀리 땅 위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동료의 모습에 표정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혁주, 너희 둘은 저기 저놈을 잡아! 난 이놈을 막겠다! 빨리!”
셋이서 달려들어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범로는 이준에게 몸을 날리는 동시에 나머지 둘에게 이찬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범로의 외침에 두 명의 투왕 강자들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번개처럼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쾅!
두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 또 다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폭발음이 울리던 찰나, 범로 역시 이를 악물고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핏빛 염력을 폭발적으로 내쏘았다.
하지만 푸른 화염이 치솟자, 곧바로 핏빛 염력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빌어먹을!”
자신의 공격이 무산되자 범로가 크게 성을 내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염력을 끌어올리려 하자, 갑자기 몸 속의 심장의 불꽃이 요동치며 가슴팍이 답답해지고 염력을 운용하기가 어려워졌다.
준은 범로의 공격이 잠시 주춤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태초의 힘!”
쾅!
범로는 간신히 염력을 운용해 핏빛 염력으로 자신의 몸을 감쌌으나, 준의 주먹에 실린 엄청난 힘에 의해 피를 토하며 십 여 미터 이상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주먹 한 방으로 범로를 날려 보낸 준은 곧바로 그를 쫓지 않고 자신의 형을 노리는 두 명의 투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투왕은 이미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준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필사적으로 이찬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준이 막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또 다시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며 범로의 목소리가 그의 귓등을 때렸다.
“하하, 이준, 네놈이 강해봤자 어쩌겠느냐? 저놈이 우리 손에만 있다면, 네놈은 아무것도 아니지!”
범로가 이준을 막는 사이, 두 명의 투왕 강자가 이찬의 코 앞까지 도착했다.
쉭!
하지만 투왕 강자들의 공격이 닿으려던 찰나, 하늘에서 돌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개의 그림자가 운석처럼 떨어지며 두 투왕 강자와 이찬 사이를 가로 막았다.
“하하, 준아, 너는 그 늙은이나 마저 상대해. 이 둘은 나랑 보람한테 맡기라고.”
갑자기 나타난 지원군에 범로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곧이어 이준의 서늘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본래 핏기가 없던 그의 얼굴이 백지장마냥 더욱 하얗게 질려버렸다.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보자마자 이찬을 노렸다는 것은, 세 명의 투왕과 힘을 합쳐도 준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이미 한 명의 투왕이 이준의 공격 한 번에 나가떨어지고 말았고, 이 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마저 보람과 임동수에 의해 봉쇄되고 말았으니, 범로는 순식간에 독안에 든 쥐 꼴이 되고 말았다.
“산채에 있는 놈들을 모두 죽여라!”
범로는 표독스런 얼굴로 수하들에게 명을 내리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준을 죽일 수 없다면 이찬의 수하들이라도 죽이겠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산채 바깥 쪽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몇 백 명의 흑맹 사람들이 범로의 외침에 따라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산채를 향해 달려나갔다.
끝없이 몰려오는 적들의 모습에 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산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준과 이찬의 수하였으니, 한명이라도 사상자를 줄이는 것이 좋았다.
“준아, 너는 저 늙은이를 잘 상대하거라! 저들의 공격은 나와 내 부하들이 막으마!”
그 때, 부상당한 이찬이 갑자기 단상에서 내려오며 크게 소리쳤다. 그의 명령에 따라 산채 깊숙한 곳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움직이더니 잠깐 사이에 광장에 백 여명의 인영이 가득찼다.
“나를 따르라!”
이찬이 벽력처럼 고함을 지르며 광장 밖으로 달려나가자, 그의 뒤에 있던 검은 그림자들 역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형의 몸이 성치 않다 하더라도, 저 정도 수의 충직한 부하들이 함께 하고 임동수와 보람까지 함께 하는 이상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최대한 빨리 범로를 정리하고 형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늙은이, 오늘도 2년 전처럼 운이 따라줄까?”
“이준, 우리 사이의 원한은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다. 만약 네놈이 내 아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내가 네 녀석한테 복수할 이유도 없어!”
상대가 싸늘하게 웃으며 자신을 비웃자, 범로가 눈을 번뜩이며 노기띤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흥, 당신 아들의 행동은 생각도 하지 않나보군. 역시 그 아비에 그 자식이야.”
“건방진 놈! 이 범로가 널 두려워할 성싶으냐!”
곧이어 범로의 몸에서 핏빛 염력이 솟구치며 3,4 미터 가량의 핏빛 파도가 일어나 그의 몸을 감추어 주었다.
“2년이 지났는데, 발전이 없군.”
이에 이준은 두 개로 나뉘어진 천지의 불꽃을 다시 하나로 합쳐 거대한 청록색 불덩이를 만들어 그것을 핏빛 장막을 향해 쏘아냈다.
비취색의 화염이 허공을 가르자, 사방에서 일렁이던 피바다가 순간 거칠게 요동치며 증발하기 시작했다.
범로의 피바다는 흑각성에서 제법 악명을 떨친 수였다. 일단 펼치기만 하면, 그의 몸을 은밀하게 숨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염력 회복량도 크게 향상되었다. 이로 인해 한 때 많은 강자들이 그 피바다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천적인 천지의 불꽃이 가진 무시무시한 열기 앞에 그 불꽃은 그간 악명을 떨쳤던 그 위력을 조금도 보이지 못 하고 있었다.
쉭!
피바다가 점점 얇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 속에 있던 범로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순간 커다란 혈창을 손에 쥔 범로가 폭발적인 기세로 팔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온 산을 뒤덮었다.
하지만 준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혈창을 보고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하나 튕길 뿐 이었다.
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청록색 화염이 날아가 붉은 색의 혈창과 거세게 충돌했다.
간단하게 혈창을 막아낸 준은 곧바로 거칠게 땅을 박차며 조금씩 옅어져 가는 피바다로 몸을 날렸다.
지옥불과도 같은 무시무시한 열기를 머금은 물체가 돌진해오자, 역한 냄새를 풍기는 검붉은 피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피바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허공에 나타났다. 조금 거칠에 숨을 몰아쉬는 것을 빼면 준은 어디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범로의 옷은 단 한번의 충돌로 인해 넝마가 되어 있었고, 그의 오른 팔에서는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크하하, 이준, 내가 네놈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인정하마. 허나 네놈이 날 죽이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정면 충돌로 패배를 직감한 범로는 돌연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모았다. 그러자 즉시 붉은 선혈이 범로의 입에서 토해지며 사방으로 붉은 피가 흩뿌려지면서 그의 몸이 자취를 감췄다.
범로가 사라지는 모습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늙은이…살려고 발악을 하는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발밑에서 은색 광선이 터져나오며 묵직한 뇌성과 함께 그의 몸이 광장에서 사라졌다.
* * *
잠시 후, 산채 주위의 상공에 갑자기 은은한 파문이 일며 붉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빌어먹을 놈, 내가 사람을 모아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반드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하지만 범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연 그의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싸늘한 웃음 소리에 범로의 모골이 송연해지며 손발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하, 범 종주, 어딜 가려는거야.”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리자, 범로의 두 눈에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젊은 청년의 손 위에 피어난 청록색 불꽃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끝났어, 범 종주.”
이준은 싸늘한 한마디와 함께 손에 있던 청록색의 화염구를 빠른 속도로 회전시켰다.
곧이어 화염구는 주변의 공기를 모두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며 범로를 향해 날아갔다.
화염구 속에서 거친 바람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자, 그 엄청난 위력에 범로는 방어할 틈도 없이 창백한 얼굴로 새빨간 피를 한움큼이나 토해냈다.
다음 순간, 청록 화염이 거칠게 일렁이며 중상을 입은 범로를 휘감았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밤하늘 가득 울려퍼졌다.
그리고 청록색 화염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범로가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손을 털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 한샘이 남았군.”
2년 전,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뻔 했던 원수를 죽인 이준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북쪽 방향을 바라봤다. 그 곳은 스승을 배신하고, 자신을 용암 호수로 밀어 넣었던 원흉인 ‘사형’이 있는 곳 이었다.
그는 말없이 살기로 눈을 빛내며 잠시 그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산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산채 곳곳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는데, 가장 격렬한 전투는 산채의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전투였다. 그 곳에는 임동주와 보람이 흑맹의 투왕 강자 두 명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전투를 바라보던 준은 안심하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임동수와 상대는 비등비등했고, 보람은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보람의 상대가 된 투왕은 상대의 공격을 재빨리 피하며 도망치는 것이 전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람이 자신의 상대를 처리하고 임동수를 도우러 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