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공포
찬은 호시탐탐 자신의 목줄을 노리는 세 사람의 투왕을 상대하면서도 한시도 범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 명의 투왕이 이찬을 향해 몸을 날리는 찰나, 범로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큭…!”
이에 이찬은 다시 한번 염력을 폭발시키며 장창을 크게 휘둘러 사방을 휩쓸었다.
콰앙!
은색 섬광과 범로의 붉은 염력이 맞부딪히는 순간, 굉음과 함께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커헉…!”
이찬이 피를 토하며 물러서자, 범로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그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바로 염력을 응집시켜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는 혈창을 만들어냈다.
“감히 피의 종족 사람을 죽이다니! 오늘 네 놈의 눈과 혀를 도려내고 사지를 잘라내주마!”
단 한 번의 격돌 만에 온 몸의 혈관이 뒤틀리며 염력의 운행이 멈춰선 것을 느낀 이찬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혈창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 투지를 잃지 않았건만, 그의 팔다리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냥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동생아, 이 형이 무능해서 복수를 하지 못하고 가는구나.”
쿵!
하지만 이찬을 향해 맹렬히 날아오던 혈창이 돌연 청록색 화염벽에 부딪치며 불속에 던져진 얼음처럼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하하, 범 종주, 2년만이군.”
돌연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범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그 익숙한 목소리에 이찬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주…준아?”
“이준? 아직 살아있었단 말이냐? 어떻게 이런 일이!”
범로는 자신의 뇌리 깊숙이 새겨진 이준의 얼굴을 보자마자 온 몸의 피가 마르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준? 그 때 범로를 패배시키고, 약황 한샘을 거의 죽일 뻔 했다는?”
곁에 있던 투왕 강자들 역시 ‘이준’이라는 이름에 긴장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네 명의 강자들이 잠시 멈칫 하는 사이, 눈부신 은색 섬광과 함께 이준의 몸이 사라졌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찬의 곁에 나타났다.
“형…!”
“저…정말 준이냐?”
이찬은 순간 자신이 죽은 동생의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동생의 따스한 손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순간, 시종일관 얼음장처럼 차갑던 그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며 뜨거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래, 형. 나야. 형 동생, 이준. 이씨 가문의 셋째 아들.”
“주, 준아… 준아.”
“하하, 형, 우선 저 늙은이부터 치워버리고 얘기하자고.”
“안 돼, 저 늙은이는 투황 강자야. 내가, 내가 놈을 막을 테니 그 틈에 달아나라. 이 못난 형이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구나. 오랜만에 만나서 이렇게 이별이라니. 아쉽기는 하지만 네가 있으니 안심하고 저 세상으로 갈 수 있겠어.”
이찬은 연신 입에서 피를 토해내면서도 동생을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동생은 상대가 투황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형의 손목을 잡아끌며 앞으로 나섰다.
“하하, 형, 걱정 하지마. 2년 전에도 나에게 패해 달아난 놈이야. 오늘은 달아나지 못할테지만. 날 믿어, 형”
“그게 무슨…”
“걱정 말고, 나에게 맡기라니까.”
준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창을 붙잡고 있는 형을 뒤로 한 채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가 손바닥을 뒤집자, 거대한 검은 송곳이 반지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 송곳을 가볍게 휘두르니 묵직한 소리와 함께 주위의 돌들이 산산이 부서져 바람에 날렸다.
“자, 범로. 오늘이 네 마지막 날이다.”
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살의가 가득했다. 몇 분만 늦었더라도 자신의 둘째 형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이에 준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너희들은 저 다친 놈을 사로잡아라! 기억해라, 절대로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라! 이준의 손발을 묶으려면 반드시 놈을 생포해야 한다. 한 사람은 남아서 나와 함께 이준을 공격해야 한다. 만약 저 녀석을 죽이게 된다면, 너희들에게 「영혼의 정수」를 주마. 이번에 이준을 죽이기만 한다면, 너희들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이루어질 게야!”
범로가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세 명의 투왕 강자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그의 말에 세 투왕 강자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영혼의 정수는 그들이 오랫동안 탐내던 연금비약이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흑맹을 위해 큰일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최근에 흑맹에 들어왔기 때문에 공헌을 쌓으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네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준의 몸에서 청록색 염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이 막 몸을 날리려는 찰나, 그의 눈에 새빨간 점 하나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이번엔 널 도와줄 사람이 없지?”
갑자기 나타난 여인의 모습에 범로를 비롯한 흑맹의 강자들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눈앞에 있는 자는 틀림없이 이준의 적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범로조차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막강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이는 그녀가 정상급 투황이나, 심지어 투종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하하, 당신의 목표도 이준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힘을 합치는 게 어떻소?”
이 뜻밖의 행운에 범로가 음침하게 웃으며 메두사 여왕을 향해 말했다.
“넌 그럴 자격 없어.”
하지만 정체불명의 여인은 벌레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범로를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그녀의 무례한 답변에 범로는 크게 기분이 상했지만 상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끝 모를 위압감에 차마 싸움을 걸지 못 하고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귀하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하시오.”
“준아, 저 사람은 누구야? 널 노리는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여인의 등장에 놀라기는 이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범로에 세 명의 투왕만으로도 벅찬데 그 이상의 강자로 보이는 여인이 나타나 적개심을 드러내자, 그의 얼굴에도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아…우리 사이의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만일 당신이 저 놈을 죽이는 걸 방해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요.”
준의 목소리에는 일찍이 본 적 없는 살기와 분노가 가득했다. 형의 목숨이 걸려있는 문제이니, 한발자국도 물러 설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평생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메두사였으니, 눈이 뒤집히는 것이 당연했다.
“이놈! 감히 누구에게 그 따위 말을…!”
하지만 그녀가 염력을 끌어올리려는 순간, 돌연 마음 깊은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온기가 퍼져나가며 염력을 모으는 것을 방해했다. 그 기묘한 온기가 온 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자, 염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을 뿐아니라 거짓말처럼 살기가 가라앉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흥! 건방진 놈. 좋아! 오늘은 그냥 넘어가주마!”
“네?”
메두사 여왕이 너무나 쉽게 물러서자, 도리어 말을 꺼낸 준이 당황할 정도였다.
“정말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준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지만, 메두사 여왕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군말 없이 몸을 돌려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어어…?”
만약 예전의 메두사 여왕이었더라면, 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격을 퍼부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칠색 이무기의 영혼과 메두사 여왕의 영혼이 융합되면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메두사 여왕은 이준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지만, 칠색 이무기는 준을 친구이자 주인으로 여겼다. 메두사 여왕은 이준을 죽일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칠색 이무기는 자신의 주인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이준은 물론이고 메두사 여왕 본인조차 예상할 수 없는 변화였다.
준은 잠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메두사 여왕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바보처럼 두 눈을 꿈뻑 거렸다.
마침내 붉은 점이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지자, 준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검은 송곳을 붙잡았다. 이유야 어찌됐든 좋다. 이제 눈앞의 적을 처리하는데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준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메두사 여왕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곧바로 시선을 돌려 살의가 가득 찬 눈빛으로 범로를 바라보았다.
“흥, 저 계집이 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네놈 혼자서 우리 네 명을 전부 막을 수는 없어.”
그는 이를 악문 채 살기 어린 말투로 상대를 위협했지만, 준은 그런 범로의 말을 무시한 채 차갑게 웃으며 검은 송곳을 바닥에 내리꽂을 뿐이었다.
검은 송곳니가 바닥에 꽂히는 순간, 준의 양손 위로 신비한 분위기를 띤 청록색의 화염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상대의 불꽃이 이전과 다른 색상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범로는 섣불리 나서지 않고 가만히 서서 그 불꽃을 관찰했다.
곧이어 준이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가 떼어내자, 청록색의 화염이 푸른색과 반투명한 유백색의 불꽃으로 나뉘어졌다.
“구름 불꽃? 네놈이 어떻게 구름 불꽃을 길들인 것이냐?”
그 순간, 준의 왼손에서 타오르고 있는 화염을 알아본 범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두 불꽃이 융합된 청록색의 화염은 언제든지 다시 두 개의 화염으로 나누어 사용할 수도 있었고, 두 개의 불꽃을 하나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대지의 불꽃과 구름 불꽃을 분리해서 사용하면 그 위력은 두 불꽃이 합쳐진 청록색의 불꽃만 못했지만, 많은 수의 적들을 상대할 때는 두 불꽃을 나누어 사용하는 편이 나았다.
“공격해라! 놈을 죽여!”
하나도 모자라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사용하는 이준의 모습에 범로는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듯한 공포를 느꼈다.
게다가 지난번만 해도 분명 중급 투령 정도에 불과했던 준의 염력은 불과 2년 만에 상급 투왕 수준까지 폭증해 있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이 흐르면 투황을 넘어 투종에 이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개의 불꽃에 상상을 초월하는 성장속도까지…범로는 눈앞의 사내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지금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상대를 죽이지 못 한다면, 흑각성이 아니라 투기 대륙 전체를 뒤져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를 찾기 어려우리라.
범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핏빛 염력이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비릿한 피 냄새가 온 숲을 뒤덮었다. 실력이 낮은 사람들은 그 피비린내를 맡자마자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범로의 몸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세 명의 투왕 역시 번개처럼 몸을 움직였다. 네 명의 강자는 준의 전후좌우에서 일사분란하게 맹렬한 기세로 공격을 쏟아 부었다.
한 명의 투황, 세 명의 투왕의 협공은 투황이라해도 받아내기 어려운 수준의 것이었으나,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준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 했다.
준이 가볍게 왼손을 휘두르자, 무형의 불꽃이 순식간에 네 명의 강자들을 덮쳤다.
구름 불꽃이 닿는 순간, 그들은 전신의 염력이 미친 망아지마냥 날뛰며 온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네 명의 강자는 저마다 죽을힘을 다해 몸속의 염력을 억누르려 했으나, 갑자기 불을 집어삼킨 듯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지며 전신의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