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297화 (297/818)

제297화. 대장로의 부탁

회의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심각한 분위기에 이준 역시 조금 민망함을 느꼈다. 사실 자신은 처음부터 구름 불꽃을 노리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 날 필사적으로 한샘과 싸운 것도, 구름 불꽃에 맞선것도, 모두 구름 불꽃을 손에 넣기 위한 것일 뿐 이었다. 물론 장로들은 이를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을 위해 동상을 세우고 본원을 구한 은인으로 여긴다는 점에 조금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대장로님,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잠시 고민하던 이준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구름 불꽃을 토해내는 것만 아니라면, 본원을 위해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에휴, 보아하니 지금으로서는 사람의 힘으로 구름 불꽃을 만드는 방법뿐이겠구나. 그렇지 않으면 천계의 탑은 그냥 땅속에 묻힌 신기한 탑에 불과하니까.”

“사람이 구름 불꽃을 만든다고요?”

대장로의 말에 이준이 눈을 휘둥그레뜨고 되물었다.

“그걸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원장 대인이 이곳을 떠나기 전, 여분으로 준비해둔 구름 불꽃 용기가 있거든. 구름 불꽃을 그곳에 집중적으로 흘러 넣기만 한다면, 천계의 탑은 수련 속도를 높여주는 효과를 유지할 수 있겠지. 뭐…이전보다야 조금 못하겠지만 말이다.”

서천우는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준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학생에게 이런 제안을 하기가 민망한 것 같았다.

“흠흠…이건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네가 흡수한 구름 불꽃의 일부분을 우리에게 넘겨줄 수 있겠느냐?”

준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 불꽃은 이미 완벽하게 자신의 것이 되었으니, 본체가 손상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구름 불꽃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물론 대량의 염력이 필요하고, 몸이 조금 고달프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그리 큰 손해도 아니었다.

“하지만 구름 불꽃을 불러내어 불어넣더라도…제 염력이 사라지면 구름 불꽃도 사라지게 될 텐데요.”

“그 용기는 원장 대인이 직접 만든 것이니 그런 문제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중에 네가 이곳을 떠나고 나서가 문제인데…이 부분이 조금 곤란하구나. 졸업한 뒤에도 네가 종종 이곳에 찾아와 구름 불꽃을 주입해주지 않는다면 천계의 탑을 사용할 수 없게 될테니 말이다. 아마도 1, 2년에 한 번 정도는 이곳에 와줘야 할게다. 그리할 수 있겠느냐?”

이어지는 대장로의 말에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구름 불꽃을 흡수한 탓에 벌어진 일이니…그 정도 수고는 감수해야지요.”

“에휴, 네 녀석이 천하의 한샘도 얻지 못한 물건을 손에 넣을 줄이야…”

‘한샘’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멋쩍게 웃던 이준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하게 굳어졌다.

“한샘은 지금도 흑각성에 있나요?”

“그래.”

‘한샘’에 대한 이야기에 서천우의 눈에도 살기가 스쳤다. 서천우는 2년 전 그 때의 일을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놈을 그대로 두실 생각인가요?”

준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자, 대장로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날 이후 한샘이 흑각성에서 ‘흑맹’이라는 세력을 하나 만들었다. 적잖은 세력들이 그 곳에 들어갔지. 네가 없는 2년 동안 내원에서 몇 번이나 그 날 한샘과 함께 본원에 쳐들어온 놈들을 잡으러 갔었다. 하지만 번번히 흑맹의 방해를 받아 아직 놈들을 잡아들이지 못했지. 게다가 흑맹은 지금도 계속해서 강자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날이 갈수록 세력이 커지고 있어.”

노인의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준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 대장로님, 그놈들에게 복수할 생각은 있으신거죠?”

이에 서천우가 눈을 번뜩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한 소릴! 흑각성 놈들에게 본 떼를 보여주지 않고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을게다!”

“그럼 대장로님… 대장로님께서 사람들을 소집해주세요. 3일 후에 흑각성 놈들에게 본 떼를 보여주죠. ”

“푸하하하! 좋아! 이 녀석, 탑에서 나오자마자 아주 마음에 드는 소리만 골라하는구나. 마침 장로들 사이에서 흑맹이 갈수록 세력을 불려나가는 것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참이다.”

서천우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투왕급 강자 하나는 투령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힘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준의 실력이라면 어줍잖은 투황급 강자는 손쉽게 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네, 그럼 3일 후…부탁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 갑자기 서천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을 하기 전에, 그 투종 강자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대전투가 벌어졌을 때 그녀가 끼어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게다. 만에 하나 그녀가 흑맹과 손이라도 잡는다면…”

“그녀는 절대 흑맹에 들어가지 않아요.”

대장로의 걱정스런 한마디에 이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제 아무리 메두사가 자신을 미워한다해도, 인간과 손을 잡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자체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먼저 그녀와의 문제를 해결하기는 해야할 것 같네요.”

“도움이 필요하느냐?”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저와 그녀 사이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 없는 일인 걸요.”

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서천우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린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기다리거라.”

그 때, 대장로가 이준을 불러세웠다. 아직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너에게 한 가지 알려줘야 할 일이 있다.”

“네?”

“너의 둘째 형 이찬이 흑각성에 있지?”

서천우의 말에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전신에서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기운이 터져나왔다.

“둘째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준의 목소리는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날카로워 말을 걸기조차 무서울 정도였다.

“아직까지는…없다. 네 녀석이 구름 불꽃에 삼켜져 지하에 떨어졌을 때, 내가 사람을 보내 그를 뒤에서 보호하도록 했지. 처음 반년은 조용히 수련만 하더니, 1년 후 자객들에게 쫓겨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었다.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2달이 지난 후였어. 그런데 말이다. 한가지 이상한 일이 있다. 불과 두 달 만에 실력이 크게 늘어 투왕 수준에 올라있었거든.

그 이후 너의 형이 흑각성에서 조직을 하나 만들어 흑맹의 조직원들을 암살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아마도 너의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로 인해 지금 흑맹 놈들이 네 형을 노리고 있다. 오늘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이미 제법 실력있는 몇 개의 세력들이 네 형을 찾고 있다고 하더구나.”

노인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준의 눈이 살기로 빛나기 시작했다.

“찬이 형이 있는 곳을 아십니까?”

회의실을 나서던 준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임동수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지금까지 내원에 남아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네가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너와 함께 가한제국에 가기로 했으니까, 이놈이 언제 나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지.”

임동수의 한마디에 준은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것뿐 아니라 아직도 그 때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니…참으로 의리가 깊은 사내였다.

“좋아요. 선배, 어느 정도 일이 해결되고 나면, 꼭 함께 가한제국으로 가죠.”

“그래, 그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건 역시 형 문제겠지?”

동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되묻자, 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 째 형에 대해 이야기 해줄게 있어. 처음에 대장로님이 너희 형을 지켜보라고 파견한 사람이 나였거든. 뭐, 사실상 내가 자원한 거나 다름이 없었지만 어쨌든 좀 이상한 점이 있어.”

“어떤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 이 이야기를 해주려고 널 기다린 거였는걸. 처음에는 너희 형이 나를 발견할 수 없었어. 워낙에 실력 차가 났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실력이 늘어 나를 발견하더군. 그리고 음… 싸움이 벌어질 뻔 했지.”

“설마…! 선배!”

임동수와 싸운다면 이찬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순간 이준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임동수가 힘 조절에 실수하기 라도 했다면…하지만 이어지는 임동수의 말에 준은 다른 의미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걱정하지 마. 제대로 붙은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일대일로 붙는다면 내가 참패했을 거야. 일반적인 투왕급 강자라면 네 형과 붙어서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게 내 판단이야. 게다가 번개속성 염력을 가지고 있어서 공격력이 무시무시하더군. 하지만 뭔가 이상했어. 실력은 대단하지만 호흡이 비정상적이야. 그 정도 실력이라면 호흡이 안정되고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는데, 호흡이 불안정한게 대투사만도 못했고, 염력이 이상할 정도로 거칠었지. 그런데도 실력만큼은 왠만한 투왕급 이상이었거든.”

묵묵히 동수의 말을 듣던 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선배. 먼저 비석에 들러 오랜만에 오하늘도 한 번 보고…바로 흑각성으로 가야겠어요.”

“흠…사람들을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겠어? 지금 너희 형을 쫓고 있는 놈들, 보통이 아니야. 투왕 강자가 최소한 셋. 그리고 투황 하나.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 정도는 힘들지 않겠어?”

잠시 머뭇거리던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둘째 형의 생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괜한 호기에 섣불리 나섰다가는 형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몰랐다.

“어디에서 사람을 모으지? 장로님들은 대장로님의 소집으로 흑맹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하잖아. 학생들로는 될 리가 없고…”

이에 임동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이봐. 비석에 가겠다며. 지금 오하늘과 이윤영은 투왕의 벽을 깨기 직전이라고. 게다가 비석에는 이미 최상급 투령이 열은 돼. 그리고 보람 선배도 비석의 일원이지. 그 사람이야 옛날 옛적에 투왕에 이른 사람이잖아. 그리고 비석의 대장자리는 아직도 네거야. 대단한 놈들이지. 의리도 두텁고. 사실상 대장 자리를 공석으로 둔 상태로 비석을 본원 최고의 세력으로 만들어놨다고. 널 기다리면서 말이야.”

뜻 밖의 소식에 이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비석이…전혀 생각도 못했군요. 은이도 저도 없는 상태에서…”

2년 전만 해도 자신과 이은을 제외하면, 투령급 강자 한명 없었던 조직이 그 정도로 커졌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연금술사인 자신의 도움도 없이 그 정도로 조직이 커졌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정도의 힘을 손에 넣고도 여전히 대장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둔 채 자신을 기다려주었다는 사실에 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큭큭! 대가리 없이 2년 동안 그렇게 큰 놈들이야. 장난이 아니라고. 무엇보다 너에 대한 의리랄까, 충성심이랄까… 그런 게 아주 대단하거든. 진짜 멋진 놈들이지. 네 형의 문제라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걸고 달려들걸?”

가한제국에서부터 친구 하나 없이 혈혈단신 혼자 모든 일에 맞서온 준에게 이런 믿음직한 동료가 생겼다는 것은 자신의 실력이 향상된 것이상으로 기쁜 일이었다.

게다가 언제나 자신과 함께 하던 스승마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 더욱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준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궜다.

임동수는 그런 이준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짓더니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자, 감동은 나중으로 미뤄두자고. 하나 더 알려줄게 있어. 너네 둘째 형을 공격하려는 세력 중에 네 원수도 있어. 피의 종족의 종주. 알지?”

“범로?”

민망한 듯 눈물을 훔치던 준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끝을 봐야지. 자, 가자.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도 흑각성의 잡놈들이 네 형님을 찾고 있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