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4화. 살육전, 그리고 휴전
청록색 화염이 완전히 납령 속으로 빨려들어가자, 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드디어 두 번째 천지의 불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것이다.
그러나 수련 상태에서 벗어나는 순간, 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방금 납령 속으로 집어넣은 청록색 화염이 돌연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께서 천지의 화염을 융합할 때 문제가 조금 생길 수 있다고는 하셨는데, 설마…”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꽉 움켜잡고 있는 듯,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납령에서부터 사악한 기운이 가득한 불꽃이 퍼져 나오더니 온 몸 곳곳으로 흘러 들어갔다.
불길한 기운이 가득한 그 불꽃은 준의 몸에 어떤 상처도 입히지 않았지만,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며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젠장, 그 문제라는 게 이거였나?”
불꽃을 억제하려 염력을 조종하자, 그 사악한 불꽃은 더욱 더 거세게 저항하며 준의 머릿속을 파고 들었다.
“크으으으…”
불꽃이 퍼져나갈수록 살의와 분노가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태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길처럼 커져가고 있었다.
불꽃이 내뿜는 사악한 기운에 홀린 준은 평소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을 취했다. 감히 그 공포스러운 메두사 여왕을 향해 살기를 내뿜은 것이다.
“죽고 싶어?”
그 순간, 갑자기 메두사 여왕이 눈을 번쩍 떴다.
지금, 오랜 시간에 걸쳐 융합되어 가던 두 개의 영혼체가 마침내 하나가 되고, 서서히 신체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막 몸의 감각이 돌아오려는 찰나에 돌연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하찮은 인간 꼬맹이 하나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몸이 약해진 틈을 타 목숨을 노리다니,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평소대로라면 코웃음도 치지 않고 상대를 죽여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네놈이 정말로 죽고 싶은 게로구나!”
조금씩 가까워지는 이준을 바라보던 메두사 여왕이 손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무지개빛 염력이 매섭게 준의 가슴팍에 내리꽂혔다. 그러나 준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그녀에게 다가왔다.
“빌어먹을”
아무리 몸이 제 상태가 아니라해도 투령 수준의 인간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다니,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죽어!”
다음 순간, 살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청록색 화염이 메두사 여왕의 발치에 떨어졌다.
“이놈이 감히! 내 몸이 회복되기만 하면 널 갈가리 찢어죽여주마!”
* * *
조용한 숲 속, 돌연 긴박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곧이어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그림자들은 바삐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기 위해서는 한시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탁!
그 때, 한 사내의 발 밑에서 마른 나뭇 가지가 부러지며 쥐죽은 듯 고요한 삼림 속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던 괴한들은 갑자기 모두 멈추어서 험악한 표정으로 나뭇가지를 밟은 그 사내를 노려봤다. 그 순간, 선두에 있던 사내가 다급하게 손을 휘둘러 뒤에 있던 무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조심해!”
쉭! 쉭!
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어둑어둑한 수풀 사이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비가 쏟아졌다.
곧이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조심해! 공격해라!”
화살을 날린 자들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검은 망토를 두른 이들을 습격했다.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칼날이 허공을 가를 때 마다 시뻘건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갑작스레 벌어진 참극에 선두에 서 있던 사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구냐! 감히 흑맹을 건드리다니!”
하지만 대답 대신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시뻘건 피로 물든 날카로운 쇠붙이였다.
결국 사내는 이를 악물고 발을 놀려 숲의 반대편으로 달아났다.
그 순간, 등 뒤로 흉흉한 기운이 폭발하며 야수처럼 그를 덮쳤다.
콰앙!
무지막지한 힘이 실린 일격에 검은 망토를 걸친 지휘관은 붉은 피를 토해내며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사내는 입가에 흐르는 붉은 피를 닦아내며 악다구니를 써댔다.
“흑맹이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내 손에 죽은 흑맹놈들이 몇이나 될 것 같나?”
하지만 검은 망토를 두른 괴한을 공격한 사내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발을 구를 뿐 이었다.
순간 무시무시한 염력이 그의 발을 감싸며 그 아래 깔린 사내의 입에서 다시 한번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컥…!”
자신을 ‘흑맹’의 일원이라고 말한 사내의 숨이 끊어지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숲 속에서 달려나와 빠르게 그의 몸을 수색하더니 이내 편지 한통을 찾아내 그의 목숨을 앗아간 사내에게 내밀었다. 사내의 몸에서는 농후한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는 사내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것을 읽어내려가더니 이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흑맹놈들이 갈수록 세를 넓히고 있구나. 흑각성의 강자들이 하나 하나 놈들에게 무릎을 꿇고 있어.”
“한샘이 가람아카데미에 대항하기 위해 흑맹을 세운 이래, 그들의 실력은 실로 일취월장하여 이제는 가람아카데미조차 그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최근 한샘의 행적을 보면 흑각성 전체로 흑맹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루 빨리 손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음.”
피비린내를 풍기는 사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몸을 돌렸다.
사내가 걸음을 옮기자, 어림잡아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마침내 어두운 수림을 벗어나 밝은 햇살이 비추는 곳에 도착하자, 전신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던 사내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제 갓 스물을 조금 넘긴 듯한 사내의 얼굴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살기와 원한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농후한 피비린내가 가득 풍겨 나왔고 얼음장마냥 차가운 눈동자 속에서는 조금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너희들은 먼저 가거라.”
사내가 담담한 말투로 명을 내리자, 그의 뒤에 서있던 백 여명의 수하들이 천천히 어둠속으로 물러났다.
수하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득히 먼 북쪽을 바라봤다.
“준아…”
가문의 희망이자,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던 형제를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칼로 후벼파듯 아파왔다. 흑각성에 왔을 때, 맏이인 이정은 자신이 죽더라도 준이만큼은 죽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세 형제 중 가장 어린 이준만이 언젠가 운남종을 꺾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문의 희망이 가람아카데미에서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진지도 벌써 2년이 흘렀다.
순간 사내의 눈에 야수와도 같은 흉포한 기운이 내려 앉았다.
“준아…내 남은 목숨을 걸고 맹세하마. 널 해친 자들을 단 한 명도 남겨두지 않겠다.”
* * *
한편, 용암 호수 속에서는 메두사와 준이 술래잡기를 벌이고 있었다.
메두사는 힘이 회복될 때까지 준을 피해 도망을 다녔고, 한 시간 가까이 불꽃을 뿜어대면서 사악한 기운과 사투를 벌인 덕에 준은 제 정신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메두사의 몸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고, 분노한 메두사는 무지개 빛 염력을 사방으로 내쏘며 준을 쫓아다녔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정말 오해라구요! 제 정신이 아니었다니까요!”
살기 어린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던 청년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치자, 더욱 화가난 메두사는 길길이 날뛰며 염력을 뿜어댔다. 그녀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정말로 준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 간사한 놈이! 내가 정신을 잃은 틈을 타서 날 죽이려 해!?”
“아이고, 여왕님, 저도 피해자라고요! 정말로 천지의 불꽃 때문이라니까요!”
“헛소리!”
메두사 여왕이 손을 휘두르자, 또 다시 무지개빛 염력이 폭발했다. 이번 공격은 방금 전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맞았다면 정말로 목숨이 오락가락할만 위력이었다.
“이건 너무 하잖아요!”
결국 참다 못한 이준도 청록색 화염을 내뿜으며 그녀에게 대적했다.
구름의 불꽃과 대지의 불꽃이 융합된 화염이 폭발하자, 순간 용암 호수가 요동치며 시뻘건 화염을 토해냈다.
이 광경에 메두사 여왕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보아하니 앞에 있는 사악한 인간 놈이 두 불꽃을 융합하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잠깐! 멈춰봐요! 당신도 평생 여기에 있고 싶은 건 아니잖아요?”
잠시 공세가 잦아들자, 이준이 곧바로 위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도 혼자 힘으로 봉인을 깨뜨리기엔 어려울 거예요. 만약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훨씬 수월해질 거라고요. 어때요?”
이에 메두사 여왕은 말없이 준을 쏘아보다가 냉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불꽃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융합시킨 놈과 목숨을 걸고 싸움을 벌이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게다가 놈을 찢어 죽인다 해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본래 메두사 여왕의 성질머리라면 분에 못 이겨 이준을 찢어죽이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컷 날뛰었기 때문인지, 상황이 이렇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빨리 화가 가라 앉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영혼에 융합된 칠색 이무기의 영혼 탓이라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 * *
오늘은 본원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날이었다. 현재 본원에서는 매월 모든 학생들이 전부 천계의 탑에 들어가 수련할 수 있는 날이 정해져 있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불의 힘」이 없더라도 모든 학생들이 천계의 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준이 목숨을 잃은지 2년 사이, 본원에서는 더욱 많은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 아니라 몇 몇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 이 행사 역시 지난 2년간 일어난 다양한 변화 중 하나였다.
새벽 종소리가 울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본원의 학생들은 모두 신이 나서 천계의 탑으로 향했다. 하늘이 완전히 밝아졌을 무렵이 되자, 천계의 탑 앞 공터는 발 디딜틈 하나 없이 사람으로 가득 찼다.
천계의 탑 주변에 있던 공터는 2년 사이 거대한 광장으로 변해 있었다. 광장의 중심에는 천계의 탑이 위치해 있었는데, 땅 위로 날카롭게 솟아오른 탑 곁에는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본원의 학생들 중 몇 몇 그 곳을 지날 때 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동상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예를 갖추는 학생들에는 모두 새까만 휘장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이 멍청이… 이게 뭐야…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이딴 동상으로 이씨 가문을 다시 일으킬 수나 있어?”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이던 학생들 중 하나가 조용히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 거렸다. 20살 전후로 보이는 그 여학생은 다른 학생들이 모두 예를 갖추고 떠난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동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광장 한구석에서 소란이 일며 십 여명의 학생들이 광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들이 나타나자, 본원의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동상 앞에서 떠나지 못 하는 여인과 똑같은 휘장이 걸려 있었다.
“옥아.”
잠시 후, 광장을 가로질러 온 십 여명의 학생들 중 하나가 여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보라색 말총 머리를 질끈 묶은 작달막한 소녀가 자신을 부르자, 여인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정말 준이가 살아있을까요?”
“후…글쎄…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 다만, 왠지 모르게 살아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