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1화. 부활
엄청난 기운이 화염을 내리치자, 잔잔한 물결이 빠르게 움직이며 울퉁불퉁한 흔적을 남겼다가 마치 찰흙처럼 천천히 원래의 형태로 돌아갔다.
“내가 널 못 이길 것 같으냐!”
메두사 여왕이 미쳐 날뛰며 계속해서 무지개 빛 섬광을 쏟아내자, 돌연 용암 바다 속에 두 개의 녹색 점이 나타났다. 불 이무기의 눈동자였다.
다음 순간, 갑자기 그녀의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살갗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기 시작했다.
“젠장, 이건 뭐야? 내 몸에 뭘 집어넣은거야!”
곧이어 준의 몸에서도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준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심장의 불꽃’ 그것도 구름 불꽃의 본체가 용암바다 속에서 선사하는 ‘심장의 불꽃’이었다. 끝이다. 저 여자가 미쳐 날뛴 덕에 완벽하게 끝이 나버렸다.
천계의 탑 6층에서 그것을 이용해 수련을 할 때도 목숨을 걸어야했다. 그런데 이렇게 코 앞에서, 본체가 만들어낸 심장의 불꽃이라니. 이제 죽는건 시간문제였다.
……
“아…이 빌어먹을 화염!”
미칠듯한 고온으로 준의 정신이 조금씩 혼미해져 갈 무렵, 돌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두 눈을 뜨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는 메두사 여왕이 보였다. 그녀의 머리 위쪽에서는 사람과 뱀이 끊임없이 뒤엉키고 있었다. 두 영혼이 또 다시 몸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어휴…성질 머리하고는…영혼체 상태로 구름 불꽃에 닿다니…끝났군.”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나 어이없는 결말이었다.
그녀가 나타난 덕에 목숨을 건질까 했더니, 성질 머리를 못 이겨 자신의 영혼은 물론이고 칠색 이무기의 영혼까지 천지의 불꽃에 노출시키다니…너무나 허탈해 웃음조차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심장의 불꽃이 가슴을 파고든지 채 몇 각도 되지 않아 피가 들끓으며 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피부 위로는 계속해서 수포가 생겨났다.
온몸 곳곳을 엄습하는 끔찍한 고통에 문득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펑!
갈수록 맹렬하게 날뛰는 불길에 의해 머리카락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실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에 불씨가 파고든 것이다.
“이번에는…정말 죽겠구나….”
갈수록 암담해지는 상황에 준은 거의 생을 포기하기 직전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계적으로 대지의 불꽃을 몸에 순환시켜 심장의 불꽃에 대항하고, 자신의 몸을 둘러싼 화염갑옷을 유지해 무형의 불꽃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구름 불꽃은 한치의 자비도 없이 온도를 높여갔다. 준도, 구름 불꽃도, 이제 곧 끝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한편, 메두사 여왕은 준보다 더욱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혼체가 싸움을 벌이는 통에 몸 뿐 아니라 영혼마저 상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영혼이 불타 없어지는 과정에서 준과 구름 불꽃은 물론이고 메두사 여왕도, 칠색 이무기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머리 위에 있던 무형의 화염에 의해 불타던 인간과 뱀 형상의 영혼이 조금씩 융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이 융합은 매우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일단 두 개의 영혼이 완전히 융합된다면 쉽게 신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구름 불꽃이 그녀에게 주었던 극심한 고통은 자연스럽게 흩어져버릴 것이다.
하지만 메두사 여왕과는 달리 이준은 몸속의 온도가 계속해서 올라가며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결국 그의 육체가 천천히 녹아내리기에 이르렀다.
그의 피부는 보기에도 역겨울 정도로 끔찍한 형상으로 녹아내렸으며, 피부가 갈라지며 온 몸 곳곳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더욱 심각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몸 내부의 상황이었다. 혈관이 말라비틀어지고 내장마저 녹아내리기 직전이었다. 성게 모양의 힘의 수정 역시 기름 솥에 빠진 성게마냥 ‘튀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 속에 있던 대지의 불꽃이 구름 불꽃에 의해 삼켜졌다.
구름 불꽃을 흡수하기 위한 싸움의 결말은…그렇게 준과 대지의 불꽃이 구름 불꽃에 삼켜지는 것으로 끝이 나는 듯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을 깨달은 구름 불꽃이 극도로 흥분하며 녹색 눈을 번뜩였다. 그러자 이준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무형의 화염과 심장의 불꽃이 더욱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스승님… 죄송해요…”
칠흑 같은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갈수록 옅어지는 의식 속에서 이준은 희미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이준의 의식이 꺼지는 순간, 대지의 불꽃을 품고 있던 연화대마저 천천히 녹아내렸고, 새까맣게 타버린 준의 시신이 연화대가 녹아내리며 형성된 푸른색의 웅덩이에 안치됐다.
곧이어 준의 저장반지가 깨지며 그 안에 있던 온갖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푸른색의 액체가 각양각색의 약재와 연금비약을 흡수하자, 준의 시신이 자리한 곳 주위가 알록달록 물들었다.
반지 속에 있던 약재와 연금비약들은 모두 이준이 가지고 있던 것들이었다. 푸른 액체는 마치 잡탕을 끓이는 것처럼 모든 것들을 녹여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록달록한 액체가 막 숨이 끊어지려는 이준의 온몸을 감싸며 모공과 상처를 통해 끊임없이 몸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그의 혈관과 뼈, 피와 내장이 비를 만난 죽순처럼 맹렬한 기세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시체나 다름없던 사냥감의 몸에 돌연 생기가 돌자, 불 이무기가 눈을 번쩍이며 다시 화염의 온도를 끌어올렸다.
갑작스레 치솟은 온도에 막 생기를 되찾으려던 준의 몸이 다시 쪼그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록달록한 액체가 또 다시 준의 상처를 메우자, 다시 준의 몸에 생기가 돌았다.
두 개의 힘은 마치 누가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경합이라도 벌이듯 파괴와 복구를 반복했다. 구름 불꽃이 혈관과 뼈, 근육 등을 뜨겁게 태워버리면, 그 기이한 액체가 즉시 다가와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러한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평상시라면 제 아무리 준이라 해도 이 끔찍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 했다.
그렇게 한 달인지, 반 년인지, 일 년인지, 혹은 더 오래인지.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모른 채, 준과 메두사 여왕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고 있었다.
* * *
어느새 봄이 가고 가을이 왔다. 구름 불꽃이 난동을 부린지도 어느새 일 년이 지나 있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대격전으로 인해 폐허로 변했던 본원에도 다시 이전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 사이 졸업생들이 나가고, 신입생들이 들어왔지만, 올해도 여전히 신입생과 선배들간의 기싸움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강자 목록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학생들의 사투 역시 계속 되고 있었다.
그 사이 ‘이준’이라는 이름은 전설이 되어 있었다.
안타깝게 죽은 불세출의 천재의 이야기는 두고 두고 회자되며 점점 더 아련한 추억이 되었고, 동시에 더욱 채색되고 미화되어 모든 학생들에게 숭앙받는 신화가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가 살아있었다면 서천우 대장로 다음가는 강자가 되었을거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선생이나 장로들 중 일부가 그 의견에 동의를 표하면서 ‘이준’이라는 학생의 전설은 점점 더 몸집을 불려나갔다.
한편 본원으로 모여드는 신입생의 수가 급속도로 많아지면서, 현재 본원에는 각양각색의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끊임없이 생겨났다. 일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두각을 드러낸 새로운 학생들이 내원의 세력들 사이를 비집고 자신들만의 세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세력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굳건한 입지를 갖춘 세력이 있었으니…바로 1년 사이에 더욱 크게 성장해 이제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력이 된 ‘비석’이었다.
‘비석’이 설립된지는 이제 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본원의 장로들마저 인정하는 최강의 세력이 되어 있었다.
* * *
한줄기 빛조차 없이 완벽한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 속…갑자기 푸른 섬광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며 준의 눈을 찔러댔다.
시작도 끝도 없는 암흑 속을 헤메던 준의 의식은 먼 발치에서 일렁이는 푸른 화염을 발견하고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염은 결코 크지 않았지만 은은한 온기를 내뿜으며 아름답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살아있는 건가?”
푸른 화염이 건넨 온기에 정신을 차린 준이 입을 떼는 순간, 갑자기 찬란한 빛이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용암 호수의 한가운데, 시체처럼 떠있던 청년의 몸이 갑자기 움찔거리더니 굳게 닫힌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눈을 뜬 청년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과 몸 곳곳을 더듬어보았다. 화염에 녹아 곤죽이 되었던 육체는 어느새 상처 하나 없이 깨끗이 나아 있었다. 주먹을 쥐어보자,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충만한 힘이 전신을 휘감았다.
말라 비틀어져 바스라졌던 혈관은 매끈한 대로가 되어 있었고, 흐물흐물 녹아내렸던 피부는 마치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탄력이 넘쳤다. 뜨겁게 달아올라 부서질 것만 같았던 뼈 역시 쇠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맞다. 염력!
놀라운 변화에 반쯤 넋을 잃고 있던 준은 곧바로 온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염력회오리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그의 염력 회오리에는 성게 모양의 힘의 수정은 커녕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힘의 수정은? 염력은?”
빨갛게 혈색이 돌던 얼굴이 다시 창백하게 변했다. 염력을 잃느니 죽는 것이 나았다. 그의 머릿속에 순간 약로를 만나기 전 비참했던 자신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 때, 갑자기 그의 온 몸 곳곳에서 거센 소리와 함께 폭포처럼 염력이 쏟아져 나왔다. 잘 닦인 길처럼 윤기가 흐르는 혈관을 지나 대하처럼 흐르는 염력에 준은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말도 안돼…!”
정신을 차린 청년이 천천히 손을 뻗어 주먹을 쥐자, 공간이 뒤흔들리며 붉은 에너지가 쏟아져 나와 그의 손 등을 감쌌다.
준은 곧바로 손 위의 에너지를 흘려보낸 뒤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몸속의 염력이 경맥을 따라 폭발적으로 솟구치더니 등 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염력 날개가……”
준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에 펼쳐진 날개를 바라봤다. 비행무투기를 사용해 만들었던 그 검보랏빛의 날개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등에 펼쳐진 것은 그의 불꽃처럼 푸른 빛을 띤, 진짜 날개였다.
“스승님! 하늘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요!”
신이 나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그의 발 끝에 무언가가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발치에는 검은 송곳과 두루마리가 널부러져 있었고, 반지 안에 있던 연금비약과 약재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연화대 역시 보이지 않았다.
“혹시 내가 소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이 부활할 수 있었던 연유를 하나 하나 되짚어보던 준은 멀지 않은 곳에 눈을 감고 있는 전라의 여인을 발견하고는 소스라 치게 놀랐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는 뱀과 사람의 영혼이 거의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이건 또 뭐지…? 영혼이 이런식으로 하나가 될 수도 있는거야? 그럼 깨어나는건 어느 쪽이지? 메두사? 아니면…칠색 이무기?”
그 때, 갑자기 구름 불꽃이 진동하며 준을 향해 가느다란 녹색 섬광이 날아들었다.
녹색 광선이 피부에 닿는 순간, 준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제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자신을 죽였던 불꽃을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대지의 불꽃을 끌어내기는커녕 염력조차 운용하지 못했건만, 심장의 불꽃이 몸을 태우기는커녕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설마…심장의 불꽃에 익숙해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