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불지옥
준이 마그마 호수에 빠져있는 보름 사이, 본원은 조금씩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고, 천계의 탑 역시 다시 문을 열었다.
구름의 불꽃이 봉인되면서 다시 많은 학생들이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서천우를 비롯한 본원의 장로들은 그곳에 묻혀버린 준을 생각할 때 마다 침통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특히 대장로 서천우는 날이 갈수록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책감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몇년만 있었더라면 온 대륙을 호령할만한 청년을 희생시켜 지킨 본원이다. 그 청년이 없었더라면, 그 잘난 투종의 힘으로도 본원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청년을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불지옥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은 다름 아닌 서천우 본인이었다.
한편, 이준을 잃은 비석은 침통한 분위기속에서도 날이 갈수록 세를 불려나가고 있었다.
비록 이준이라는 지도자를 잃었지만, 보람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이로 인해 비석은 임수혁과 류지안의 세력을 능가하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무력하게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잃은 것을 계기로 오하늘과 이윤영을 비롯한 모든 비석 구성원들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이준을 잃은 직후 사실상 비석의 운영은 오하늘과 이윤영 두사람이 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두 사람은 비석의 구성원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석의 우두머리는 여전히 이준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 * *
천계의 탑, 8층.
“대장로님, 이곳은 대장로님의 완벽한 봉인으로 인해 보호되고 있습니다. 제1층의 문 역시 봉인으로 감싸져 있으니, 감히 누구도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노인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장로라는 호칭으로 보았을 때, 백발이 성성한 그 노인은 서천우 장로가 분명했다. 허나 지금 그의 모습은, 이전과 전혀 달랐다. 그는 천하를 호령하던 투종 강자가 아니라, 힘을 잃은 평범한 노인처럼 쇠약해져 있었다.
“본원에 침입했던 흑각성의 강자들은 모두 조사했나?”
“이미 완벽히 조사했습니다.”
“사람을 모아라. 한 명 한 명 찾아내서 가람 아카데미를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주어라. 그들의 시신을 토막 내어 시체나무에 걸어라. 앞으로 십 년, 아니 천년은 그 어떤 이라도 감히 가람아카데미 쪽으로 눈조차 돌리지 못 할 정도로 처참하게 죽여 그들의 시체를 모두가 보는 곳에 걸어두어라.”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서천우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해보아라…그는, 아직 살아있는가?”
대장로의 질문에 장로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감히 입을 열지 못 했다. 구름 불꽃에 의해 한 입에 삼켜진 데다가 심층부까지 빨려 들어갔을 터이니, 투종 강자라도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듣자하니 이준의 둘째 형이 가람 아카데미에 있다가 흑각성으로 갔다고 하는구나.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고 그가 살아있다면 아카데미의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그를 지원하고 은혜를 갚거라.”
말을 마친 서천우는 휠체어를 움직여 천천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 *
머릿속에 쇠약한 스승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준은 수련을 멈추고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몸을 지켜주던 새하얀 화염은 어느새 종잇장처럼 얇아져 있었다.
“허허, 이제 때가 왔다. 잘 할 수 있겠느냐?”
“스승님, 고생하셨어요.”
“하하”
약로의 웃음 소리가 조금씩 흐릿해지자, 준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이제 몇 각 후면 이 불지옥에 너를 홀로 남겨두어야 하니 마음이 무겁구나. 하지만 나는 네가 반드시 이 시련을 견디고 더욱 강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너를 다시 만나는 날이 기대되는구나.”
“스승님…”
사실 약로는 준에게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구름 불꽃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힘을 썼고, 반지 역시 상하고 말았기 때문에, 이번에 눈을 감는다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그 이야기가 혹여 제자의 마음을 어지럽힐까 걱정되어 애써 웃으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던 것이다.
그 때, 순간 무형의 화염 어느 한 부분에서 두 개의 가느다란 녹색 광선이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마치 불 이무기의 눈동자처럼 생긴 그것은 탐욕스러운 눈길로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어서 준비하거라.”
곧이어 종잇장처럼 얇게 남아있던 스승의 마지막 불꽃이 서서히 사라지고, 제자의 푸른 불꽃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침내 새하얀 화염이 완전히 사라지자, 무형의 화염이 대지의 불꽃으로 몸을 감싼 준을 향해 야수처럼 달려들었다.
“잘하고 있다. 역시 내 제자구나. 껄껄…!”
약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잠시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다.
약로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준은 약로의 의식이 빠른 속도로 자신의 몸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던 순간, 돌연 웅대한 힘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스승님,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약로의 힘을 넘겨받은 준은 순간 그간 스승이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냈는지를 실감했다.
‘이런 괴물 같은 불꽃속에서 보름 이상이나 저를…’
그러나 준이 감상에 젖어들 틈도 없이 끔찍한 열기가 그를 덮쳐오고, 순식간에 전신의 살갗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의 전신은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검은 색 의복은 재가 되어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몸 곳곳에서 수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안돼…정신차려…!’
준은 곧바로 반지 속에서 기력의 조각을 꺼내 입안에 털어넣었다. 염력이 떨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이다.
온 몸을 불사르는 고통,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완벽한 절망, 그리고 누구도 보지 못 하고,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완벽한 고독 속에서 준은 어떻게든 살길을 찾으려 애썼다.
……
준은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계속해서 구름 불꽃에 대항했다.
하지만 여전히 희망은 없었고, 늘어나는 것은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구름 불꽃의 끔찍한 열기가 만들어낸 화상자국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름 불꽃이 대지의 불꽃을 안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것을 삼키려 하고 있다는 점 하나 뿐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재가 되어 사라졌으리라.
놈의 탐욕은 끝이 없었고, 그는 대지의 불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뒤 본원의 모든 것을 불살라 재로 만들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구름 불꽃이 착각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이 대지의 불꽃을 삼키기 위해 공을 들이는 사이, 준이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
끝없이 펼쳐진 불지옥 속, 준은 기계적으로 약을 들이키고, 푸른 화염을 뿜어내 구름 불꽃의 열기를 견뎌냈다.
이미 시간 개념 따위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몇 시간? 며칠? 아니, 벌써 몇 달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부터 준은 그런 질문을 멈추게 되었다.
기력의 조각이 모두 떨어지고, 내 염력이 바닥나면 그것으로 끝이겠지. 스승님은 어떻게 하지? 아버지는? 은이는?
그 질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비라도 맞은 듯 ‘서늘한’ 기분이 느껴졌다.
서늘하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자신은 불지옥속에서 여전히 한치도 벗어나지 못 하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든 준은 곧바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너…!?”
자신의 어깨 위에 칠색 이무기가 앉아 있었다.
망망대해를 떠돌다 아는 사람을 만난 것만 같은 반가움이 그의 가슴을 채워나가자, 뜻 모를 눈물이 솟아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무기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준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이무기의 눈동자가 한없이 차가운 빛을 띠었다가 이내 귀여운 아기 뱀의 그것으로 바뀌고, 다시 살기로 가득해졌기 때문이다. 이무기와 메두사 여왕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무기의 몸 안에 살고 있는 두 개의 영혼이 몸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거듭하기를 수 차례, 갑자기 찬란한 무지개 빛 섬광이 뿜어져 나오며 이무기의 몸이 새하얀 여인으로 변화했다.
메두사 여왕이 나타나자, 구름 불꽃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갑자기 이글거리는 무형의 화염을 폭발적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두사 여왕은 자신의 그 불꽃을 보고도 태연한 표정으로 가볍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휘황찬란한 일곱 빛깔의 섬광이 무형의 화염을 완벽히 차단해냈다.
무형의 화염을 막아낸 메두사 여왕은 그제야 자신이 이상한 곳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하, 여왕님!”
돌연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여왕의 얼굴에는 더욱 싸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메두사 여왕의 서늘한 눈빛에 불구덩이 속에서도 한기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너 이 자식, 눈을 뽑아줄까? 아니면 혀를 잘라줄까? 어떻게 죽여야 이 더러운 기분이 풀리지? 대체 내가 왜 이딴 곳에서 깨어나야 하지?”
그녀가 손을 흔들자, 무지개빛 섬광이 응집되며 붉은 의복이 되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준은 가볍게 머리를 흔든 뒤 최대한 예의 바른 말투로 자신이 겪은 일을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준이 설명을 마치자마자 메두사 여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자식이! 역시 널 죽였어야 했어!”
천하의 메두사 여왕이라해도 천지의 불꽃만은 두려웠다. 그런데 그 천지의 불꽃이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불지옥 한복판에서 깨어나다니, 당장이라도 눈 앞의 꼬맹이를 찢어발겨 분을 풀고 싶은 기분이었다.
준은 잠시 메두사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비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스승도, 자신도 메두사 여왕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이라면, 지금 이 불지옥에서 자신을 구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여왕 마마,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찢어발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우선 힘을 합쳐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메두사 여왕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손을 휘둘러 화염을 가르려 했다. 그러나 투종 강자인 그녀의 염력으로도 구름 불꽃을 가를 수는 없었고, 그저 작은 파문만이 은은하게 퍼져나갈 뿐이었다.
자신의 공격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막히자, 메두사 여왕이 이를 악물고 재차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여기는 구름 불꽃이 태어난 곳이에요. 밖에서도 막강한 놈인데, 이곳에서 놈을 이길 수는 없어요.”
곁에에서 메두사 여왕이 구름 불꽃을 공격하는 것을 바라보던 준이 충고하자, 그녀의 눈에 또 다시 살기가 돌았다.
그 때, 갑자기 구름 불꽃이 그녀를 향해 화염을 쏘아냈다. 이에 여왕의 주위에 있던 무형의 화염들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그녀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무지개 빛 섬광이 잠식되기 시작했다.
이 광경에 메두사 여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녀는 다시 한번 거세게 무지갯빛 염력을 쏟아내 주위의 화염들을 걷어낸 뒤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마도 혼자 힘으로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네 몸속에 있던 그 늙은이는? 빨리 나오라고 해! 네 실력으로는 나와 힘을 합쳐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메두사 여왕은 자신의 염력으로 무형의 화염의 공격을 막아내며 연신 소리를 질러댔다.
“스승님은…힘을 모두 소진하셔서…당장은 깨어날 수 없어요.”
“빌어먹을!”
준의 말에 메두사 여왕이 크게 분노하며 손을 치켜들었다. 분을 이기지 못해 준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절 죽여도 여기는 못 빠져나가세요.”
“이…이…빌어먹을!”
준의 뻔뻔한 태도에 더욱 부아가 치민 여왕은 더욱 더 거친 기세로 마구 염력을 날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