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9화. 봉인
“준아, 괜찮으냐?”
한샘이 중상으로 정신을 잃은 것을 발견한 서천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준에게로 다가왔다.
준은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샘에게 아직 볼 일이 끝나지 않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한샘이 아니라 구름 불꽃이었다.
구름 불꽃이 있던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준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갔다.
구름 불꽃이 거대한 두 개의 불꽃이 충돌한 뒤 생겨난 화염의 잔해를 빨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도한 준의 마음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갔다. 비록 구름 불꽃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지금 구름 불꽃은 다른 불꽃을 흡수하며 힘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준의 시선을 따라 구름 불꽃의 본체를 바라보던 서천우의 얼굴 역시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 역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직감한 것이다.
“저놈을 막아야 해요!”
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천우 등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그러나 이글거리는 무형의 화염이 불꽃을 토해내자, 감히 누구도 그 곳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그 사이 구름 불꽃은 점점 다 빠른 속도로 주위의 화염과 열기를 흡수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불꽃을 먹어치우고 말았다.
화염 에너지를 흡수한 무형의 불꽃은 이전보다 더욱 강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구름 불꽃의 강력한 에너지를 감지한 김씨 형제는 즉시 흑각성의 일파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내원을 빠져나갔다.
“껄껄, 서 장로. 저 불꽃은 이제 당신네들이 해결하시오. 내일 내원이 전부 불타버렸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길 바라오.”
차가운 얼굴로 멀어져 가는 흑각성 무리를 바라보던 서천우가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우리에게 맡기고 내원을 빠져나가라!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서천우의 일갈에 학생들이 우왕좌왕하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하늘 위에 떠 있는 무형의 불꽃이 가진 파괴력을 눈치채고 있었다. 만약 저것이 지상으로 내리꽂힌다면, 본원은 흔적도 없이 불 타 없어지리라.
“기다려! 준이가 아직 저기에 있잖아!”
그 때, 보람이 임동수를 가로막으며 하늘 위에 있는 검은 그림자를 가리켰다.
“괜찮아요! 준이는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잖아요! 흑각성의 약황 한샘조차도 준이한테 졌다고요! 우리가 간다고 뭘 할 수 있겠어요! 오히려 장로님들의 손속만 어지럽게 할 뿐이에요!”
임동수가 재빨리 대답하며 학생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하늘에서는 대장로가 장로들을 모아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장로들은 다시 봉인진을 준비해라! 본원의 존망이 그대들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준아! 너는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라!”
서천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름 불꽃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지며 청색의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청색 불꽃은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준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샘과의 대결에서 모든 힘을 쏟아낸 준에게는 세 가지 천지의 불꽃을 흡수해 더욱 빨라진 구름 불꽃을 피해 달아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대장로님, 빨리 봉인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저놈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엄청난 속도로 이준을 뒤쫓는 구름 불꽃을 바라보며 한 장로가 급하게 소리쳤다.
“잠시 기다려라, 준이가 봉인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다려!”
“늦습니다!”
또 다른 장로가 핼쓱한 안색으로 급하게 소리쳤다.
서천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떨며 이준과 거리를 좁히고 있는 구름 불꽃을 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순간, 준의 이마에서는 비 오듯 땀이 쏟아져 내렸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준은 마지막 남은 기력을 짜내 봉인진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저기까지만 간다면, 죽지 않으리라.
그러나 준과 봉인진의 경계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의 등 뒤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니 무형의 화염이 미친 듯한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아…”
고요한 정적. 마치 온 하늘이 얼어붙은 듯했다.
……
본원 밖으로 달아나던 학생들은 검은 망토를 두른 소년이 구름 불꽃에게 삼켜지는 광경을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윤영과 하늘, 임동수, 보람, 그리고 류지안과 임수혁 등 이준과 친분이 있는 자들과 비석의 구성원들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펑!
이준을 삼킨 구름 불꽃은 그대로 방어진을 빠져나가기 위해 천계의 그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대장로가 다시 명을 내렸다.
“모두 천계의 그물을 유지하도록! 내가 봉인진을 완성하겠다!”
서천우가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무표정한 낯으로 말했다. 그의 몸에서 번쩍거리며 응집되는 광선을 바라보며 장로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 했다.
만일 이대로 구름 불꽃을 봉인한다면…이준은? 그들의 머릿속에는 모두 같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대장로님…….”
주위의 반응에 아랑곳 하지 않고, 서천우의 손끝에서 더욱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놈, 오늘 이 목숨을 다해 널 영원히 봉인시켜주마!”
곧이어 거대한 흑색의 광선이 활화산처럼 터져나오며 하늘 위로 견고한 흑색의 그물이 펼쳐졌다. 그물은 신비로운 빛을 내뿜으며 곧바로 구름 불꽃을 덮쳤다.
검은 천계의 그물이 자신을 덮치자, 구름 불꽃이 울부지는 소리가 하늘 가득 울려퍼졌다.
서천우는 창백한 안색으로 가쁘게 숨을 쉬며 계속해서 저항하는 구름 불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천천히 천계의 탑으로 이동시켰다. 꼭대기에 도착하자, 구름 불꽃이 더욱 더 거세게 저항했다.
구름 불꽃의 미칠듯한 몸부림에 봉인진을 이동시키던 서천우의 입에서 왈칵 하고 새빨간 선혈이 터져 나왔다.
“쿨럭!”
하지만 그는 연신 피를 토해내면서도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노인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새도 없이 거칠게 손을 휘둘러 구름 불꽃을 천계의 탑 정상 부근까지 이동시켰다.
“키이이!”
구름 불꽃이 미쳐 날뛰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놈을 감싼 흑색의 그물은 끝내 그를 그 저주스러운 천계의 탑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뜨렸다.
“봉인!”
탑의 심층부로 떨어지는 구름 불꽃을 바라보며 대장로가 손을 휘두르자, 기이한 흑색 섬광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며 검은 그물이 응집되어 탑의 꼭대기를 덮었다.
……
마침내 봉인진이 완성되고, 온 세상을 불태워 버릴 듯 날뛰던 구름 불꽃은 결국 천계의 탑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커다란 동굴로 되돌아갔다.
이후, 이곳에는 어떤 사람도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봉인의 가장 심층부에 있는 구름 불꽃 역시 다시는 나오지 못하리라.
봉인이 완성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하늘에 있던 서천우의 몸이 순식간에 땅으로 추락했다. 마침 한 장로가 잽싸게 그를 받아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불타는 대지 위에 쳐박히고 말았을 것이다.
잠시 후…정신을 차린 대장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봉인된 천계의 탑 최하층에는 나를 포함해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
그는 몇 번이나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오늘 구름 불꽃을 봉인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그 젊은이를 기억하라.”
* * *
구름 불꽃에 삼켜진 순간 정신을 잃었던 준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고통에 서서히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이…이게 뭐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사방 어느 곳을 보아도 붉은 색 밖에 보이지 않았다. 위, 아래, 왼쪽, 오른쪽 온 사방이 모두 붉은 마그마로 가득했다.
당황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이준이 자신의 몸 주위로 무형의 화염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준은 머리를 흔들며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구름 불꽃에게 공격당 한 후, 기억이 없었다. 그럼, 여기는 어디인가?
“여긴 탑의 심층부다. 구름 불꽃이 태어났던 곳이지.”
돌연 준의 마음 속에서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로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잦아들어 있었다. 순간 준은 스승이 다시 잠드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잠시 쉬면 괜찮을 게다. 이 녀석, 네 놈이 구름 불꽃에게 삼켜져 이곳에 있은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이놈이 너와 대지의 불꽃을 빼앗으려 했지. 내가 얼음 불꽃의 정수로 방어하긴 했지만, 힘을 너무 많이 썼어. 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게다. 그 때가 되면, 너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제서야 준은 자신의 몸 주위로 시리도록 새하얀 화염이 덮힌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예전에 보았던 마그마 호수에 빠져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 속에서 보름이라니…스승은 구름 불꽃에 삼켜진 채 마그마 호수에 빠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으리라.
스승의 눈물겨운 사투를 생각하자, 준의 눈에서는 그만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어떻게 해야 이곳을 빠져나가죠?”
잠깐의 침묵 후, 다시 약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른다. 이곳은 천계의 탑 지하의 가장 깊은 곳일게다. 이곳에서라면 구름 불꽃의 힘은 거의 끝이 없다고 봐야 한다. 내가 힘을 회복해 이 봉인을 깨뜨린다면 모를까…이곳에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 게다가 우리가 있는 곳은 마그마 호수의 가장 깊숙한 곳이다. 만약 구름 불꽃이 주변의 화염을 움직인다면, 넌 곧바로 저 이글거리는 마그마에 삼켜질 게다. 대지의 불꽃이 있다해도 도리가 없을테지.”
스승의 말대로라면,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 불지옥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나요?”
완전히 절망한 준은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약로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준은 가슴에서 울컥하고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죽기에는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가문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찾아야했다. 은이도 만나야 한다. 스승님의 몸도 찾아드려야 한다.
“안돼요 스승님! 절대로 여기서 죽을 순 없어요!”
소중한 사람들, 해야할 것들을 떠올리자, 정신이 들며 전신에 설명할길 없는 기운이 퍼져나갔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 만약 지금 포기한다면, 그것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하하”
절망스런 상황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제자의 굳건한 의지에 약로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네 녀석의 투지가 그렇게 강하니, 이 늙은이도 정신을 차려야겠구나. 내가 제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골랐어. 기억하거라. 내 얼음 불꽃의 정수는 아마 삼 일 동안은 유지할 수 있을 게다.
삼일 후, 내 영혼에 남아있는 모든 힘을 너에게 집중시키마. 그러면 난 힘이 고갈되면서 깊은 잠에 빠지게 될 게야. 그 때, 스스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지금으로써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야. 언젠가 다시 눈을 뜨게 됐을 때 또 다시 크게 성장해있는 제자를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구나.”
스승의 결연한 말투에 준의 눈시울이 또 다시 붉어졌다.
“스승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제자가 반드시 스승님의 영혼을 담을 수 있는 몸을 만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반드시 살아남아 스승님을 부활시키겠습니다.”
“하하, 이 녀석, 네 몸이나 잘 돌보거라!”
약로가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반지 속에서 푸른 연화대를 꺼내 곧바로 그 위에 앉아 눈을 감았다. 푸른 연화대에 앉자, 타오를 듯이 뜨거웠던 고통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내가 깊은 잠에 빠진 후, 만약 참을 수 없다면 땅의 정련단을 마시거라. 그럼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게다. 원래 그건 구름 불꽃을 삼킬 때 사용하려고 했지만…자칫하면 구름 불꽃에게 삼켜질 상황에서 그런 것을 따질 수는 없지.”
스승의 충고에 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수련에 들어갔다.
불지옥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수련에 몰입하는 제자의 모습에 약로의 입가에는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