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화. 비장의 수
「약존」
누군가는 그를 ‘연금술의 신’이라고까지 불렀었다. 그리고 그 말은, 한치의 과장없는 진실이었다. 아직까지도 투기 대륙의 진정한 강자들은 「약존」이라는 공포스러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약로가 그런 최정상급의 진정한 강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강자들이 약로에게 은혜를 입었었다. 거래관계보다 더 질이 나쁜 것이 바로 ‘존경’이었다.
실로 많은 강자들이 약로로 인해 목숨을 건졌고, 원한을 풀었으며, 위험한 고비를 넘겨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었고, 가문을 일으켰다.
「약존」이 사라진 뒤 수많은 강자들이 한샘을 찾아와 약로의 행방을 묻곤 했다. 그 중 눈치가 빠른 몇 몇은 살기로 눈을 빛내며 한샘을 노려보다 돌아갔다. 한샘이 약로를 배신한 것은 아닌가 의심했지만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그 중 몇 몇은 약존 선생님을 반드시 찾아내겠다며 몇 년이나 투기 대륙을 떠돌기도 했다.
하지만, 약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다면…. 만약 그때 자신이 약로에게 했던 일이 알려지면, 그는 벗어날 수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자명했다.
가장 먼저, ‘바람의 신’이라 불리는 고영찬이 나타나 그의 가죽을 벗기고 힘줄을 뽑아버릴 것이 분명했다. 고영찬이라면 능히 그리 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디 고영찬 뿐인가? 그 외에도 기라성 같은 강자들이 줄줄이 나타나 자신의 온 몸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찢어발길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모아온 모든 재화를 털어 연금비약을 미친 듯이 뿌리고 다녀도 누구도 자신을 돕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해보던 한샘의 얼굴이 점점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제 자신이 살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살려면, 이준과 약로의 입을 영원히 닫아버려야 했다.
“아직 죽지 않으셨군요. 하지만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조용히 숨어계셨어야지요. 그 날 못 다한 일을 오늘 마치도록 하지요.”
한샘의 차가운 한마디에 준의 몸에서 한층 더 맹렬한 기세로 푸른 화염이 솟구쳤다.
“내가 있는 한 그럴 수 없다. 가증스러운 놈.”
“흥, 그 때 내가 아무리 애원해도 불개를 전수해주지 않더니, 너 따위에게 전수해주다니…그래, 오늘 한번 확인해보자. 네 놈의 무엇이 나보다 나아서 내가 아닌 너에게 그 보물을 주었는지 말이다!”
한샘의 말 속에는 감추기 힘든 질투와 원망이 어려 있었다.
“그때 그 늙은이가 나에게 불개를 전수해주었다면, 지금까지도 성심을 다해 스승으로 모셨을 거다. 이건 모두 그 노인네가 자처한 일이야!”
그러나 한샘이 뭐라고 지껄이든, 준은 귀머거리마냥 그의 말을 무시하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할 뿐이었다.
곧이어 준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렁이던 푸른 화염이 돌연 준의 오른쪽 손으로 모이더니 거대한 푸른색의 화염구가 만들어졌다. 이어서 왼손을 천천히 펼치자, 눈처럼 새하얀 화염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뼈가 시릴 정도의 한기와 살이 녹아내릴 것 같은 열기를 가진 그 불꽃을 마주하자, 한샘의 얼굴이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얼음 불꽃의 정수! 그 늙은이의 보물을 왜 네가! 대체 왜! 내가 아니라 너란 말이냐!”
“스승을 배신한, 짐승만도 못한 놈. 스승님이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너 같은 짐승에게 불개와 천지의 불꽃을 넘기지 않은 것일 것이다.”
말을 마친 준은 겁에 질린 한샘을 앞에 두고 푸른색과 흰색의 두 불꽃을 천천히 합치기 시작했다.
청색과 백색의 두 불꽃이 가까워지자, 순식간에 주변의 온도가 올라가며 공간이 일그러지고, 귀를 찢어 놓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상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한샘은 마음속에서 솟구치던 분노와 질투가 잠시 사그라졌다. 저 녀석은 천지의 불꽃이 서로 융합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약존이 스승으로 있는데, 그런 기초적인 것조차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한 의문도 잠시, 한샘은 곧바로 짙푸른 화염을 응집시켜 견고한 삼지창을 만들어냈다.
한샘은 짙은 청색의 화염 삼지창을 꽉 쥔 채 이준을 노려보며 창을 든 손을 치켜들었다.
“늙은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완벽하게 사라지게 해주마!”
말이 끝나자마자 한샘의 몸속에서 거대한 푸른 화염이 치솟아 하늘을 뒤덮었다. 짙푸른 화염은 한샘의 손에 들린 삼지창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응집되었고, 이내 화염으로 만들어진 삼지창이 엄청난 길이로 늘어나며 더욱 뜨겁게 불타기 시작했다.
“이 사형이 직접 아우님과 스승님을 함께 이곳에 묻어주겠소!”
다음 순간, 그의 손을 떠난 삼지창이 마치 벼락처럼 준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준의 손에서 두 개의 화염이 하나로 합쳐지며 청백색의 화염이 완성되고,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눈부신 빛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런 빛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빛이 약해지며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하늘 위, 흑색 도포를 입은 청년의 손바닥 위에는 한 송이의 거대한 청백색의 불꽃으로 만들어 진 연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불꽃으로 만들어 진 연꽃은 이전의 청색 연꽃보다 훨씬 더 고요하게 불타고 있었다. 심지어 어떠한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리한 눈을 가진 이들은 청백색의 연화가 천천히 회전함에 따라 주변의 공간이 기이하게 왜곡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 연화의 힘을 느끼지 못했지만, 하늘 한 곳에서 맹렬한 기세로 싸우고 있던 서천우와 김씨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전투를 멈추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준의 손 위에 있는 연꽃을 발견한 순간,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 가장 강한 세 사람조차 숨길 수 없는 공포가 깃들었다.
청백색의 연꽃은 이준의 손 위에서 살짝 떠 있는 상태로 천천히 회전했다. 고요하고, 청아한, 그리고 우아하고 티 없이 맑은 그것은 마치 하나의 완벽한 예술풀처럼 아름다웠다.
이것이 이준이 최후의 패였다. 이것은 오랜 시간동안 생사의 고비를 넘길 때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사정이 달랐다.
스승의 원수이자, 구름 불꽃을 탐내는 가장 강력한 적수, 무엇보다도, 오늘 저 자를 살려 보낸다면 약로의 부활은커녕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약황이 자신을 노린다면 은이를 다시 만나는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를 되찾을 수도, 가문을 부흥시킬 수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비루했던 자신을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려준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를 해한 짐승만도 못한 사형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 냉정하기 이를 데 없던 약로도 오늘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의도는 명확했다. 한샘을 죽이라는 것.
청백색의 연꽃을 바라보던 한샘의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그 역시 그 연꽃에 담긴 무궁무진한 힘을 느낀 것이다.
두 종류의 불꽃이 합쳐진다면, 그 배에 달하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은 한샘역시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천지의 불꽃은 저마다 성질이 다르고 그 힘이 난폭하기 그지 없어 그것을 하나로 합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그 역시 몇 번 실험을 해 본적이 있었다. 그는 평범한 다른 화염과 천지의 불꽃을 섞어 보았다. 그러자 바다의 불꽃이 가진 광폭한 성질이 더욱 강해져 미쳐 날뛰는 망아지마냥 통제를 벗어났고, 이에 그는 이런 불꽃은 도저히 사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하물며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융합시키다니…목숨이 몇 개라도 생각할만한 짓거리가 아니었다.
“저 미친 놈!”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변한 사형을 바라보는 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져갔다.
마침내 청백색의 연꽃이 준의 손을 떠나는 순간, 한샘도 온 힘을 다해 짙은 청색의 화염창을 내던졌다.
“장로들은 모두 피해라!”
이 광경을 바라보던 서천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김씨 형제 역시 황급히 몸을 돌려 먼 곳으로 날아갔다.
갑작스런 서천우의 외침에 장로들은 순간 멈칫하다 즉시 몸을 움직여 번개처럼 땅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청백색의 연꽃과 거대한 삼지창이 맞부딪히며 온 천지가 진동하고 청명했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둡게 가라앉았다.
콰앙!
두 개의 불꽃이 맞부딪히는 순간, 온 공간이 마치 수건을 쥐어짜듯 뒤틀리며 그 중심에서부터 바깥까지 거대한 화염폭풍이 일었다.
폭발의 여파가 하늘 가득 퍼져나가는 순간, 한발 늦게 대피한 투왕급 강자들이 동시에 울컥하고 피를 토해냈다. 온 힘을 쥐어짜내 만들어낸 염력 갑옷이 아니었다면 그 화염폭풍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잿더미가 되고도 남았을 위력이었다.
그 사이 구름 불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마냥 주위에 남아있던 불꽃들을 집어삼키며 서서히 커져가고 있었다. 온 천지를 휩쓰는 공포스런 화염폭풍의 위력 앞에 순간 모든 사람들이 구름 불꽃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구름 불꽃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은 한샘과 이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너지 충돌로 왜곡되었던 공간이 마치 팽팽한 줄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제 모습을 찾고, 청백색의 빛 줄기가 번개처럼 날아갔다.
쾅!
거대한 화염폭발에 하늘이 거칠게 울렁였다. 귓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발소리에 수많은 사람들의 귀가 웅웅거렸다. 폭발의 여파로 인해 하늘이 용광로처럼 들끓으며 사람들의 이마에서는 땀이 끊임없이 흘러 내렸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붉은 피를 뱉어내며 추락했다.
땅으로 추락하는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흑각성 강자들의 낯빛이 시커멓게 어두워졌다. 기세가 약하기는 했지만, 분명 한샘이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다른 쪽 하늘을 보니, 그곳에는 흑색 도포를 입은 청년이 옅어진 염력 날개를 펄럭이며 가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저놈이 한샘을 패배시켰다고?”
한샘은 일찍이 정상급 투황의 경지에 올라있었고, 천지의 불꽃의 위력에 힘입어 투종 초입 단계의 강자에 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뺨에 홍조도 가시지 않은 어린 소년 하나가 오랜 세월 흑각성의 황제로 군림하며 ‘약황’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한샘을 패배시킨 것이다.
흑각성의 강자들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 하고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피웅!
정적 속에서 돌연 두 개의 그림자가 몸을 날려 한샘에게로 날아갔다. 김씨 형제였다. 한샘이 패배하든 말든, 구름 불꽃을 손에 넣든 말든 그들이 알 바가 아니었으나, 아직 그들은 이번 일의 대가로 받기로 한 연금비약을 받지 못 했으니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상으로 내려가자 피칠갑을 한 한샘이 죽은 사람마냥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은색 옷을 입은 사내가 가만히 맥을 짚어보니 끊어질 듯 가느다란 박동이 느껴졌다.
“아직 살아있지?”
금색 옷을 입은 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응, 아직 살아있어.”
이에 은색 옷을 입은 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저 멀리 하늘에 있는 흑색 도포를 입은 청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녀석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녀석이지? 가람 아카데미에 저 정도 수준의 강자가 있다는 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모르겠어.” 금색 옷을 입은 사내가 옅은 한숨을 토하며 고개를 저은 뒤 청백색의 불꽃이 만들어낸 화염 폭풍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은 흑각성의 강자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상황이 좋지 않군. 자리를 뜨자. 이 녀석은 이미 중상으로 정신을 잃었으니, 천지의 불꽃은 이미 글렀어.”
은색 옷을 입은 자가 흑각성의 강자들을 향해 신호를 보내자, 그들이 번개처럼 다가왔다.
본원의 장로들은 멀리서 두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