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6화. 구름 불꽃의 본체
불 이무기의 기세가 한풀 꺾이자, 한샘의 몸 주위로 짙푸른 화염이 피어오르더니 이내 빠르게 회전하며 날카로운 송곳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짙푸른 화염으로 만들어 진 화염송곳은 차가운 안개 속에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점점 더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가라!”
한샘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날카로운 화염 송곳이 바람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로질렀다.
쉭!
곧이어 날카로운 송곳의 끝부분이 이무기의 몸에 닿는 순간, 더욱 빠르게 회전하며 놈의 비늘을 꿰뚫기 시작했다. 짙은 청색의 화염이 자신의 피부를 꿰뚫고 들어오자, 불 이무기는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온 몸을 뒤틀었다.
“하하하하!”
한샘은 자신의 공격이 적중하는 순간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이미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무기의 몸에서 또 다시 불꽃이 피어오르며 푸른 안개를 뚫고 은은한 열기가 퍼져 나갔다.
“이…이런…”
그리고 한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속도로 온도가 상승하며 푸른 안개가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한샘이 무언가 다른 수를 동원하기도 전에 안개가 산산히 흩어지고, 무형의 화염이 해일처럼 한샘을 향해 날아갔다.
흑각성의 약황은 황급히 소매를 휘둘러 진청색의 불꽃으로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불꽃의 파도를 막아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형의 불꽃이 잦아들자, 한샘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불 이무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대신 사방에 무형의 불꽃이 어지러이 흔들리며 그를 에워싸고 춤을 추고 있었다.
한샘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급히 사방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서도 집채만한 몸을 가진 이무기를 찾을 수 없었다.
“이놈이 어디로 간 거지?”
그리고 한샘이 자신을 둘러싼 무형의 불꽃에서 벗어나려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화염벽 중 한 곳이 일그러지며 그 속에서 거대한 몸집의 이무기가 나타나 기둥처럼 굵은 꼬리를 휘두르며 돌진해왔다.
“커헉!”
이 강력한 공격에 한샘의 입에서는 붉은 선혈이 터져 나왔고, 그의 몸은 순식간에 힘을 잃고 지상을 향해 추락했다.
그 때, 멍하니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준의 머릿속에 돌연 다급한 스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망치거라!”
잠시 동안 한샘을 바라보던 이무기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준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준의 체내에 있던 대지의 불꽃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주인을 보호했다.
“키이!”
무형의 불 이무기는 하늘을 향해 날카롭게 울부짖더니 거대한 꼬리를 사납게 휘두르며 곧바로 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놈이 몸을 날리자, 뜨거운 열풍이 불어 닥치며 주위를 휩쓸었다.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이무기의 모습에 준의 등 뒤에서 날개가 펼쳐지고, 그와 동시에 발밑에서는 은빛 섬광이 번뜩였다.
거대한 꼬리가 허공을 가르자, 거친 바람이 일며 공기가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놈의 꼬리가 지나간 곳에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백 여 장 떨어진 곳에 은빛 섬광과 함께 검은 망토를 두른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음 순간, 또 다시 무형의 화염이 해일처럼 일어나더니 놈이 모습을 감췄다. 흑각성의 약황, 한샘을 쓰러뜨린 바로 그 공격이었다.
“조심하거라! 절대로 저 화염벽에 둘러싸여서는 안 된다. 놈은 순수한 불꽃 그 자체야. 아마도 자신의 몸을 화염에 녹여낸 뒤 다시 응집시켜 공격하는 것일게다. 화염에 포위 당하는 순간 어디서든 공격이 날아들 수 있어!”
스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은 곧바로 날개를 펼쳐 더욱 위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해일처럼 몰아치는 거대한 화염 파도의 끄트머리에서 돌연 파문이 일며 불 이무기가 튀어나왔다.
다시 이무기의 형상을 갖춘 놈은 세모난 눈동자를 탐욕으로 빛내며 커다란 입을 벌려 화염을 토해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열기에 준은 곧바로 몸을 돌려 두 손을 내밀었고, 푸른 화염이 쏟아져 나와 무형의 화염에 맞섰다.
쾅!
그러자 커다란 굉음과 함께 두 불꽃이 맞닿은 지점에서부터 무시무시한 열기가 퍼져나가 온 천지를 사막처럼 바짝 말려버렸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틈도 없이 준의 머리 위에서 돌연 엄청난 에너지가 터져 나왔다.
당황한 준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청명한 하늘 위로 가득 펼쳐진 무형의 화염이 눈을 가득 채웠다.
“키이이!”
곧이어 날카로운 울음소리에 맞춰 하늘 가득 자리하고 있던 무형의 화염들이 마치 운석이 떨어지듯 맹렬한 기세로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쾅! 콰쾅!
또 다시 천둥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잇달아 울려 퍼지고, 온 하늘에 열기가 퍼져나갔다.
약로의 힘을 빌어 간신히 공격을 받아낸 준은 상상을 초월하는 구름 불꽃의 힘 앞에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스승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는 이번 공격으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공포로 인해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 몸이 떨려왔다. 일찍이 경험해 본적이 없는 압도적인 공포였다. 준이 공포로 인해 거의 정신줄을 놓으려는 순간, 약로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진정해라. 지금 앞에 있는 것은 구름 불꽃의 껍데기에 불과하다. 구름 불꽃의 핵이 저 거대한 몸집 어딘가에 깊숙이 숨겨져 있을 게야. 우선 그것을 찾는 것에만 집중해라. 그곳을 공격당하면 놈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껍데기를 아무리 두들겨 봤자 놈에게는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어. 놈은 무적이 아니다. 정신 차리거라! 어서!”
“스승님…!”
“준아! 아버지를 생각해라!”
다급한 스승의 목소리에 준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힘없이 흐느적거리던 다리에 힘이 돌아오고, 온 몸의 혈관에 다시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 * *
한편, 하늘 위에서는 여전히 거대한 이무기가 무형의 화염을 이끌고 연신 괴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쉬익! 쉬익!
곧이어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운석과도 같은 화염이 다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불비가 내리고 있었다.
준의 뺨을 스친 불씨 하나가 검은 색 망토에 닿자, 검은 색 망토가 퍼석하게 마르더니 이내 가루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준은 온 정신을 집중한 채 불꽃을 조종하고 있는 이무기를 가만히 바라봤다.
구름 불꽃의 본체를 찾아야 한다. 지금 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 생각 뿐이었다.
푸른 화염이 칠흑같이 새까만 눈동자에 퍼져 나가고, 준의 눈동자에 비추던 모든 것이 보다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하늘 위를 점령한 불 이무기의 거대한 몸집과 커다란 입, 천천히 나타나는 무형의 화염…
‘찾았다!’
그 순간 눈동자를 가득 채웠던 푸른 화염이 물러나며 다시 그의 눈동자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준이 거칠게 발을 구르자 은빛 섬광과 함께 그의 몸이 번개처럼 허공을 가로 질렀다.
갑작스레 허공에 나타난 은색 섬광에 사람들의 시선은 못 박힌 듯 하늘에 고정되었다.
흑색 망토를 걸친 그림자는 은빛 섬광과 함께 창공 이곳저곳에 잔상을 남기며 불비를 가로 질러 눈 깜짝할 사이에 불 이무기의 지척까지 도달해 있었다.
모두가 넋을 잃고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돌연 준의 주먹에서 푸른 불꽃이 치솟아 올랐다.
“이놈, 죽어라!”
다음 순간, 벽력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준의 주먹을 떠나 화살같이 날아갔다. 그의 손을 떠난 푸른 화염은 기다란 창처럼 변화하며 순식간에 이무기의 거대한 아가리 바로 아래에 있던 비늘을 꿰뚫었다.
“멍청한 녀석,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불 이무기의 공격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한샘은 땅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투황급 강자 셋과 십여 명의 투왕, 그리고 ‘약황’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신의 염력을 모두 쏟아 부은 공격조차 무위로 돌아간 판에 투령 따위가 불 이무기에게 달려들다니, 참으로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자리에 있던 강자들 중 대다수는 한샘과 같은 생각이었다. 서천우 역시 급히 염력을 끌어올려 준을 구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자리에 있던 수많은 강자들의 예상과 달리, 준의 공격에 당한 불 이무기가 거대한 머리를 들어 올리며 고통에 가득 찬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완벽한 공격이었다! 어서 저 천지의 불꽃을 잡을 준비를 해라!”
약로의 웃음소리가 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본체를 공격당한 불 이무기의 형상이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눈에도 불 이무기의 입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기이한 모양의 불꽃 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불 이무기의 몸이 흐릿해지는 모습을 보며 준은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얼굴 가득 흐르고 있는 땀을 손으로 훑어냈다. 긴장이 풀리자 뒤늦게 전신에서 타는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대지의 불꽃으로 구름 불꽃의 열기를 차단하고 있어도 여전히 적지 않은 고통이 느껴졌다.
“이무기의 형상이 사라지고 본체가 드러날 때 잠시 놈의 기운이 꺾일 것이다. 그 때를 놓치지 말거라!”
준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스승의 목소리를 듣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구름 불꽃의 본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혹시 한샘이 날아오거든, 내 힘을 가져다 쓰거라. 그렇다면 정면충돌을 하더라도 결코 놈에게 뒤지지 않을 게야. 설령 다른 사람들에게 내 정체를 들킨다해도, 구름 불꽃을 손에 넣는 것이 우선이다.”
이어지는 약로의 말에 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
“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다시 한 번 하늘에 울려 퍼지자, 하늘에 가득 차 있던 무형의 화염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사라졌다.
화염이 사라지면서 온 천지를 뒤덮던 열기 역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 이무기의 거대한 몸뚱아리가 있던 곳에 한자 정도의 기이한 화염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화염은 무색 투명하여 형체가 없어 보였으나, 주위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맹렬하게 불타고 있었고, 그것을 보는 누구에게나 기이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준아, 지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신비한 광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검은 망토를 두른 소년의 몸이 번개처럼 무형의 화염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준이 움직이던 그 때, 밑에 있던 한샘 역시 두 손을 펼쳐 바다와 같은 짙푸른 화염을 빠르게 내뿜고 있었다. 그 역시 지금 본체가 드러나는 이 짧은 순간이 구름 불꽃이 가장 약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샘을 막아라!”
계속해서 한샘과 흑각성의 강자들을 주시하던 서천우가 한샘의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번개처럼 본원의 장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한샘과 이준이 구름 불꽃과 격돌하는 시간을 틈타 염력을 회복하고 있던 장로들은 대장로의 명에 따라 즉시 염력 날개를 펄럭이며 한샘의 주변에 나타나 인간장벽을 만들어냈다.
가람아카데미의 장로들이 자신의 앞을 막아서자, 한샘이 다급하게 흑각성의 강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저를 도와주십시오! 일이 성사되면, 약황의 이름을 걸고 크게 보답하겠습니다!”
“당신은 불꽃을 빼앗는 것에만 신경 쓰시오! 저들은 우리가 막아 주리다.”
이에 김씨 형제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서고, 그 뒤를 따라 일단의 무리들이 번개처럼 돌진하며 가람 아카데미의 장로들과 한샘 사이를 가로 막았다.
곧이어 두 무리의 사람들이 다시 한번 하늘에서 뒤엉키며 대격전이 시작되었다.
서천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재빨리 몸을 움직여 흑각성 무리들을 이끌고 있는 김씨 형제에게로 날아갔다.
“헤헤, 서 장로, 저건 그냥 불덩어리에 불과한데 이렇게 기를 쓰고 막을 필요가 있나?”
금색 옷을 입은 남자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장로를 바라보자, 은색 옷을 입은 사내 역시 음흉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두 형제의 말에 서천우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요 근래 가람 아카데미가 흑각성 놈들에게 너무 물렀나보구나. 좋다. 오늘 내 친히 가람아카데미가 어떤 곳인지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새기게 해주마.”
서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주위 공간이 세차게 요동치며 웅대한 기운이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