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4화. 박멸
준은 허공 위에서 지상으로 추락한 범로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약로의 도움으로 잠시 동안 투황 강자와 비견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만약 조금 더 약로의 힘을 끌어다 썼더라면, 범로를 물리치는 데에 지금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준은 약로의 힘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했다. 자칫 잘못하다 누군가가 약로의 기운을 알아챈다면, 실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약로의 힘을 모두 빌리지 않더라도, 대지의 불꽃은 범로와 상극이기 때문에 어렵기 않게 그를 꺾을 수 있었다.
“저 늙은이를 지금 죽이지 않는다면 훗날 방해가 되겠지.”
준은 얼음처럼 싸늘한 눈으로 범로를 내려다보다가 결심을 굳혔다. 그 순간, 청색의 염력 날개가 펄럭이며 푸른 불꽃에 휩싸인 그의 몸이 유성처럼 지상으로 낙하했다.
“죽어라!”
푸른 유성이 벼락처럼 허공을 가르자, 허공에 거센 파문이 일며 주위의 바위들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악!”
곧이어 처참한 신음소리가 잇달아 울려 퍼졌고, 붉은 염력이 거세게 치솟았다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핏빛 염력이 치솟은 곳에서는 온몸이 피로 가득한 범로가 말라 비틀어진 모양새로 울컥울컥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끊어질 듯 가느다란 호흡을 이어나가는 범로를 노려봤다.
“네…네 이놈…감히 나를…죽이려는 것이냐.”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범로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자, 준의 입가에 더욱 싸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피의 종족의 수장이 그런 말을 하다니…어처구니가 없군. 당신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밥 먹듯이 살인을 일삼는 작자들이잖아.”
다음 순간,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준의 몸이 다시 한번 사라졌다가 범로의 눈앞에 나타났다.
“쳇!”
준의 몸이 사라지자, 갑자기 아까 공격받았던 부위 위로 핏빛 안개가 토해지며 그의 몸이 붉게 빛났다.
곧이어 형형하게 빛나던 붉은 빛이 흩어지며 범로의 몸이 수 십 미터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후…더럽게 질기군. 과연 피의 종족의 수장이야.”
하지만 준이 막 그를 쫓아 몸을 날리려는 순간,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천계의 탑 꼭대기였다. 굉음의 정체는 바로 간신히 만들어낸 검은색의 보호막이 또 다시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큰일이다! 봉인이 다시 파괴되다니…!”
천계의 탑이 다시 붕괴되자, 서천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게 바로 천계의 탑에 봉인해놓은 천지의 불꽃이군. 설마 이미 응집되어 지능을 가졌을 줄이야…”
그 순간, 대건과 대치하고 있던 한샘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그리고 한샘의 탐욕스런 눈빛을 마주한 이무기의 눈동자 역시 그와 똑같이 탐욕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대하고 음산한 이무기의 눈동자와 마주 하는 찰나, 하늘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실로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증발시킬만한 에너지였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이무기의 눈동자에 서천우의 안색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본원의 장로들은 모두 진을 짜거라!”
대장로는 김씨 형제와 흑각성의 강자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즉각 장로들에게 명을 내렸다.
서천우의 고함소리에 장로들은 잠시 머뭇거리며 흑각성의 무리들을 바라보다가 하나 둘 천계의 탑 상공으로 몸을 날렸다.
이에 흑각성의 강자들 역시 빠른 속도로 집결해 천계의 탑 주위에 떠 있는 한샘에게로 날아갔다.
“껄껄, 한 선생, 지금이 저들을 궤멸시키기에 적기인 것 같군요.”
독수리처럼 날카롭게 생긴 노인 하나가 염력을 끌어 모아 이화를 봉인하려는 장로들을 바라보며 한샘을 향해 말했다.
“하하, 조급해하지 마시지요. 저들이 모든 힘을 소진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저 자들이 모든 힘을 쏟아 천지의 불꽃에 맞서면 천지의 불꽃의 기세도 한풀 꺾이겠지요. 그 때야말로 천지의 불꽃을 차지할 가장 좋은 시기일 것입니다.”
한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람 아카데미의 장로들이 진을 짜고 염력을 모으는 것을 바라봤다. 그들이 만들어낸 염력 그물은 종전의 그것보다 눈에 띄게 희미하고 얇았다.
천지의 불꽃을 봉인하고, 곧바로 흑각성의 강자들과 맞서고, 다시 천지의 불꽃을 봉인하는 것은 제 아무리 가람 아카데미의 장로들이라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천계의 탑 주위로 핏빛 그림자가 스멀스멀 날아왔다.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린 채 연신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런 범로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다른 강자들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내려 앉았다. 지금은 한샘의 부탁으로 인해 한자리에 모였지만, 흑각성으로 돌아가면 곧바로 적이 될 사이이니, 그가 크게 다치면 다칠수록 그들에게는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그가 죽어 없어지고 한샘의 목적을 달성해 보상을 받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바라 마지않는 일 이었다.
“범 종주, 괜찮습니까?”
한샘은 초주검이 된 범로의 모습에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연금비약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범로는 거의 빼앗듯이 연금비약을 잡아채 집어삼켰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백했던 안색에 혈색이 돌며 천천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크윽…저 애송이의 천지의 불꽃은 내 염력과는 완전히 상극이다. 그것만 아니었더라면…빌어먹을!”
‘흥…늙은이, 헛소리 하지 마. 저 놈의 실력은 5성 투황정도야. 상극이 아니었더라도 4성 투황인 네 놈의 실력으로는 무리였어.’
한샘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저 놈의 실력이 대단한 건 사실이니 범로를 탓 할 수도 없겠군. 저 녀석 뒷조사를 좀 해봐야겠어. 범상치 않은 놈이야. 저 나이에 천지의 불꽃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 하며, 범로의 무투기를 박살낼 정도의 무투기까지…’
흑각성 강자들의 무리로 숨어 들어간 범로를 바라보던 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 교활한 늙은이가 저 강자들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쉽게 죽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범로에게 큰 부상을 입혔으니, 부상이 완쾌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게다가 가람 아카데미 안에만 있는다면 감히 범로 혼자서 자신을 찾아 올리는 없었다.
‘천천히 실력을 기르면 되지. 어차피 운남종과 맞붙으려면 최소 투종은 되어야해. 게다가 은이를 되찾으려면 그 이상이 되어야하니…내가 가람 아카데미를 나갈 무렵이면 자연스럽게 저 자보다 강해져 있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한샘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한샘의 모습에 준 역시 지지 않고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그 때, 돌연 그의 머릿속에 스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저 녀석 주변에는 적지 않은 강자들이 있으니, 내 힘을 모두 끌어다 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네 힘으로 한샘과 맞서려면 구름 불꽃을 손에 넣은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놈이 불완전한「불개」를 익혔다고는 하나, 아직 네 상대는 아니야. 그러니 함부로 놈과 대적하려 들지 말거라.”
스승의 충고에 준은 입술을 앙다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한샘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투왕이 되고, 「번개의 춤」과 「태양검」 그리고 은이 건네 준 무투기를 익힌다면 한샘을 이기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천계의 탑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투왕에 진입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투왕이 되려면…반드시 구름 불꽃을 손에 넣어야 했다.
준과 한샘이 각각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형형색색의 염력이 실처럼 엮여 방대한 염력 그물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때,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이무기가 몸을 날리고, 무형의 화염이 하늘을 뒤덮으며 염력 그물과 맞부딪혔다.
거대한 이무기가 그물에 닿는 순간, 장로들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호흡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저게… 저게 본원의 천지의 불꽃이라고?”
하늘 위를 점령한 거대한 무형의 불 이무기를 바라보며, 흑각성의 강자들이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샘 역시 구름 불꽃의 본체가 그토록 거대하게 자랐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금세 감출 길 없는 환희가 떠올랐다. 만약 저 녀석을 삼켜 자신의 것으로만 만들 수 있다면…투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키이이-!”
기괴한 울음소리가 또 다시 하늘에 울려 퍼졌다. 무형의 불 이무기는 봉인이 깨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즉시 거대한 꼬리를 움직이며 번개처럼 염력 그물 위로 몸을 내던졌다.
찌이익-
다시 한번 무형의 괴물이 염력 그물에 맞부딪히는 순간, 허공에 거대한 파문이 일며 염력 그물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쩌어억-
그리고 서천우를 비롯한 본원의 장로들이 무언가 손을 써보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파열음과 함께 조밀하게 쌓아 올린 장로들의 염력이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다.
펑!
이미 자신들의 힘으로는 더 이상 이무기를 막아낼 수 없음을 직감한 서천우는 마른 침을 집어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다시 한번…‘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이무기의 거대한 머리가 봉인진과 충돌하자, 마침내 염력 그물이 깨끗이 사라지고 이무기가 완전히 자유를 되찾았다.
자신을 옭아맨 그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이무기는 환희에 가득 찬 기묘한 울음소리를 내뿜으며 입에서 무형의 불꽃을 토해냈다.
하지만 속박을 벗어난 불 이무기는 도망을 치지 않고 멈춰 서서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형의 불 이무기가 움직이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일순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나 놈은 사람들의 시선에 관심조차 없다는 듯 속에서 천천히 머리를 돌려 이준과 한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한샘은 모든 천지의 불꽃의 형태와 특성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불 이무기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것이 구름 불꽃임을 알아차렸다.
“구름 불꽃이라니! 하하하!”
구름불꽃. 모든 천지의 불꽃 중 14위를 차지하는 불꽃으로, 불꽃 자체의 위력보다 그것이 가진 독특한 능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탐내는 물건이었다.
구름 불꽃이 가진 신비로운 힘은 바로 수련의 효율과 속도를 놀라울 정도로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일단 구름 불꽃을 삼키는데 성공한다면, 그것을 삼킨 이의 몸속에서 끝없이 타오르며 한시도 쉬지 않고 체내의 염력을 단련해준다.
게다가 이 수련의 효율이 대단히 높아, 평범한 사람들이 정신을 모아 염력을 단련하는 것 보다 몇 배는 효과가 좋았다.
이로 인해 거의 모든 연금술사들이 10위에서 15위의 불꽃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면 14번째에 위치한 구름 불꽃을 갖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실 본원에서 구름 불꽃을 봉인한 것도, 구름 불꽃의 이런 특징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람 아카데미는 그간 구름 불꽃을 이용해 수많은 강자를 배출해 왔을 뿐 아니라, 구름 불꽃을 봉인하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 가지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바로 염력을 증폭시켜주는 구름 불꽃을 누군가가 독점하는 것을 막아 절대 강자가 등장하는 것을 막아왔던 것이다.
하루 빨리 실력을 올리고 스승을 부활시켜야 하는 준의 입장에서는 구름 불꽃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