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2화. 바다의 불꽃
……
범로와 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동수와 엄호 등은 류지안과 임수혁을 안고 날아오는 보람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학생 중 세 최강자는 땅에 닿자마자 옅은 한숨을 내쉬며 단신으로 투황에게 맞서고 있는 준을 바라봤다.
“저 녀석이 저렇게 강한 힘을 숨기고 있을 줄 생각도 못했어… 나보다도 훨씬 강한 걸…”
보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임수혁과 류지안 역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흥…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강해졌구나!”
범로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준을 관찰하며 말했다.
“제법…? 자신감이 과한건지, 눈앞에 있는 상대의 실력도 알아볼 수 없는건지 모르겠군.”
눈앞의 소년이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비웃자, 범로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시건방진 자식! 갑자기 실력이 성장했다고 벌써 이긴 것 같으냐?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네 놈 따위에게 당할 내가 아니다.”
준이 노인의 말을 무시한 채 손가락을 튕기자, 푸른 불꽃이 솟구치며 불꽃으로 이루어진 채찍이 나타났다. 순간 주위의 용광로처럼 들끓으며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용솟음치는 열기에 범로의 안색이 순간 시커멓게 어두워졌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 앞의 상대는 최소한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염력을 지니고 있었고, 차가운 속성을 가진 자신의 염력은 천지의 불꽃과는 완전히 천적 관계에 놓여있었으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을 잃은 아비가 원수를 눈앞에 두고 그리 쉬이 물러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범로가 소매를 휘두르자 액체처럼 끈적한 핏빛 에너지가 온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곧이어 그의 몸이 피바다 속으로 사라지자, 그 기세가 더욱 강하게 변하며 하늘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핏빛 에너지는 진한 피비린내를 풍기며 순식간에 부풀더니 이내 주변의 하늘을 검붉은 색으로 뒤덮였다.
“쓸데 없는 일이로군.”
하지만 준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손가락을 튕길 뿐이었다. 준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푸른 화염이 치솟아 오르며 허공을 뒤덮고 있던 핏빛 액체가 서서히 흩어지며 분홍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분홍빛의 액체가 깨끗하게 증발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푸른 불꽃이 하늘을 뒤덮자, 드넓은 본원 가득히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갔다.
푸른 불꽃이 지나가는 곳마다 새까맣게 그을려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는 이들의 손바닥이 흥건해지며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실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위력이었다.
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아름다운 액체와도 같은 청색의 화염이 검붉은 액체와 맞닿을 때 마다 액체의 색이 옅어졌다가 이내 안개가 되어 흩어졌고, 사방을 뒤덮고 있던 핏빛 염력은 어느새 절반 이상이 사라져 있었다.
“천지의 불꽃…?”
그 때, 멀리에서 대건과 대치하고 있던 한샘이 고개를 돌려 이준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말도 안 돼…20살도 안된 것 같은데! 천지의 불꽃이라고?’
그 역시 스무 살 무렵에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었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이준은 자신보다 어려 보였다. 그가 손에 넣은 것은 ‘바다의 불꽃’으로, 천지의 불꽃 중 15번째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한샘은 그 불꽃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불완전한 ‘불개’로 인해 천지의 불꽃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아직까지도 화염을 사용할 때 필요 이상의 염력을 소모해야 했다.
‘색으로 미루어 보아 대지의 불꽃이군. 저 나이에 어떻게 저렇게 능숙하게 천지의 불꽃을 다룰 수 있는 거지? 빌어먹을!’
자신이 천지의 불꽃을 얻었을 때 보다 더 어린 나이에 그 보물을 얻은 것도 모자라 그것을 지금의 자신보다도 더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자, 순간 그의 마음속에 참을 수 없는 질투가 끓어올랐다.
‘큭큭…하지만 아직 실력은 내가 위야. 10년 쯤 뒤라면 모를까…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만일 하루 동안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얻을 수만 있다면 가람 아카데미의 그 늙은 괴물이 죽지 않고 돌아온다고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테지. 다만 …저 정도의 불꽃 조종 능력을 가졌다면 빼앗는 게 쉽지 만은 않을 텐데…’
불바다를 펼친 후에도 여전히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이준을 바라보며, 한샘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투기대륙에서 천지의 불꽃을 빼앗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그 중 한 가지는 강제로 빼앗는 것이다.
일단 이화를 뺏는데 성공한다면, 이화를 빼앗기게 된 사람은 이화가 몸에서 떨어짐에 따라 조금씩 죽어가게 되니, 상대는 목숨을 걸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방법은 바로 이화를 전수받는 방법이었는데, 이렇게 이화를 전승하는 방법 역시 큰 대가를 필요로 했다.
이 방법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불의 협곡’ 이었다. 불의 협곡은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종파 중의 하나로, 이화를 전승하는 것은 오직 불의 협곡의 곡주만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곡주가 다음 대의 새로운 곡주에게 전승할 때에만 사용되는 것이고, 신중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이렇게 이화를 이어받는 두 가지 방법은 대륙에서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강자라면 모두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과거 약로의 ‘얼음 불꽃의 정수’를 노렸으나, 마지막 순간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었다.
그리고 이화를 빼앗으려는 사람들 역시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로는 충분히 천지의 불꽃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매우 까다로운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둘째로는 남의 불꽃을 강탈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첫째건 둘째건 모두 그 수는 매우 드물었고,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불꽃을 빼앗기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한샘은 명백히 두 번째 유형의 사람으로, 과거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던 자였으니, ‘대지의 불꽃’을 보자마자 그것을 어떻게 하면 손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했다.
……
한편, 모든 집중력을 끌어 모아 범로를 상대하고 있는 탓에 준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샘의 눈길을 전혀 눈치 채지 못 하고 있었다.
피바다의 한가운데 서 있는 범로는 그야말로 죽을 상을 하고 있었다. 상대의 천지의 불꽃과 자신의 염력이 상극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령 어거지로 공격을 감행 한다 해도, 그의 예리하고 차가운 염력은 푸른 불꽃에 닿자마자 무용지물이 될 것이 뻔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젠장! 젠장…! 어떻게 이 범로가!”
결국 이를 악문 채 사라져가는 자신의 염력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던 범로는 피바다를 다시 거두어들여 자신의 몸 안으로 다시 흡수시켰다.
“혈귀 강림…!”
잠시 후, 범로의 두 눈이 붉게 물들더니 비쩍 갈라진 손 끝에서 칼날처럼 붉은 손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등 부분에서 피가 솟구치며 검붉은 핏빛 날개가 생겨났다. 마지막 한 줄기 염력이 그의 몸으로 흡수되자, 그의 염력 날개가 새와 박쥐의 날개를 합친 것 같은 기괴한 모양으로 변했다.
이어서 괴이한 형상으로 변화한 범로의 몸에서 붉은 광선이 뿜어져 나와 주위의 열기를 차단하며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갑자기 이준과 십여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의 몸이 다시 나타났다.
이를 바라보는 준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 지금의 범로는 기세와 속도 등에서 자신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지…!”
말을 하는 동시에 이준이 손을 휘두르자 하늘 위에 가득하게 펼쳐져 있던 푸른 화염이 빠른 속도로 모여들어 준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범로는 살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여유롭게 웃고 있는 준을 바라보았다.
“애송아, 오늘 이 범로가 널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마! 그 뼈와 힘줄을 하나하나 뽑아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주마!
범로가 고목나무처럼 비쩍 마르고 창백한 손바닥을 맹렬히 휘두르자 기이한 문양이 나타나더니, 이내 종아리만큼 굵은 핏빛 장창이 나타났다.
두 쌍의 염력 날개가 거칠게 펄럭이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살기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곧이어 범로의 몸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새빨간 창이 준의 심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흡혈귀처럼 변화한 범로의 속도는 이전보다 몇 배는 빨라져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 마다 허공에 흐릿한 잔상이 남았다.
일전에 준이 보인 번개의 움직임 역시 잔상을 남겼었지만, 범로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투령급인 준이 투왕들조차 만들기 어렵다는 잔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충분히 놀랄만한 일 이었지만, 지금 범로의 속도에 비하자면 전설의 2격 무투기조차 초라할 지경이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속도 앞에 모든 사람들이 식은 땀을 흘리며 범로를 바라봤지만, 정작 그의 적수인 이준의 얼굴은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챙!
곧이어 준의 검은 송곳이 귀신과도 같은 형상을 한 범로의 혈창과 부딪치는 순간, 폭풍과도 같은 바람이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푸른색의 염력 날게가 거세게 펄럭이며 준의 몸이 두 발짝 정도 뒤로 물러나고, 무시무시한 위력에 그의 팔뚝이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애송이, 네 녀석의 온몸에 구멍을 뚫어주마!”
범로가 스산하게 웃으며 혈창을 힘주어 잡고는 다시 폭발적인 기세로 공격을 가해왔다.
“당신 실력으로?”
준이 웃으며 발을 구르는 순간, 한 줄기 은빛 번개가 번뜩이더니 곧바로 준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어서 그가 손바닥을 펼치자, 푸름 화염이 그 위를 휘감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상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미꾸라지처럼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준의 모습에 범로의 얼굴이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범로는 오른손에 핏빛 염력을 집중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휘둘러 칼날처럼 예리한 손톱으로 준의 목을 노렸다.
다섯 손가락을 날카로운 붉은 검처럼 모아 그대로 준의 주먹을 향해 휘두르자, 종이를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다섯 개의 칼날 같은 상대의 예리한 손톱 앞에 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소리로 미루어 보건데 손톱의 날카로움이 혈창의 그것보다 훨씬 더 한 것 같았다.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는게 좋겠어.’
이에 준은 곧바로 몸을 뒤로 물리며 주먹 위에 피어오른 화염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회수된 푸른 불꽃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머리통만한 화염구로 변했고, 곧바로 범로를 향해 날아갔다.
파란색 화염구는 주인의 손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더욱 짙은 푸른색을 내뿜으며 주위의 공간을 왜곡시켰다.
준의 공격이 너무나 빠르게 전환된터라 이미 화염구는 그의 지척까지 날아와 있었다.
범로는 핏빛 염력으로 뜨거운 열기를 차단하려 했지만, 화염구가 가진 무시무시한 열기에 온 몸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따가워졌다.
그 거리에서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범로는 다시 한번 붉은 염력을 뿜어냈고, 그 즉시 핏빛 염력이 번개처럼 응집되어 화염구를 막아섰다.
펑!
다음 순간, 화염구가 폭발하면서 거대한 굉음이 온 하늘을 가득 메웠다.
폭발점에서부터 퍼져나온 뜨거운 화염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준은 곧바로 손을 휘둘러 불꽃이 자신에게 날아오지 않도록 조종했다.
‘이 정도면 상대도 제법 타격을 입었겠군.’
준이 그렇게 생각하며 앞을 바라보는 순간, 돌연 붉은 색의 기둥이 그의 시야에 나타났다.
‘이런…설마 저걸로 몸을 지킨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