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4화. 이별
이은이 멀어지자, 가만히 이준을 바라보고 있던 아홉 명의 사내 역시 마수에 올라타고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모두가 떠난 뒤에도 영천은 자리를 뜨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서 준을 쏘아보고 있었다.
“영천 부단장은 안 가시오?”
“전 급한 게 없습니다.”
그는 짐짓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길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당신에게 한 가지 당부할 것이 있어서요. 도련님은 이미 의지할 곳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신세 아닙니까? 우리 아가씨와는 격이 맞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큰 어르신께서는 혹시 아가씨께서 당신에게 마음을 준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특별히 한 가지 전언을 남기셨지요. 오늘부로 아가씨는 잊으십시오. 예전의 일도 모두 없었던 일로 여기는게 좋을 것입니다.”
‘큰 어르신’의 말을 전하는 영천의 얼굴에는 이준을 하찮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이은은 영천 자신을 포함해 가문의 모든 투사들이 선망해 마지 않는 존재였고, 동시에 그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대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은이 몇 번이나 가문의 명을 거절하고 가람 아카데미에 남겠다고 고집을 피우기에 대체 이준이라는 사내가 어떤 인물인가 하고 궁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이준을 눈앞에 두고 보니, 도저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 이다. 이은의 실력과 미모, 그리고 가문에서의 위치를 고려해보면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어울린다느니, 어울리지 않다느니, 그건 당신이 함부로 말할게 아니지. 혹시 당신… 은이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준의 한마디에 영천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이내 살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요. 당신을 죽이는 것은 개미를 밟아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영천이 막 염력을 끌어올리려던 찰나, 돌연 노쇠한 목소리 하나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영천 부단장, 본원에 들어와 사람을 찾는 것은 허락해주었소. 허나 우리 학생을 해치는 것을 허락한 기억은 없소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가람 아카데미의 대장로, 서천우였다.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영천은 곧바로 살의를 거두고는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서천우 대장로님 아니십니까, 전 단지 이준 도련님과 담화를 나누었을 뿐입니다.”
“됐네, 날 바보로 아는가. 본원에 들어와 사람을 찾게 해주었으니, 우리는 봉의 가문에게 할 도리를 다 했네. 볼 일이 끝났다면 어서 떠나주시게. 이 이상은 가람 아카데미 대장로의 명예를 걸고 용납할 수 없네.”
대장로의 서슬 퍼런 말에 영천은 어색하게 웃으며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뒤 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보아하니 오늘은 어쩔 수 없군요. 언젠가 때가 되면…우리 아가씨를 꼭 찾아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그 때가 되면 당신과 나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드리지요.”
말을 마친 영천의 어깨가 한번 떨리더니 한 쌍의 진홍색 날개가 펼쳐졌다.
곧이어 진홍색의 날개가 가볍게 펄럭이자, 유성처럼 불타는 물체 하나가 밤하늘을 가로질러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서천우가 천천히 이준의 곁으로 다가와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허허, 사실 재능만 놓고 따지자면 저 영천이라는 녀석보다 네가 더 나을게다. 하지만 저들 가문의 수련법은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니 지금 당장은 저놈의 상대가 될 수 없어. 앞으로도 평범한 방법으로는 저 자를 앞지를 수 없을게다. 그리고 방금 전의 네 언행은…실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서천우의 따끔한 일침에 준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가람아카데미의 대장로 직을 걸고 말하건데, 너 정도의 재능이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 영천 정도는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을게다. 그리고 내일 천계의 탑에서 「심연의 불꽃」을 손에 넣게 되면 더욱 빠른 속도로 투왕이 될 수 있겠지. 기대하고 있으마.”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지만, 소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참이나 연인이 떠나간 밤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은아…. 기다려. 그리고…영천이라고…? 이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지.”
복수를 다짐하며 주먹을 움켜쥔 소년의 손에서는 붉은 핏방울이 방울방울 흘러 내렸다.
이은과 함께 나갔던 이준이 혼자서 돌아오자, 윤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은이는?”
순간 이준의 발걸음이 멈춰서더니 그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처음 보는 이준의 험악한 표정에 윤영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백청이 시비를 걸어왔을 때에도, 한솔이 그를 비웃었을 때에도, 그 외에 어떤 상황에서도 이준은 그토록 분노한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갔어.”
“가다니?”
이준의 짤막한 한마디에 윤영의 곁에 있던 오하늘이 진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디로 가? 언제 돌아온대?”
“가문으로 돌아갔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깜짝 놀란 윤영이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지만, 이준은 그 말을 끝으로 대문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 이었다.
곧이어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윤영과 오하늘은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준의 태도로 보아 이은이 떠난 것은 틀림이 없었지만, 어찌된 일인지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전에 없이 격앙된 준의 태도로 미루어보아, 두 가지만은 확실한 듯 했다. 하나는 이은이 정말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것이 이은의 뜻과는 무관하게 벌어진 일이라는 것.
하늘과 윤영은 닫혀진 대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비석의 많은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있던 소녀가 이렇게 갑자기 떠나다니. 마음 속 무언가가 텅 빈 것만 같았다.
“에휴, 이 소식이 전해지면 우울해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니겠군.”
윤영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자, 오하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은은한 향기가 베어 있는 작은 방 한 가운데에는 아직도 소녀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준은 희미하게 남아있는 소녀의 향기를 맡으며 부드러운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천천히 눈을 감자, 언제나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어주던 소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연하게 떠올랐다.
“꼭 널 찾으러 갈게…”
* * *
다음 날, 평화로웠던 본원에 또 한 차례 소란이 일었다.
오늘 강자 목록에 이름을 올린 10인이 천계의 탑에 들어가 심연의 불꽃을 받게 되기 때문이었다.
심연의 불꽃은 투령 단계에 있는 투사가 투왕이 되는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누구나 얻고 싶어하는 보물이었다.
비석 내부, 일단의 비석 단원들이 작은 누각 앞에 빽빽하게 서서 굳게 닫힌 방문을 긴장하며 바라보았다. 몰래 소곤소곤 속삭이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삐걱…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소리를 내며 열리는 순간, 삼삼오오 모여 떠들어대던 학생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소리가 난 방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 속에서 검은 망토를 걸친 청년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전과 다름없이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는 준을 보자, 하늘과 윤영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순위 쟁탈전 이후 비석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준에게 더욱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어두운 표정으로 나타났다면 비석 전체의 분위기가 끝도 없이 떨어지고 말았을 것 이다.
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개의 눈동자를 하나하나 훑어본 뒤 옅은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손을 들었다.
“가자!”
짤막한 한 마디와 함께 준이 앞장서서 발걸음을 내딛자, 수많은 단원들이 가슴을 펴고 그 뒤를 따랐다.
순위 쟁탈전 이후 가장 주목 받는 ‘비석’의 구성원들이 모두 모여 본원의 길 위를 걷는 모습은 모든 학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비석은 이미 본원의 연금비약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무력으로 짓밟기에도 너무 커버렸으니, 연금술사 협회도 감히 비석의 상대가 되지 못 했다.
천계의 탑으로 향하는 길에서 수십 개의 다른 세력을 마주했지만, 어느 하나 비석의 위세에 미치지 못 했다.
다른 세력들의 지도자들도 역시 11인의 강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지만, 류지안과 임수혁, 이준 세 명의 투사는 나머지 8명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천계의 탑 입구에 다다르자, 준을 발견한 임수혁이 먼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그의 등 뒤로는 20여명의 투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비석’의 단원들에 비해 그 수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 했지만 그 중 가장 약한 자도 1성 투령은 되어 보여 실로 본원내의 어떤 세력도 그들을 넘보지 못 할 만큼의 힘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들이 그 유명한 ‘늑대 이빨’이군. 사람은 많지 않지만, 본원 최고의 세력이라는 말이 허명이 아니었어…‘
이준이 감탄하며 ‘늑대 이빨’의 단원들을 살펴보고 있는 사이, 임수혁 역시 비석의 구성원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었다.
‘어째서 그 소녀가 없지…?’
하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자신을 꺾은 ‘이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임수혁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위 쟁탈전에서 선발된 11인이 천계의 탑 하층부에 들어가는 날인지라 ,본원의 다른 학생들은 오늘 천계의 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준과 ‘비석’ 무리가 도착하자, 순간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현재 이준의 지명도와 명성은 임수혁과 비교해도 결코 낮지 않았다.
준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뒤로 한 채 동료들과 함께 군중 속을 가로질러 천계의 탑 입구까지 발걸음을 옮겼다.
천계의 탑 입구에는 커다란 공터 하나가 있었는데, 그 공터의 중앙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늑대 이빨’ 이나 ‘열산’처럼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자들뿐이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이준의 ‘비석’ 역시 감히 그 중앙 자리를 넘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준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하게 동료들과 함께 공터의 중앙에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어이, 류지안 그 자식도 온다.”
준이 막 자리를 잡을 무렵, 임동수가 나타나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동수의 손가락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군중들 사이를 가로 질러 들어오는 태산 같은 사내의 어깨가 한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류지안과 준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류지안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열산’의 단원들과 함께 이준에게도 천천히 다가갔다.
류지안이 천천히 다가오자, 비석의 구성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어떤 구성원은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뽑아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약 30보 정도 남았을 때, 돌연 류지안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내더니, 자신의 수하들이 모두 멈춰선 것을 확인한 뒤 피식 웃으며 홀로 이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정말 강하더군. 내가 널 얕봤던 것, 사과하지.”
류지안의 호의적인 언사에 모든 이들이 할 말을 잊고 어버버 거리는 사이, 이준이 겸연쩍게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아니, 그런 싸움에 요행은 없다. 겸손이 지나치군. 너 정도의 실력을 갖춘 자가 겸손해서는 안 되지. 진정한 강자라면 그에 걸맞는 자신감을 가져라. 언젠가 너와 다시 한 번 겨루어 보고 싶군.”
말을 마친 류지안은 이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무리를 이끌고 다른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말없이 탑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돌아서는 류지안과 그 무리들을 바라보며 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류지안 같은 강자가 자신을 인정해준 것은 못내 기분이 좋았지만, 어째 일이 이전보다 더 귀찮게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