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영천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준은 종종 이은과 함께 단 둘이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푸르른 풀밭 위에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 서로 기대어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바라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순간에도 준의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자꾸만 까닭모를 불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비탈진 풀밭 위에는 온통 녹음이 무성해 마치 초록색 융단이 펼쳐진 듯 했다.
저 멀리 시선을 던지던 풀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드넓은 계곡이 하나 자리 하고 있었다.
계곡은 무척 깊었고, 언제나 옅은 운무가 가득 차 있어 마치 신선이 기거하는 곳인 냥 신비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풀밭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앉아 있던 둘의 뺨 위로 은은한 햇살이 내리쬐자, 온 몸이 나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준이 한창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고 있던 그 때, 이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제가 얼마 전에 준 그 두루마리는 꼭 투왕 단계에 이르렀을 때 수련하셔야 해요. 심혈을 기울여서 차근차근 수련하다보면 반드시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예요.”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눈을 뜬 준이 다정하게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누가 준 물건인데…걱정하지 마. 매일 매일 열심히 수련할 테니까.”
머리 위로 느껴지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이은의 입가에는 티 없이 맑은 웃음이 번졌다.
“그런데 너, 요새 좀 이상한데?”
이준이 은의 웃는 낯을 바라보며 불쑥 질문을 던지자, 소녀는 잠시 멈칫거리다 은근슬쩍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예요. 난 항상 똑같은걸?”
“그런가?”
그 때, 약로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돌연 준의 머리에 울려 퍼졌다.
“너희 근처로 빠르게 다가오는 거대한 기운이 느껴진다. 너희 둘을 노리는 것 같구나!”
본원의 깊은 곳에 은밀히 들어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준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은의 손목을 낚아채 그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준이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순간, 무언가를 느낀 이은이 황급히 그를 떨쳐내며 숲으로 밀쳤다.
“준 오라버니, 빨리 몸을 숨기고 절대 나오지 마세요!”
“어떻게 된 거야? 저들이 너를 노리는 거야?”
멀리 아득한 북쪽 하늘을 바라보자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은이 다시 한 번 준의 몸을 밀며 힘을 불어넣는 찰나, 부드럽고 가벼운 바람이 그를 숲 속으로 밀어 넣었다.
“준 오라버니, 어서 기척을 숨겨요!”
“도대체 누구지?”
수풀 속으로 떠밀린 준은 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오래지 않아 하늘에서 거대한 폭발 소리가 들려오더니 열 개의 작은 점들이 나타났다. 흑점의 목표는 분명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점점 더 강렬해지더니 흑점들이 빠른 속도로 커졌다.
하지만 그 흑점들의 정체는 준의 예상과 달리 사람의 그림자가 아니라 전신이 칠흑같이 새까맣고 기이한 문양의 은빛 뿔을 지닌 마수였다.
마수의 등에는 커다란 4장의 날개가 달려있었는데,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바람이 숲을 뒤흔들었다.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형상의 마수에게서는 사납고 흉악한 기운이 들끓고 있었다.
생김새로 보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으로 보나, 보통 운송용 마수와는 다른 전투용 비행 마수의 일종인 것이 분명했다.
비행 마수는 원체 그 수가 적은데다가 전투용 비행 마수는 극히 희귀했고, 강대한 힘을 가진 몇몇 마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사람에 의해 길들여져 매우 온순한 녀석들이었다.
곧이어 네 장의 날개와 뿔을 가진 마수를 바라보던 준의 시선이 놈들의 등 뒤에 고정되었다. 놀랍게도 마수의 등 위에는 저마다 사람 그림자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마수의 등 뒤에 서있든 이들은 모두 자주 빛이 감도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번뜩이며 사방을 둘러보는 눈빛이 마치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더욱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운이 마치 심연처럼 그 끝을 알 수 없어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열 마리의 야수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계곡 위에 멈추어 서는 순간, 쇠붙이처럼 서늘한 눈빛들이 풀밭 위에 서 있는 소녀에게로 향했다.
“아아, 이은 아가씨, 드디어 찾았군요.”
우두머리로 보이는 야수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자, 그 위에 서 있던 사내가 이은을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사내는 대략 스물다섯 살 즈음으로 보였는데, 검보랏빛 망토를 걸치고 있었으며,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다른 아홉이 그 사내 뒤에 대열을 갖추고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사내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 인 것 같았다.
“저는 흑연군의 새로운 부단장, 영천입니다. 큰 어르신의 명에 따라 아가씨를 모시러 왔습니다!”
자신을 영천이라 밝힌 남자는 비행 마수의 등 위에서 이은을 향해 정중히 인사한 뒤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알아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나? 왜 굳이 이 먼 곳까지 직접 날아온 것 이지?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인가?”
생전 처음 보는 이은의 싸늘한 태도에 준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큰 어르신께서 직접 내리신 명이라서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씨께서 이해해 주시지요.”
다음 순간, 사내가 돌연 눈을 번뜩이며 숲속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쥐새끼 하나가 숨어 있군.”
영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수의 등 위에 가만히 서 있던 아홉 명이 차가운 표정으로 번개같이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멈춰!”
그 순간, 눈부신 금빛 섬광이 번뜩이며 아홉 마수를 앞질러 숲속에 있던 준의 손목을 낚아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오…오라버니…괜찮아요?”
숲 밖으로 끌려나온 준은 금방이라도 칼을 빼들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곧이어 이은이 준의 앞을 막아서자, 아홉 명의 투사들이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로 영천을 바라봤다.
“당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이은은 더욱 더 살기를 피우며 준의 앞을 막아섰다.
이은의 그런 행동에 영천은 웃는 듯 아닌 듯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만약 제 추측이 맞다면…저분이 이씨 가문의 이준 도련님이겠군요. 맞습니까?”
“당신은 누구지? 날 알고 있나?”
자신을 아는 듯한 사내의 태도에 준이 검은 송곳을 움켜쥐며 물었다. 영천이라는 사내의 말투에는 이씨 가문과 준을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흑연군의 부단장, 영천입니다. 하지만 말해도 소용없겠군요. 당신이나 이씨 가문이나 저를 알리가 없으니까요.”
“영천, 그만둬! 이씨 가문은 우리와 맹약을 맺었는데, 어째서 그들을 모욕하는 거지?”
준의 얼굴이 갈수록 싸늘하게 굳어가자, 이은이 초조한 표정으로 영천의 입을 막으려 했다.
“하하, 아가씨,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초면인데 실례를 했군요. 하지만 이왕 마주치게 됐으니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사내는 무성의한 태도로 준에게 사과하는 듯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사내의 태도는 누가보아도 사과보다는 조롱에 가까웠다. 의례적인 사과를 마치자마자 그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준을 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도련님께서는…열쇠의 행방을 알고 계십니까?”
영천의 말에 이은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혹시라도 준이 실수를 할까봐 그녀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려는 찰나, 이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열쇠?”
상대가 ‘열쇠’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영천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읊조렸다.
‘역시 전혀 모르는 것인가. 하긴 이씨 가문이 영혼의 궁전에 의해 큰 참화를 입었다고 했으니 이미 놈들의 손에 넘어갔을지도…빌어먹을, 열쇠가 놈들의 손에 있다면 일이 복잡해지는데…’
“내가 이씨 가문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렀는데도 그 ‘열쇠’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어. 설마 나를 못 믿는 건가?”
이은이 싸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영천이 짐짓 예의 바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아가씨. 그냥 한번 물어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가 맡은 임무는 아가씨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열쇠에 관한 것은 단순히 호기심에 물어본 것뿐이니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는 말아주시길.”
그 때, 준이 이은의 팔목을 붙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은아, 갈거야?”
“오라버니, 이미 몇 번이나 가문의 명을 거역했어요. 이번만큼은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오라버니가 저희 가문에 의해 해를 당하기라도 한다면 저도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거예요. 그러니까 꼭 힘을 길러서 저를 찾으러 오세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리고 내가 몇 번이나 당부했던 두 가지…기억하고 있죠?”
애원이라도 하는 듯 간절한 이은의 말투에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손끝은 분노와 무력감으로 인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전 오라버니를 믿어요. 그러니 성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힘을 길러서 저를 찾아오세요. 그렇게 해줄 수 있죠? 절대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돼요.”
이은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하게 물기가 맺혀 있었다.
아버지가 실종되고 가문이 화를 입은 뒤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이은마저 빼앗긴다는 생각에 준의 마음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도련님, 이건 저희들의 임무입니다. 이제 그만 아가씨를 놓아주시지요.”
이은의 팔을 붙잡고 있는 이준을 바라보며 영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칼을 빼들 듯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준은 은의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아두려는 듯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어렵게 어렵게 말을 골라 마지막 말을 건넸다.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이 자들에게서 은이를 빼앗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이 목숨을 잃는다면 이은 역시 자신의 뒤를 따라 죽으려 들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이 죽는다면 아버지는 어찌 되찾고, 무너진 가문은 누가 다시 일으킨단 말인가. 그는 그렇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애써 진정시키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마지막 말을 건넸다.
“은아, 기다려. 꼭 널 찾으러 갈게! 네 뒤에 있는 세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강해져서 널 되찾으러 갈 거야. 투존, 아니 투성이 되어서 널 찾아갈게. 투성으로도 부족하다면 투제가 되어서라도…꼭!”
“믿고 있을게요.”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동안 끌어안은 채 서로를 놓지 못했다.
결국 참다 못 한 영천이 천천히 주먹을 쥐자, 허공에 거대한 화염구가 생겨났다가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날아드는 것을 느낀 은은 억지로 이준을 밀어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오라버니 약속해요. 투종에 이르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를 찾지 말아요.”
곧이어 소녀가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눈부신 황금색 날개 한 쌍이 펼쳐졌다.
그녀는 그대로 가볍게 날아올라 네 쌍의 날개를 가진 마수위에 올라앉았고, 이와 동시에 거센 돌풍이 일며 마수가 점이 되어 준의 눈앞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