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우후죽순
임수혁은 객실 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앉아 초조한 듯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위층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임수혁은 푸른 옷을 입은 소녀를 발견하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선배님, 오라버니는 아직 치료하는 중이라 나올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아, 괜찮습니다.”
며칠 전 대결 이후, 이은을 바라보는 임수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예의 그 온화하고 친절한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그의 눈빛 한 구석에는 동경과 경외심 비슷한 것이 어려 있었다.
그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이은의 눈치를 살피다 몸을 일으켜 조그마한 약병 하나를 꺼내 책상에 올려두었다.
“그…이건 치료에 도움이 되는 연금비약입니다. 이준 후배님에게 꼭 필요할 것 같아서…사양하지 말고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은은 잠시 망설이며 임수혁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약병을 받아들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오라버니를 대신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죠.”
“아아, 아닙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약병을 건넨 임수혁은 언제나와 같이 예의 바른 태도로 고개를 숙인 뒤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동경의 기색이 가득했다.
* * *
“어이, 너 이 자식…설마?”
비석 밖에서 임수혁을 기다리던 엄호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걸어오자, 임수혁은 민망한 듯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로 현명한 선택은 아닌 것 같군. 둘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야. 다만 나보다 어린 소녀가 이토록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하군…. 하하하, 후배들이 날 바라보는 심정이 이랬을까? 조금 질투가 나는군. 존경스럽기도 하고 말이야. 복잡해.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친구의 걱정스러운 표정에 임수혁은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긴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 * *
조용한 밀실 안, 이은은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에 발그레한 뺨을 기대자, 소매가 흘러내리면서 눈같이 새하얀 팔목이 드러났다.
순위 쟁탈전이 끝난 지 벌써 5일이 다 되어 가고 있었지만, 이준은 여전히 반쯤 의식이 흐린 상태로 염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오하늘을 비롯한 동기들이 그의 상태를 걱정해 몇 번이나 찾아왔지만, 이은은 매번 방해해서는 안 된다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이은은 준의 염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오늘도 아닌가…”
오늘도 준의 상태에 큰 변화가 없자, 이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가 막 몸을 돌리려는 찰나, 기이한 파동이 밀실 가득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방을 나서려던 이은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다시 방쪽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이준이 상태를 살폈다.
파동이 가라앉자마자 눈을 감고 있는 이준의 몸에서 거친 숨결이 휘몰아치더니 계속해서 상승했다. 잠깐의 순간, 이준의 호흡이 최고봉에 달하더니 계속해서 올라갔다.
곧이어 빠른 속도로 준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활화산이 폭발하듯 그의 몸 안에서 무시무시한 염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후 준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기를 5분…마침내 그의 혈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격렬하게 요동치던 에너지가 진정되자, 이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그 아래 감춰져있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
그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탁한 기운이 입에서 새어나와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안개처럼 흩어졌다. 승급 과정이 무사히 끝났음이 확실해지자, 이은은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준 오라버니, 축하해요. 이번 부상이 오히려 전화 위복이 됐군요…지금 호흡을 보니…5성 투령인가요?”
이은이 수줍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이에 준은 눈을 감고 자신의 염력을 확인한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딱 5성 투령 정도야.”
사실 단숨에 2계급을 승급한 것은 온전히 부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류지안과의 사투에서 입은 부상은 그저 계기가 되었을 뿐, 실제로 단번에 두 계단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원인은 다른데에 있었다.
그간 지하의 유액을 비롯해 그의 체내에 잔존하고 있던 연금비약과 귀한 약재 성분이 상처 입은 주인의 몸과 텅 비어버린 염력 회오리를 메꾸는 과정에서 아직 흡수하지 못했던 에너지들이 단숨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준의 체내에 남아있던 연금비약과 약재의 에너지는 3성 투령인 그가 5일간 밤낮으로 흡수해야 할 정도였으니, 실로 방대한 양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라버니…승급 과정에서 토해냈던 그 검은 연기는 뭐죠?”
“흐음…아카데미로 오기 전에 일이 좀 있어서…가한제국에서 내 불꽃으로 각인 독을 제거한 적이 있었거든. 그 때 그 독성이 내 몸안에 스며들었어. 매번 승급할 때 마다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 같아. 다행히도 내 몸에 특별히 위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아.”
준의 대답에 이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지금 오라버니의 실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글세… 투왕 강자였던 나원승도 어쩌지 못했으니 그리 쉽지는 않겠지. 그래도 천지의 불꽃과는 상극이라 당장 내 몸이 어찌되지는 않을 것 같아. 걱정하지마. 이렇게 천천히 토해내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겠지.”
이준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침대 위에서 내려와 천천히 몸을 풀었다. 그러자 몸 곳곳에서 뼈가 맞춰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전신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경기 결과는? 어떻게 됐어?”
“아아, 걱정 하지 말아요. 오라버니도 10인에 들어갔어요. 마지막 자리이긴 하지만요.”
이은은 장난스레 웃음을 지으며 경기 결과를 알려주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류지안도 10위 안에 포함이 됐죠.”
“무슨 소리야? 내가 이겼으니까 10위가 된 게 아니었어?”
“대장로님이 무승부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류지안과 오라버니가 공동 10위예요. 너무 이례적인 일이라, 이번에는 10인이 아니라 11인을 선발하게 됐어요.”
준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흠…됐어, 중요한건 내가 천계의 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니까. 몇 등인지는 상관없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몸을 풀기 위해 몇 번 정도 더 기지개를 켠 뒤 이은의 손을 붙잡았다.
“어휴…대체 며칠이 지난거야. 온 몸이 다 뻐근하네. 가자, 은아.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자.”
* * *
이준과 이은이 나타나자, 비석 멤버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그동안 바깥에서는 류지안과의 대결에서 입은 부상이 너무 심각해 치유되기 어렵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결 이후 누구도 이은과 윤영, 오하늘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도 준을 보지 못 한 채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요 며칠 보이지 않았던 이준이 소문과는 정 반대로 한층 더 강해져서 나타난 것이다.
한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조직원들의 모습에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보기에도 불과 며칠 전보다 사람이 배는 많아 보였다.
“이봐, 이준! 드디어 치료가 끝난 거야?”
그렇게 준이 갸웃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하나가 들려왔다. 즉시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임동수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지금 가슴팍에는 익숙한 모양의 휘장이 달려있었다.
“선배…님? 왜 우리 비석의 휘장을…?”
“그야 동수 오라버니가 우리 조직원이 되었으니까요.”
곁에 있던 이은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은 눈만 휘둥그레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동수 선배는 10위 안에 드는 강자잖아요. 굳이 여기가 아니더라도…”
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임동수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굳이 여기라니, 설마 내가 비석의 구성원이 되는 게 싫은 건 아니겠지?”
“아…아니, 그건 아니지만 선배라면 분명히 더 좋은…”
“푸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본원에서 비석보다 더 좋은 조직이 어딨다고 그래. 지금 임수혁의 ‘늑대 이빨’과 류지안의 ‘열산’에 이어 ‘비석’이 본원 최강의 세력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너는 류지안에 필적하는 강자고, 네 여자친구가 임수혁을 꺾었지. 그것도 압도적으로. 비록 다른 조직에 비해 조직원들의 실력은 조금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문제는 곧 극복되겠지. 이건 내 장래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네? 은이가…누굴 이겨요?”
임동수의 말에 이준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곁에 서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긴…넌 의식을 잃고 실려 나갔으니 못 봤겠군. 천하의 임수혁이 네 여자친구에게 10분도 안 돼서 패배했다고. 그것도 공격다운 공격 한번 못 해보고 말이야.”
이어지는 임동수의 설명에 이준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릴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 이은이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었지만, 임동수의 이야기는 그가 상상했던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이준 본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쏟아냈지만, 임수혁보다 한수 아래라고 평가받는 류지안과 간신히 비겼을 뿐 이었다. 하지만 ‘그’ 류지안 보다 더 강한 임수혁을 10분 만에 패배시키다니…이는 자신의 눈앞에 서있는 이 귀여운 소녀가 최소 투왕급의 강자임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17세의 투왕이라니. 준은 순간 가한제국 10대 강자 중 하나인 나원승을 떠올렸다.
‘정말 은이가 가한제국 10대 강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이란 말이야?’
* * *
이준이 깨어난 후 며칠간은 이전과 같은 평화로운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본원에서는 매번 놀랄만한 각종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 역시 일상 속에 녹아들었다.
순위 쟁탈전이 끝난 후 참가자들은 부상을 치료하고 천계의 탑에 들어가기 위해 몸과 마음을 재정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준은 불과 얼마 전 2계급을 한 번에 뛰어넘은 통에 넘쳐나는 염력을 제어하기 위한 수련에 매진했다.
어떤 일을 계기로 급격하게 성장한 투사들이 그것에 만족해 기초를 소홀히 하다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투기 대륙에서 상당히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초가 부실한 투사들이 자신보다 몇 단계나 아래에 있는 투사들에게 패배하는 것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피의 종족의 소종주는 매우 젊은 나이에 투령 단계에 진입했지만, 실제 전투가 일어나자 실력은 일반적인 투령에 비해 훨씬 약했었다. 염력의 양만 많을 뿐, 그것이 견고하게 쌓이지 못 해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절반조차 써먹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기초를 다져간 지 일주일…
준은 자신의 몸 안에 얼기설기 흩뿌려져있던 염력이 조금씩 응집해가는 것을 느꼈다.
많은 투사들이 염력을 가다듬는 데는 적은 시간을 쓰고, 그 양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준은 매일 같이 세심하게 염력을 갈고 닦아 언제나 자신의 염력을 고르고 깨끗하게 유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용량 자체를 늘리더라도 그것을 절반도 쓰지 못 하느니, 가지고 있는 것을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게다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진정한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탁한 염력을 잔뜩 가지고 있는 것 보다 순수하고 맑은 염력을 천천히 쌓아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준은 당장 1,2성을 뛰어넘는 것 보다 먼 미래를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가진 재능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바로 그런 ‘인내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