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진정한 강자와의 대결
“휴.”
한편, 이준 곁에 있던 오하늘은 한숨을쉬며 이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딱히 건넬 말이 없었다.
바로 그 때, 보람이 생글생글 웃으며 준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이준. 내가 저 류지안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서 경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줄까? 그럼 너도 바로 올라갈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괜찮아. 질 때 지더라도 그런 짓을 하면 안되지.”
보람의 제안을 거절한 이준은 곧바로 주위를 돌아보며 비석의 동료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너무 하는데…아직 경기는 시작도 안했잖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준의 말에 오하늘을 비롯한 비석의 간부들은 억지 웃음을 지었다.
자신보다 더 우울해진 오하늘과 이윤영의 표정에 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들이 뭐라 생각하건, 그에게는 아직 비장의 수단이 남아있었고, ‘그 수단’을 사용한다면 상대가 류지안이라 해도 해볼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비장의 수단을 사용하게 되면 자신 역시 무사할 수 없었지만……
천천히 경기장의 소란이 가라앉고,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심판석으로 향했다.
“첫 번째 시합을 시작하지, 엄호와 전이범!”
대장로의 우렁찬 목소리에 관객들의 시선이 다시 경기장안으로 향했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류지안만큼이나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는 ‘엄호’였다.
엄호가 경기장에 입장하자, 비대한 체격을 가진 이범 역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때, 갑자기 그의 몸이 살짝 수축하더니 회오리 바람이 그의 몸 주변에 응집되며 거대한 몸집이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라 경기장 중앙으로 이동했다.
“바람 속성 염력을 다루는군…”
멧돼지 같은 체격의 사내가 민첩함의 상징인 바람 속성 염력을 사용하는 기묘한 모습에 사람들의 입가에는 뜻 모를 미소가 걸렸다.
마침내 두 사람이 경기장에 등장하자 분위기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린 두 강자의 정면 대결이니, 기대가 집중되는 것이 당연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순식간에 각자의 무기를 꺼냈다. 엄호의 손에 들린 것은 검은색의 거대한 망치였고, 전이범의 손에 들린 것은 금색의 원형 톱이었다.
원형 톱은 손바닥 정도의 크기에 불과했지만, 섬뜩하고 차가운 빛을 발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겼다.
“엄호 형님, 살살해주십쇼. 그 망치에 잘못 맞았다간 다진 고기 되는 것도 한순간이겠소.”
“쓸데 없는 소리 하지마 뚱돼지! 네 놈을 상대로 살살했다가는 당장 패배하고 말걸?”
엄호는 피식 웃으며 상대의 말을 받아친 뒤 곧바로 손에 든 검은 망치를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사람들의 귓등을 때렸다.
엄호의 공격을 바라보던 이범은 짤막하게 한번 웃음을 터뜨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황금 톱을 잡은 손에 힘을 더했고, 곧이어 짙은 염력이 그의 몸 속에서 솟구쳐 나오며 그의 몸 주위로 회오리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압!”
기합소리와 함께 이범의 손에 있던 황금 톱이 금빛 번개처럼 엄호를 향해 날아갔다. 황금빛 번개의 속도는 무서우리만치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엄호의 코 앞까지 날아들어 있었다.
쾅!
그 때 새까만 망치가 바닥을 세차게 가격하며 바닥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솟구쳐 금색의 원형 톱을 허공으로 날려보냈다.
“전열범, 다시 한 번 해보시지! 이제 아홉 번 남았나?”
엄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염력을 빠르게 끌어내 자신의 몸을 단단하게 감쌌다. 염력을 두른 그의 몸은 마치 회백색의 바위처럼 거대하고 단단해보였다.
전이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엄호의 염력은 땅 속성의 염력 중에서도 제법 희귀한 바위 속성의 염력으로, 방어력이 높기로 이름난 속성 중 하나였다.
“전이범은 실력으로보나 염력으로보나 엄호보다 한 수 아래야. 이기긴 어렵겠지. 게다가 그의 무투기인 황금 톱은 염력 소모량이 너무 커. 저 녀석이 실력으로는 기껏해야 10번 밖에 못 던져. 본원의 강자들 사이에서 ‘전열범’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정도니까.”
오하늘의 설명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황금 톱은 이런 경기에 적합한 무기는 아닌 듯 싶었다.
전이범도 자신의 약점을 알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를 가르친 스승도 그의 공격이 암살에는 적합하나 일 대 일 격투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했었다.
열 번을 나누어서 던져봤자 엄호의 방어를 뚫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전이범은 기회를 봐 무려 세 개의 톱을 한 번에 날렸다. 그러나 아무리 전력을 다해도 엄호의 수비를 뚫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공방이 이어지고, 결국 전이범이 무력하게 손을 들며 패배를 인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경기가 뒤이어 시작했다.
보람과 강태진, 실력차이가 큰 싸움이었다.
보람은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살벌한 기세로 염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어제 투황 계급 마수에게 당해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던터라 오늘 그녀는 유독 더 난폭해져 있었다.
조금도 상대를 봐줄 마음이 없는듯한 그녀의 모습에 관객석에 있던 수 많은 학생들은 조용히 강태진의 명복을 빌었다.
그러나 보람이 경기장에 걸어 나오는 순간, 누군가가 큰 소리로 심판석을 향해 외쳤다.
“저기…강태진이 배가 아프다고 경기에 참가할 수 없다고 합니다!”
누가봐도 뻔한 거짓말에 관객석 곳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서천우는 잠시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수혁이나 류지안조차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괴물이 저렇게 대놓고 상대를 박살내겠다고 벼르고 있는 판에 강태진을 억지로 불러내서 경기를 하게 해봤자 결과가 눈에 보듯 선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오늘 보람은 평소보다 훨씬 더 난폭해 보였고, 이런 보람에게 강태진을 붙여놨다가는 괜히 애먼 학생 하나를 침상으로 보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음…… 그렇다면 마지막 경기를 바로 시작하죠.”
잠시 후, 대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른 기침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장로의 한마디에 경기장 사람들의 이목은 다시금 이준과 류지안에게로 향했다. 이 대결이야말로 오늘 시합 중 가장 기대되는 경기임이 분명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류지안이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곧바로 관중석에서 날아올라 경기장에 안착했다.
그의 두 다리가 무겁게 경기장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류지안이 고개를 들어 올려 이준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사실 이번 대회에서 류지안이 가장 견제하던 대상은 임수혁이었고, 다른 참가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지난 이틀 사이, 이준에게도 어느 정도 관심이 생긴 듯 했다. 이준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자신이 이를 갈고 있는 상대인 임수혁이 상대를 높이 산 것이 그의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한 듯 했다.
류지안이 경기장으로 내려오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준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화제의 신입생이 류지안을 만나도 과연 지금까지처럼 당당하게 맞설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준은 명실상부한 본원의 최강자 중 하나인 류지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데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런 당당한 태도에 관객들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오라버니, 힘내요!”
자신을 응원하는 이은의 목소리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가볍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다음 순간, 그의 발 아래에 은빛 섬광이 한번 번쩍이더니 돌연 경기장에 검은 망토를 두른 소년의 형상이 나타났다.
사실 지금 이준에게 있어서 류지안이나 임수혁 같은 강자와 마주하는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구름 불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반드시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심 대결을 하지 않고 10위권내에 이름을 올리기를 바랐고, 그것이 아니라면 약한 상대를 만나기를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그의 상대는 류지안으로 정해졌으니, 이제는 죽기 살기로 해볼 뿐이었다.
“실망하게 만드는 일 없길 바란다.”
이준이 경기장에 내려오자마자 류지안이 입을 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웃으며 등 뒤에서 검은 송곳을 빼들었다. 검은 송곳이 허공을 가르자, 묵직한 바람 소리가 경기장 안에 울려퍼졌다.
류지안은 이준의 무기를 힐끗 보더니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준에게 특이한 무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마주하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송곳은 자신의 파열의 창만큼이나 무게가 있는 듯했다.
‘어쩐지. 무기를 버리고 나서 속도가 증가하는 이유가 있었군. 무거운 무기로 단련을 하고 있었던 거야.’
류지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런 방식의 수련을 고집하는 상대를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두 손을 뻗어 천천히 구부렸다 펼치며 지금까지 숱한 강자들을 쓰러뜨렸던 굽은 모양의 발톱을 만들어냈다.
“내가 널 무시한다고 서운해 하는 일 없었으면 한다. 파열의 창은 내가 진정으로 호적수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만 꺼내는 무기니까. 네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한 번 확인해보마.”
준은 상대의 말에 딱히 불쾌한 기색을 표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검은 송곳을 움켜잡았다. 평소라면 상대의 그런 거만한 발언에 기분이 상했을테지만, 류지안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것이 자만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 경기를 시작하도록!”
두 사람이 준비를 마친듯하자, 대장로가 경기의 시작을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분위기가 더욱 뜨겁게 달아 끓어오르며 광장안에 불 같이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다.
경기가 시작되자, 류지안이 번개같이 체내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경기장 위에 있는 준은 물론이고 관객들조차 식은 땀을 흘릴 정도의 기세였다.
곧이어 그의 몸이 황금색 염력으로 뒤덮이며 거대했던 발톱이 더욱 커져 두 배 가까이 부풀어 올랐다.
멀리 떨어져있는 관중들조차도 쏟아지는 강렬한 압박감에 몸을 벌벌 떨 지경이었다.
이에 맞서 준의 몸에서 푸른 화염이 쏟아져 나오자, 관객들의 반응이 더욱 더 뜨거워졌다.
‘천계의 불꽃, 대지의 변화!’
다음 순간 준의 몸에서 아른거리던 푸른 불꽃이 몸속으로 사라지며 그의 기세가 더욱 더 거세졌다.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천계의 불꽃을 사용한 것은 비술을 통해 실력을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류지안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류지안과 준이 눈을 마주치는 순간, 작은 천둥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 하나가 거대한 송곳을 이끌고 폭발적인 기세로 류지안을 향해 질주했다.
새파란 염력을 두른 준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검은 송곳을 휘둘렀지만, 류지안은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상대의 공격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상대의 공격을 피해냈다.
검은 송곳이 아래로 떨어지며 류지안의 어깨쪽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류지안은 왼손 발톱으로 아주 정확하게 검은 송곳을 가격했고, 그와 동시에 엄청나게 강력한 원기가 쏟아져 나오며 이준의 송곳을 쳐내 이어지는 공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준의 기세가 아주 잠깐 주춤하자, 류지안의 손바닥이 곧바로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