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10위 쟁탈전
준은 자신의 저장반지에서 이은이 건넨 두루마리를 꺼내든 뒤 진지한 표정으로 이은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게 뭐야?”
자세히 보니 검정 두루마리는 생김새부터 뭔가 특이했다. 여닫이 부분도 없는 게 그냥 대나무 통 같은 모양새였다
“무투기예요. 최소 투왕 계급은 되어야 볼 수 있어요.”
이준은 깜짝 놀라 손을 떨었다. 하마터면 두루마리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투왕만 열수 있는 무투기라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무슨 등급인데?”
이준이 더욱 웃음기 빠진 얼굴로 진지하게 물었다.
“나중에 오라버니가 열어보면 알겠지?”
그러나 이은은 씩 웃으며 이준의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귀한 걸…”
이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오라버니한테 뭐 하나 해준 것도 없잖아요.”
“그래 알았어…”
잔뜩 풀이 죽은 이은의 모습에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여태까지 한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왠지 모르게 평소처럼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꼭 기억해요. 반드시 투왕이 되어서 수련을 해야 해요. 아니면 오라버니에게 해가 될 수도 있어요.”
이은이 진지한 표정으로 당부하자, 준의 가슴에 또 다시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
“알았어.”
“그리고 오라버니, 그 태령 황제의 옥과 관련된 일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는 안돼요. 명심해요.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돼요.”
이은이 또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떼자, 준 역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은은 그 말을 끝으로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건만, 끝내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헤헤, 그럼 먼저 방으로 돌아갈게요. 내일도 경기가 있잖아요!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수련에 집중해요!”
떠나가는 이은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거겠지…?”
……
“아가씨, 물건은 전해 드렸나요?”
세형이 이은을 보며 물었다. 이은은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 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르신께서 아주 어렵게…”
세형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오라버니가 갖는 게 더 나아요. 이 일은 다른 사람이 절대 모르게 해주세요, 저희 아버지도요.”
“이게 참…알겠습니다.”
세형은 한숨 섞인 대답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밤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오라버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다 했어요. 이제 진정한 강자가 되는 건 오롯이 오라버니 몫이에요. 다음에 만났을 때는 훨씬 더…강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해요.’
마지막 남아 있던 달빛도 하늘에서 종적을 감추고, 대신 밝은 빛이 천천히 대지를 환하게 밝혔다.
대지 위로 태양빛이 쏟아져 적막을 몰아내며 본원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마침내 대회의 마지막 날이 밝자, 본원의 모든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누가 강자 목록의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릴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기장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광장 안을 메우기 시작했다. 경기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빼놓지않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준이 관중석에 도착했을 때 즈음에는 광장안은 문자 그대로 발 디딜틈 하나 없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준은 이번 대회에서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이었다. 본원에 발을 들인지 일 년도 되지 않아 벌써 10위권을 놓고 쟁탈을 벌일 자격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가 경기장 안에 발을 들이자,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그러나 준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차분히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고, 주변 사람들과 낮은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며 경기 시작을 기다렸다.
이준이 자리에 앉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체구를 가진 여자 아이 하나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란 말총머리를 찰랑이는 모습이 소녀의 모습은 귀엽기 짝이 없었지만, 그녀가 나타나자 주위의 학생들이 슬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준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갑자기 나타난 보람을 바라봤다. 보람의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가느다란 손목에는 시퍼런 멍이 가득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깜짝 놀란 준이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묻자, 보람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깊은 산에 들어가서 겨우 마음에 드는 약초를 찾았거든. 그 때 그 약초를 지키는 투황 계급의 마수를 만나는 바람에 말이야. 그런데 이기지 못해서 결국 도망 왔어.”
투황급의 마수를 건드리다니…준은 보람의 대범함과 끝을 모를 힘 앞에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 자식 나보다 그렇게 세지도 않았다고. 내 주먹이 제대로 꽂혀서 그 녀석도 뒤로 날아갔다니까.”
다른 학생이 그런 말을 했다면 허풍이라며 콧방귀도 뀌지 않았겠지만, 보람의 성격상 그런 허풍을 떨리가 없었다. 준은 또 다시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헤헤, 그래서 말인데, 우리 같이 가보는 건 어때? 내가 그 녀석을 잡고 있을 테니까 네가 약초를 따오는 거야.”
그녀의 제안에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난 번에 투왕급 마수인 하얀 하늘 침팬지 하나 상대하는 데에도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투황급 마수와 싸우러 가자니…
보람에 제안에 대해 준이 뭐라고 둘러댈지 고민하는 사이, 때 마침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준은 이 때다 싶어 잽싸게 고개를 돌려 경기장 밖을 바라봤다.
경기장 위로는 임수혁을 비롯한 본원의 최강자들이 줄줄이 입장하고 있었고, 본원의 모든 학생들은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수혁 일행은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이준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부디 오늘 이준 후배님과 같은 숫자를 뽑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임수혁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더 이준에게 집중되었다. 본원의 최강자가 그를 인정했다는 사실에 어떤 학생들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어떤 학생들은 못 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하, 선배님이 저를 너무 과대 평가하시는군요.”
준의 말은 반쯤은 진심이었다. 그의 목표는 10위 안에 드는 것 이었고, 이왕 10위 안쪽에 이름만 올리면 되는 거, 순조롭게 올라가는 편이 좋았다. 물론 임수혁과 한번쯤 붙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어이, 임수혁. 너 설마 이 녀석을 괴롭히는려는건 아니지? 내가 분명히 말했다. 이 자식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둔다고!”
그 때, 보람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이준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두 주먹을 맞대며 말했다.
보람의 협박에 임수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배님…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정말로 이준 후배님과 싸우고 싶지 않아 해 본 말입니다. 게다가 뒤에 선배가 버티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이준 후배님에게 시비를 걸겠어요.”
“알면 됐어.”
보람은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준은 서둘러 그녀를 끌어 당겨 억지로 의자에 앉히고는 임수혁을 향해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
이준의 이런 행동을 보고 임수혁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임수혁의 예상과는 달리 보람은 화를 내기는커녕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입술을 한번 샐쭉 내밀뿐 이었다.
‘허…보람 선배가 저렇게 얌전하게…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준의 행동은 평소 보람의 성격대로라면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온 경기장을 뒤집어 놓았을만한 것 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오빠에게 혼이 나는 여동생처럼 뾰로통한 표정을 지을 뿐 평소처럼 난동을 부리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나 보람에 대한 공포가 뼈속 깊이 새겨진 임수혁은 혹시라도 보람의 화가 자신을 향할까 싶은 마음에 서둘러 일행을 데리고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임수혁이 줄행랑 치는 모습에 준은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몇 번을 보아도, 임수혁 같은 강자가 보람 같은 어린 아이와 얼굴을 마주할 때 마다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장면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임수혁이 자리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류지안이 경기장 안으로 입장했다. 그가 자리로 가려면 이준 앞을 지나가야 했지만, 류지안은 보람을 발견하자마자 흠칫 놀라 그들을 피해 반 바퀴나 빙 돌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마침내 심사위원석에 장로들이 차례대로 앉자 종소리가 울렸고, 이에 장내의 소란도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대장로에게로 향하자, 그는 간단히 옷 매무새를 정돈한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이틀 간의 경기를 통해 이제 13명이 남게 되었습니다. 10위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 명이 탈락해야 한다는 소리지요. 전통에 따라 먼저 여섯 명을 임의로 추첨해 시합을 진행하고 10위를 가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대장로는 13개의 제비가 들어있는 대나무 통을 꺼내들었다.
“이 안에는 열 세 참가자들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있습니다. 제가 이 중에서 여섯 명을 뽑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나무통이 등장하자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되며 관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먼저, 엄호.”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엄호는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의 상대가 정해지길 기다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대장로가 다시 한번 제비를 뽑은 뒤 진중한 목소리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상대는 전이범.”
전이범은 강자 목록 8위에 이름을 올린 엄청난 강자로, 엄호와 같은 투령 계급 강자였지만 엄호와는 실력 차이가 제법 나는 상대였다. 물론 엄호가 더 뛰어났기 때문에 전이범의 표정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대장로는 곧바로 다음 제비를 뽑아든 뒤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보람”
“와아……”
보람의 이름이 나오자, 임수혁과 류지안의 얼굴이 대번에 사색이 되었다.
“강태진.”
“휴우…”
상대가 정해지자, 관객들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람의 상대가 된 사내를 바라봤다. 그는 강자 목록 6위에 이름을 올린 강자였지만, 임수혁과 류지안조차도 보람의 상대가 될 수 없는 판이었으니 안타까운 시선이 쏟아지는 것이 당연했다.
“마지막 두 사람입니다. 류지안…”
대장로는 마지막 두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을 부른 뒤 잠시 멈칫거리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삽시간에 주위에 정적이 흘렀다.
“이준!”
그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검은 망토를 입은 소년에게로 향했다.
류지안의 상대로 이준이 지목되자, 관객석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재미있는 대결이 될 것 같다고 했고, 누군가는 대회 최고의 기대주가 결정적인 순간에 거대한 벽을 만났다며 아쉬워했다.
이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드디어 건방진 신입생이 망신을 당하게 됐다며 웃음을 짓기도 했다.
상대인 류지안은 본원에서 실력이 높기로 정평 난 강자였고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보람이나 임수혁 정도 뿐 이었다. 물론 이준도 앞선 두 경기에서 훌륭한 성적을 냈지만 류지안과 비교하자면 거의 승산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휴…불쌍하게 됐구나.”
엄호가 한숨을 푹 쉬며 임수혁을 바라봤다.
한율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준의 재능을 높게 사는 그녀였지만, 몇 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 류지안과 붙는다면 승산이 없었다.
“흠…나도 이준이 질 확률이 더 크다고 생각하긴 하지만…워낙 숨겨놓은게 많은 친구니 우선 끝까지 지켜보자고.”
임수혁의 한마디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류지안을 바라봤다. 역시나 그는 표정 변화 하나없이 차분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을 뿐 이었다.
그러나 침착한 류지안과 다르게 그의 옆에 있던 류헤이는 펄쩍펄쩍 날뛰며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