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양대산맥
류지안은 시작부터 난폭한 기운을 내뿜으며 독수리 발톱 같은 형상의 손바닥으로 상대방을 수 없이 가격했다. 상대 역시 전력을 다해 방어했지만, 몸에는 계속해서 생채기가 생겼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경과하자 류지안이 갑자기 힘을 폭발시키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상대의 혼을 쏙 빼놓은 뒤 그의 목 부근에 손톱을 겨눴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섬뜩한 감각에 류지안의 상대는 무기력하게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 광경에 관중석에서 류지안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이준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임수혁의 말에 따르면 류지안의 특기는 ‘발톱의 분열’과 ‘창의 분열’ 두 가지 였지만, 11위의 강자를 상대로도 류지안은 오로지 ‘발톱의 분열’ 하나만을 사용해 가뿐히 경기를 끝냈기 때문이다.
“이미 투왕의 벽을 반쯤은 넘은 것 같네요. 진정한 투왕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지만…도저히 투령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네요.”
그 때, 준의 옆에 있던 이은이 진지한 표정으로 상대의 실력을 분석했다. 그녀의 눈은 뛰어난 영혼 탐지 능력을 가진 이준보다도 더 정확했으니, 거의 완벽하게 류지안의 실력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임수혁도 그 정도의 실력자일 거고.”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둘 다 엄청난 강자인 건 확실한 것 같아. 보람 선배를 제외하면 저 두 사람의 발치라도 따라갈 사람이 있을까?”
“있죠.”
자신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싱긋 미소를 짓는 소녀의 모습에 준은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흥, 너는 어떻고? 네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지 다 알아. 제대로 실력을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네 실력이 나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 정도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대체 왜 실력을 감추고 있는거야. 네가 나 때문에 빛을 못 보는 걸 원하지 않아.”
준이 진지한 말투로 말을 꺼냈지만, 이은은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실력 발휘를 해볼까요?”
이은의 말투에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이 대회가 끝나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이준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이은의 얼굴 가득 또 다시 행복한 미소가 번져갔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말이야…’
그녀는 그 한마디를 속으로 삼키며 준을 향해 평소보다 더욱 환히 웃어보였다.
* * *
류지안이 퇴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수혁의 경기가 시작됐다.
준은 깊은 산속에서 보았던 임수혁의 실력을 머릿속으로 복기해 보았다. 자신보다 몇 계급은 위인 투왕급 마수를 상대로 보인 임수혁의 실력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투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했다.
임수혁의 등장에 경기장의 분위기가 더욱 달아올랐다. 게다가 본원에서 그의 인기는 류지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류지안의 카리스마가 어둡고 무거운, 그리고 조금은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면, 임수혁의 그것은 보다 부드럽고 여유있는, 그리고 왕자와도 같은 품위가 있는 ‘무언가’였다.
그의 서글서글하고 친절한 성품과 예의 바른 태도 역시 더욱 많은 학생들이 그를 흠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그 나이 또래의 천재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오만함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는 오히려 그를 더욱 더 강하고 여유 있는, 진정한 강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신입생인 준을 상대로도 여전히 존대말을 사용하고 있다거나, 준이 곤란해 하면 눈치껏 화제를 돌려준다거나, 단 한 번도 강압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 모습만 보아도 그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등장하자마자 열렬한 환호소리가 쏟아졌고, 수 많은 여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며 경기장 중앙에 서 있는 청년을 보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흔히들 임수혁과 류지안에 대해 사람들이 존경과 두려움을 품고 있다고 하는데, 임수혁에게는 존경의 마음이 더 컸고, 류지안을 보면서는 두려운 마음이 더 큰 듯 했다.
이준은 난간에 기대어 흥미로운 듯 정 중앙에서 미소 짓고 있는 임수혁을 지켜봤다.
임수혁이 등장하자 상대도 느적느적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13위에 이름을 올린 상위권 고수였다. 하지만 그 또한 류지안의 상대와 마찬가지로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임수혁과의 대결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운이 조금만 따라주었더라도 조금 더 쉬운 상대를 만나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장로 후보가 될 자격을 눈 앞에 두고 하필이면 임수혁이라니…외나무 다리에서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
경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크게 볼거리가 없었다. 이준은 내심 상대가 임수혁과 비등한 실력을 보여주며 멋진 경기를 펼쳐주길 바랐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그가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 모아 덤벼도 임수혁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임수혁이 손을 한 번 쥐었다 펴자, 손바닥에 특이한 문양이 새겨졌다.
이준은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임수혁의 손을 자세히 살폈다. 임수혁의 두 팔은 유연한 뱀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류지안은 두 가지 무기가 있지. 하나는 발톱, 하나는 창. 그런데 임수혁도 두 가지 비장의 무기가 있어.”
그 때, 임동수가 이준 곁에 나타나 피식 웃으며 임수혁의 무투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궁금해? 궁금하지? 궁금할거야. 그렇지?”
“뭐, 말 해주면 좋고요.”
하지만 이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수의 성격상 자신이 궁금해하는 티를 내면 약을 올려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준의 크게 관심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임동수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 하고 순순히 임수혁의 무투기에 대해 털어놓았다.
“통제와 타격이더군.”
“통제와 타격이요?”
“임수혁이 특이한 무투기를 훈련했다고 들었어. 뱀의 손이라고, 네가 아까 본 것처럼 상대의 공격 범위를 통제할 수 있지. 실력이 약한 사람이면 퍼붓는 공격 족족 임수혁의 염력에 휘둘려 애꿎은 곳에 가서 꽂히게 되어있지.”
임수혁에 대해 말하는 임동수의 말투에는 일종의 동경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류지안의 발톱의 분열과는 상당히 다르지. 류지안의 무투기는 공격형이니까. 류지안이 아무리 발톱의 분열으로 공격을 날려도 임수혁은 물처럼 그걸 흘려보낼 뿐이야. 뭐, 상성이 나쁘다고 해야하나…어쨌든 임수혁이 가진 무투기가 조금 더 대단한건 사실이지.”
동수의 말을 듣고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니 임수혁이 두 팔을 움직일 때마다 상대의 팔이 접착제를 붙인 것처럼 일시적으로 붙어 버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타격은 뭔가요?”
“하하. 사실 그건 나도 잘 몰라. 사실 그걸 꺼낸 모습을 본 사람이 극히 드물어. 다만, 엄청나게 강한 검술형 무투기라고만 들었어. 류지안도 그것 때문에 졌다고 하니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아마 더 강해졌겠지.”
“역시 본원에는 보람 선배 말고도 강자가 가득하네요.”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어. 몇 몇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두 사람이 본원에서 가장 오래 머문 사람들이니까. 어쩌면 이 정도 하는게 당연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너는 본원에 온지 일 년도 안 되서 10위권에 올라갈 준비가 돼 있는 거잖아. 뭐…그렇게 보면 네가 더 괴물일지도 모르지. 난 네가 임수혁이나 류지안 나이가 된다면 네가 더 강할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보람 선배같은 엄청난 괴물이 되있을지도 모르지.”
동수의 칭찬에 준은 고개를 설레 설레 저으며 그 말을 부정했다.
“됐어요. 비교할 상대가 아니죠. 그리고 전 여기서 오래 머물 수가 없어요. 개인적인 일이 좀 있어서…”
“가족 일 때문에 그렇지? 하하. 사실 장로님들에게서 들은게 좀 있거든. 혼자서 투종을 따돌리고 도망치다니…그것만 봐도 이미 충분히 괴물이라고.”
이준은 동수가 자신의 내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조금 놀랐지만, 빙긋 웃으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일 내가 10위 안에 든다면 본원에서 1년 정도 장로를 하게 될 것 같아. 혹시나 가한제국으로 다시 가게 된다면 나를 데리고 가도 좋아. 어차피 대륙 여행 다닐 계획이었거든.”
임동수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음을 짓자, 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조금 괴팍하고 성미가 급해서 그렇지 좋은 사람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말을 해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운남종이 가한제국 최강의 세력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수는 선뜻 준의 편에 서겠다는 의사를 밝혀온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꼭 기억해 둘게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상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임수혁의 손 위에서 놀아나다 가슴 팍에 일격을 맞고 맥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가자고. 어차피 이 뒤로는 그다지 볼 만한 경기도 없어.”
임동수가 임수혁에게 맞아 경기장 밖으로 날아간 상대를 보며 이준에게 말했다.
“내일 경기가 기대 되는군. 어떤 재수 없는 자식들이 떨어질지 궁금하단 말이지…”
동수의 한마디에 준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경기장을 힐끔 쳐다봤을 때, 마침 임수혁과 이준의 시선이 마주쳤다. 임수혁은 특유의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은쟁반 같은 달이 대지 위로 은은한 달빛을 쏟아내자, 본원 위에 마치 은빛으로 빛나는 베일이 덮인 듯 했다.
준은 침대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다. 허공에 촘촘하게 떠 있는 에너지들이 쉴 틈 없이 그의 주변을 맴돌다가 빠른 속도로 그의 체내로 흡수되고 있었다.
“오라버니, 자요?”
그가 수련에 들어간지 한 시간 무렵,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부드럽게 물었다. 이은이었다.
그는 살며시 눈을 뜨고 방문 쪽을 바라보며 따뜻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어와.”
이준의 대답과 함께 문이 열리며 푸른 옷을 입은 소녀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은은한 달빛이 그녀의 얼굴에 내리자, 청초한 그녀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바람을 타고 은은한 향기가 방 안 가득 퍼져나갔다.
이준이 침대에서 내려와 찰랑이는 호수 같은 이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준의 다정한 목소리에 이은의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이은은 말없이 저장반지에서 검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이준의 손에 쥐어주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했다.
그러나 준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백옥 같은 손목을 붙잡았고, 소녀는 깜짝 놀라 움찔거리면서도 얌전히 준의 품 안에 안겼다.
“이 아가씨야, 한밤중에 내 방으로 뛰어 들어온 의도가 뭐야?”
준이 새빨개진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묻자, 이은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할 얘기가 있어서요…”
이준은 이은의 허리를 잡고 있던 팔을 더 세게 끌어 당기고는 두 눈으로 그녀의 작은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오, 오라버니, 이거 잘 챙겨둬.”
이준의 행동에 이은의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터질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머리에서 뛰기라도 하는 냥 쿵쾅거리는 소리가 머리 안을 가득채웠다.
그러나 준은 아랑곳 않고 두루마리를 들어 저장반지에 넣어 버리고는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이은의 입술에 어설프게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첫 입맞춤은 어색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오라버니…잠깐만요. 할 얘기가 있어요.”
하지만 다음 순간, 이은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진지하게 입을 떼자, 준의 머릿속에 문득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