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화제의 중심
다시 경기장 안으로 시선을 돌리자, 모든 힘을 다 소진한 채 비틀거리고 있는 오하늘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상대는 오하늘이 마음에 든 듯 잔혹한 수를 쓰지 않고 가벼운 공격으로 대결을 마무리했고, 오하늘 역시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하늘은 경기에 지고도 환히 웃으며 신이 나서 준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왔는데, 표정만 보아서는 마치 대회에서 우승을 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정말 강해. 대단해. 역시 10위권 안에 드는 강자는 차원이 다르군. 별 짓을 다해봐도 날 가지고 놀더라고. 그래도 날 좋게 봐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한 동안 침상에 누워있어야 할 뻔 했어.”
자리에 돌아온 오하늘은 평소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정말로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괜찮은게 맞아?”
상쾌해 보이는 오하늘의 모습에 이준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온 몸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고, 얼굴 역시 못 알아볼 정도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하하. 괜찮아. 이 정도야 며칠 쉬면 낫는다고. 그보다…”
그 때, 우렁찬 노인의 목소리가 오하늘의 말허리를 잘랐다.
“다음 경기, 7번!”
“이런…내 차례군.”
준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키자, 성치윤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성치윤의 시선을 느낀 오하늘은 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격려했다.
“지지마.”
“이준 후배님. 나도 후배님이 이겼으면 좋겠네요. 응원하겠습니다.”
곁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임수혁 역시 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승리를 기원해주었다.
……
“절대 저 녀석한테 지지 마. 만일 지게 된다면 앞으로 내 눈 앞에 얼씬 거리지도 말고.”
한편, 류헤이는 7번이라는 숫자가 호명되자마자 성치윤을 닦달하고 있었다.
“걱정할 거 없어. 널 봐서라도 저 녀석을 무릎 꿇려줄게.”
치윤의 대답에 류헤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성치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듯, 확신에 가득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조심해라. 저놈, 보통내기가 아니니까.”
다른 학생들의 경기가 펼쳐지는 내내 관심조차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자신의 수련에 집중하고 있던 류지안은 성치윤과 이준의 대결이 성사되자 서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형님. 걱정 마십시오. 제 실력을 못 믿으십니까?”
치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씨익 웃어보이고는 곧바로 경기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오, 지금 나온 사람이 성치윤이지?”
“백청보다 훨씬 강하잖아. 아무리 이준이라도 이번에는 어렵지 않겠어?”
“그래도 신입생이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도 대단한거지.”
성치윤과 이준이 경기장 위에 올라오자, 관객석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불의 힘 사냥대회’부터 ‘백의’와의 마찰, ‘비석’의 설립과 ‘백청’, ‘한솔’과의 연금술 대결에 이어 순위 쟁탈전까지…준은 그야말로 화제의 중심이었다.
“운이 좋군. 네 놈이 감히 순위 쟁탈전 2일차까지 살아남다니… 하지만 그 운도 오늘로 끝이다.”
준이 무대에 오르자마자 성치윤이 양 손에 까만 단검을 뽑아들며 입을 열었다. 그의 새카만 단검에는 은은하게 붉은 색이 돌았고, 옅은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두 개의 단검을 자유자재로 던졌다 받으면서 연신 웃음을 흘려댔다. 하지만 여유만만한 표정과는 달리 그 손은 너무도 빠르고 화려하게 움직이고 있어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준은 그 화려한 손놀림에도 아랑곳 않고 무심하게 상대를 한 번 훑어보고는 심판을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이 천계의 탑에서 한판 붙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본원 내에서 꽤 유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관객들 역시 잔뜩 들뜬 표정으로 대장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쏠리자, 마침내 대장로가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시합을…시작한다!”
……
쾅!
선제 공격을 펼친 것은 성치윤이었다. 그는 경기 시작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검은색 염력을 폭발시키며 화살처럼 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상대의 무시무시한 속도에 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준의 무기는 묵직하고 컸기 때문에, 이렇게 근접 전투에 능하고 빠른 상대를 품안으로 들이면 상당히 불리한 입장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준은 잽싸게 두어 걸음 정도 뒤로 물러선 뒤 곧바로 검은 송곳을 휘둘렀다. 검은 송곳이 허공을 가르자, 강렬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챙—
단검을 이용해 준의 묵직한 일격을 받아내는 것은 본래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성치윤의 실력으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염력을 폭발시켜 자신의 쌍단검으로 준의 송곳을 받아낸 뒤 곧바로 그 반동을 이용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다음 순간, 그는 두 자루의 단검을 어지러이 휘두르며 곧바로 준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준은 침착하게 검은 송곳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 그었고, 이에 성치윤은 공중에서 빠르게 몸을 틀어 상대의 공격을 피해냈다.
두 사람이 교전을 펼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위험천만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두 사람이 부딪힐 때마다 검은 송곳과 쌍 단검은 상대의 급소를 노려댔다.
순식간에 수 십 합을 겨룬 뒤, 성치윤이 가볍게 뒤로 몸을 날려 두 개의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눈치를 살폈다.
단검을 돌리거나 두 단검의 날을 비벼대는 것은 그가 다음 수를 생각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생각보다 강하군. 속도나 전투 경험은 나와 비슷한 수준이야. 하지만 염력은 아직 내가 한 수 위인 것 같군.’
생각을 마친 성치윤은 곧바로 염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비린내를 풍기는 새까만 염력이 몸 밖으로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며 그의 몸을 휘감았고, 그의 발아래에 흥건하게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준이 이에 맞서 염력을 폭발시키자, 그의 몸 위로 푸른색의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의 염력은 한 눈에 보기에도 성치윤의 그것과는 제법 차이가 있었다.
“네 놈이 얼마나 잘났든 등급의 차이란 게 있잖아.”
상대의 염력이 자신만 못 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성치윤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준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단검을 빙글 빙글 돌려대는 성치윤을 바라보고는 가만히 눈을 감고 다시 한번 염력을 끌어올렸다. 확실히 이대로는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천계의 불꽃 제 3장, 불꽃의 변화!’
……
잠시 후, 준의 몸에서 폭발하듯 푸른 화염이 쏟아져 나와 곧바로 성치윤의 염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비술을 사용한 준의 염력은 결코 성치윤의 그것에 밀리지 않았다.
쉭! 쉭!
그러나 성치윤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몸을 날려 춤을 추듯 두 자루의 단검을 휘둘러대며 준을 압박해왔다.
쨍, 쨍, 쨍!
다음 순간, 준의 발밑에 은색 빛이 반짝였다.
상대의 속도에 맞춰 준이 ‘번개의 춤’을 시전하자, 두 자루의 단검과 검은 송곳이 어지러이 뒤엉키며 시끄러운 금속성을 토해냈다.
그렇게 폭풍 같이 쏟아지던 성치윤의 공격은 5분 가량 지속 되다 점점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얼마 정도 시간이 더 지나자, 성치윤의 공격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만히 기회를 기다리던 준은 곧바로 검은 송곳을 들어올렸다.
그 때, 검은 송곳의 몸체 위로 촘촘하게 찍혀 있는 수 많은 칼자국을 발견한 준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만만하게 생각할 상대가 아니었다.
“성치윤, 전력을 다 하란 말이야. 꾸물대지 말고!”
승부가 길어지자, 누각 위에 있던 류헤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성치윤의 눈에 다시 살기가 돌았다.
곧이어 그의 손에서 짙은 검은 색의 염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염력은 계속해서 확대되다가 갑자기 한 군데에 뭉쳐지며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아마도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듯했다.
“흑수(黑水)의 결계!”
상대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감지한 준이 몸을 뒤로 돌리려는 순간, 검은 염력이 빠르게 회전하며 기이한 파공음을 만들어냈고, 갑자기 무수한 검정색 액체가 바람에 흩날리며 경기장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검은 액체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준은 우선 최대한 몸에 닿지 않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준의 뒤꿈치에 이상한 감촉이 전해졌다.
“제길!”
깜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숙여보자, 자신의 두 발 밑에 까만 액체가 찰랑이고 있었다.
그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검은 액체는 끈끈이처럼 들러붙었고, 빠른 속도로 준의 신발을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큭큭큭… 어디에 발을 디딜래? 이번 경기는 내 승리다!”
성치윤은 사방에 흩뿌려진 검은 물방울을 보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곧바로 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성치윤이 준을 향해 달려 나가는 순간, 상대의 모습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어디 갔지?”
“어어어…!”
성치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사이, 갑자기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저건 염…염력날개?”
검보라빛 날개를 펼치고 허공에 떠있는 준의 모습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비행 무투기로군. 흠, 저 녀석 이렇게 귀한 무투기까지 갖고 있다니.”
대장로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장로들도 화들짝 놀라 다시 한 번 준의 날개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가람아카데미의 장로들조차도 비행 무투기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적막한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 되었다.
높은 누각에 있던 다른 학생들 역시 준의 등에 달린 날개가 무투기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로 그것이 투왕의 염력 날개라면 임수혁과 엄호, 류지안조차도 이준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비행 무투기였구나…’
치윤 역시 점차 평온을 되찾았다. 그는 상대의 힘이 아직 투왕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날개에 더욱 당혹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투왕 계급에 올라선 게 아닌 이상 그리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냉정을 되찾은 그는 바닥에 흩뿌려진 검정색 물 위를 걸으며 여유롭게 단검을 돌려댔다.
“공중에 평생 떠있을 순 없을 텐데? 비행 무투기가 꽤 많은 염력을 잡아먹는다지?”
“쳇…”
성치윤의 말대로였다. 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급한대로 공중으로 몸을 피하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그 이상한 검정 물에 닿게 될 것이고, 끈적한 액체에 의해 속도가 떨어지면 제대로 전투를 벌이기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
‘성가시군…’
준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며 푸른 염력을 끌어내 자신의 몸에 두르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준이 순간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번개의 춤’을 시전하자, 벼락이 내리치듯 은빛 섬광이 허공을 가르고 성치윤을 향해 날아들었다.
상대의 공격 속도가 자신이 예측한 것을 아득히 뛰어넘자, 치윤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그는 자신이 밟고 있던 검정 물을 타고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이준의 일격을 간신히 피해냈다.
그의 검은 물은 상대와 닿았을 때는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했지만, 주인인 성치윤과 닿았을 때는 오히려 움직임을 빠르게 해주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 저 이상한 물부터 어떻게 해결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