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259화 (259/818)

제259화. 대결 상대

성치윤이 준을 노려보는 것을 눈치 챈 임수혁이 조용히 다가와 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조심해요. 성치윤은 말만 앞서는 사내가 아닙니다. 예전에 ‘시체전갈’에게 물려 중독된 적이 있는데, 그 독을 이겨낸 것도 모자라 그걸 자기 염력에 녹인 놈이죠. 전투 중에 자신의 염력에 독을 섞을지도 모릅니다.”

임수혁의 말에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성치윤과는 가볍게 붙어 본적이 있었지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 했었다.

“고맙습니다.”

“아…그리고 혹시 저 친구와 붙게 되면 내 몫까지 좀 때려주세요. 사실 저 친구와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

농담반 진담반 상대를 때려달라고 말하는 임수혁의 말에 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임수혁과 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갑자기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댕-!

다시 한번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끌벅적하던 광장 안이 다시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휘잉-

종소리가 조용히 가라앉고, 허공에서 서늘한 바람이 몰아치며 하늘에서 하나 둘 그림자가 날아들어 경기장의 특별석에 안착했다.

자리에 참석한 장로들은 대부분 아카데미에서 마주쳤던 적이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었지만, 그들 중 단 한 명…대부분의 학생들이 모르는 얼굴 하나가 끼어있었다.

“대장로까지 오실 줄은 몰랐는데…”

대장로를 알아본 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기는 했지만, 왠지 그 노인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모두 드러내기가 겁이 났다.

준이 한숨을 내쉬는 사이 어느 새 장로들이 모두 자리를 채웠고, 검은 옷을 입은 백발의 노인이 진지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와 입을 열었다.

“참가자…입장!”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장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 십 개의 그림자들이 허공을 가로질러 경기장 위로 뛰어 올랐다.

모두가 기다려온 진정한 강자들의 대결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바위처럼 거대한 형상 하나가 허공으로 몸을 날리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쾅!

사내가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묵직한 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무대 위에 서있던 참가자들은 거구의 사내가 착지하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류지안은 거만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의 시선을 느낀 상대 역시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를 똑바로 노려봤다.

하지만 살기등등한 류지안과 달리 임수혁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고, 이에 거구의 사내는 더욱 더 불쾌하다는 듯 살기를 풍겨댔다.

그렇게 임수혁과 류지안이 또 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자, 관객들의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낀 임수혁은 옅게 웃으며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순간 옅은 푸른색의 회오리가 그의 발밑에 형성되었다. 임수혁은 계단을 딛고 내려가듯 한 걸음, 한 걸음 경기장으로 내려갔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를 계단이라도 내려가는 듯 걸어 내려가는 임수혁의 모습에 관객석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투왕 수준에 이르면 염력 날개를 통해 하늘을 날 수 있지만, 설사 투왕이라 해도 날개 없이 이런 식으로 허공을 거닐 수는 없었다.

이렇게 허공을 걷듯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최소 투황 단계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이었으니, 자리에 있는 모두가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경기장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장로들조차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콰광-쾅…

그리고 임수혁의 충격적인 등장에 넋을 잃은 관객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어디선가 옅은 천둥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은빛 섬광이 벼락처럼 무대 위에 떨어졌다.

은빛 섬광이 서서히 흩어지고, 검은 망토와 시커먼 송곳이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석에서 또 다시 소란이 일었다.

이준의 등장은 앞선 두 사람만큼 강렬하고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비추지도 않는 그 무시무시한 속도 앞에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하나 같이 만만치 않은 신예가 나타났음을 직감했다.

“호오…저 아이의 속도는 투령들 중에서도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이군요. 게다가 아직 저 무투기를 온전히 다루지도 못 하는 듯한데…조금만 더 수련을 하면 얼마나 더 빨라질까 상상하기조차 두려울 정도입니다.”

이준과 사이가 나쁘지 않은 혁 장로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어디서 저런 무투기를 얻었을까요. 매우 귀한 무투기 같군요.”

또 다른 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추측을 덧붙였다.

그 때, 대장로가 뚫어져라 준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자가 어떻게 그 무투기를…? 저건 ‘번개바람 가문’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무투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연마할 수 없을 텐데…어떻게…”

이준의 등장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장 아래 어딘가에서 흰색 옷을 입은 작은 소녀 하나가 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눈빛들을 뒤로하고 경기장에 오른 그녀는 참가자 대열의 가장 앞으로 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실 아카데미 내에서 보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그녀가 아주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편도 아닌데다가, 그녀에게 감히 덤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아카데미 내에서도 류지안, 임수혁 등을 제외하고는 보람이 그들 모두를 가뿐히 이기고 순위 1위에 올라선 최강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작고 조그마한 여자아이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갑작스런 소녀의 등장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정작 그들이 최강자로 알고 있는 임수혁과 류지안을 비롯한 다른 강자들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그녀와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상위권 강자들의 이런 반응에 학생들은 더욱 의문을 느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보람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우물거리며 지루하다는 듯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본원의 가장 중요한 대회에 나온 사람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식사를 마친 뒤 나른한 몸을 이끌고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평온해보였다.

“흠, 흠!”

대장로의 기침 소리에 소란이 잦아들고, 모두의 시선이 경기장 중앙에 서있는 검은 옷의 노인에게 향했다.

“이제 모두 모였으니, 대회를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대장로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한 가지, 대회 시작 전에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네. 우리 아카데미가 매우 개방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대회 중에 본원의 학우들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하네. 명심하게. 순위 쟁탈전의 목적은 경쟁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긴장감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함께 수학하는 동료들을 해치기 위함이 아니야. 부디 여러분이 그 의미를 새기고 대련에 임하기를 바라겠네.”

대장로의 연설이 끝나자 몇 몇 수련생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부분의 수련생들은 애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강자간의 대결에서 상대의 안위를 신경 쓰다가는 십중팔구 패배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대결 중에 상대의 안위를 배려해도 되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 실력차가 너무나도 역력해 전력을 다할 필요가 없을 때뿐이었다.

그런 참가자들의 모습에 대장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최근 점점 거칠어지는 아카데미내의 분위기가 심히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규칙은 전과 같다. 색깔 패 뽑기로 상대를 정하고, 대결하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대회를 멈추고 잔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결국 대장로는 긴 한숨을 내쉬고 대회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대장로가 소맷자락을 가볍게 휘두르자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천이 나타나 서서히 떨어졌다. 검은 천 아래에는 큰 나무통이 올려져 있는 석판이 있었고, 나무통 안에는 적잖은 수의 죽간들이 꽂혀 있었다.

“통 안에는 모두 25개의 청색패, 25개의 홍색패가 들어있다. 모두 1부터 25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고, 같은 수를 뽑은 두 사람이 맞붙게 되는 것이지. 예를 들어, 청색 20을 뽑은 참가자는 홍색 20의 상대가 되는 식이네.”

대장로가 간단히 경기의 규칙을 설명했다. 결코 복잡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처음 대회에 참가하는 학생들도 모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 좋아. 시작!”

잠시 후, 참가자들이 하나 둘 순서대로 석대에 올라 자신의 패를 뽑아 모두에게 공개한 뒤 단 아래로 내려갔다.

준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의 미간이 갑자기 구겨졌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자, 백청이 독기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홍색 15.”

번호를 말한 뒤 옆으로 물러선 백청은 여전히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이준을 노려봤다.

‘흥, 류지안이랑 같은 번호나 뽑아라. 빌어먹을 자식…’

마침내 준의 순서가 오자, 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나무패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가 번호를 부르는 순간, 독기어린 눈으로 준을 노려보던 백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청색……15.”

이준이 자신의 번호를 말하는 순간, 백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는 그간 자신이 진 것은 5레벨 연금비약이 없어서였다고 떠들어대며 언젠가 준을 박살내주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준과 다시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공개적인 무대에서 패배하는 날에는 ‘백의’의 위신도 자신의 명예와 함께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자식, 내 목숨을 내 놓는 일이 있더라도 네가 10위 안에 들지 못 하게 해주마…!”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에 들린 나무패를 빙글빙글 돌리는 준을 보며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그 사이 또 다른 참가자들이 하나둘 각자의 패를 뽑아들었다.

한편 오하늘의 상대는 강자 목록의 43위에 올라있는 2성 투령으로, 하늘보다 계급은 높았지만 승산이 없다고 말할 정도의 강자는 아니었다.

마지막 참가자까지 모두 패를 뽑고 나자, 대결의 순서도 얼추 윤곽이 나오기 시작했다.

참가자들 중에는 더러 고개를 숙이고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사람들도 보였다. 특히 류지안과 같은 숫자를 뽑은 4성 투령은 이미 승부를 포기한 듯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한명…유독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그는 나무패를 뽑자마자 신이 나서 함박웃음을 지어대고 있었다.

자신의 상대가 밤톨만한 계집아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을 비롯해 보람의 정체를 알고 있는 다른 강자들은 그런 그를 측은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경기 순서가 모두 정해지고 나자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 번 참가자들을 향해 말했다.

“패 뽑기가 모두 끝났으니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주기 바란다. 대결 순서는 무작위로 추첨하지.”

곧이어 대장로가 번호를 말하자 참가자 중 두 명이 순식간에 한 곳에 묶였다.

“청색 패 7번과 홍색 패 7번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도록”

대장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내에는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두 사람 곧바로 정신을 집중하고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둘 모두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준과 오하늘도 한 걸음 물러서 자리를 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임수혁과 눈이 마주치자, 수혁과 두 사람 모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둘 중 하나는 35위고 하나는 38위야. 실력 차가 크게 안 나는 거지. 꽤나 재밌을 것 같다.”

하늘이 전투를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옆에 선 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난간에 기대 다소 풀어진 얼굴로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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