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급한 일
준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씨익 웃으며 보람을 바라봤다.
“보람아, 우리 거래하는 어때?”
“무슨 거래?”
“앞으로 네가 먹을 경단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모든 일을 제쳐 두고 네 경단을 만들어줄게. 대신, 내가 약재를 찾으러 갈 때 나랑 같이 가자. 어때?”
“나더러 약재를 찾는 일을 도우라고?”
“그런 고급 약재를 녹여서 먹을 만하게 만들 수 있는 연금술사가 이 본원에 그리 흔한 줄 알아? 그리고 그거, 보기에는 간단해 보여도 나나 되니까 그렇게 쉽게 만들어주는 거지, 이 본원에 그런 고급 약재로 경단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니까.”
준의 제안에 보람이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흥, 좋아. 하지만 약재를 지키는 마수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도와주지 않을거야. 만약 위험한 순간이 있다면 도와주긴 하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대가를 받을거니까 그렇게 알아!”
“당연하지. 그럼 약은 이따 저녁에 만들어 놓을 테니 내일 가지러 와.”
“아니, 난 여기서 기다릴 거야.”
“그래? 흐음…그래 알았어. 은아, 이 꼬맹이에게 방 하나 내줄 수 있을까? 며칠 동안 무리를 했더니…나도 좀 쉬고 싶거든. 네 먹을거리는 일단 좀 쉬고 나서 만들어줄게.”
* * *
시간이 지나 사방이 고요해지고 어둠이 온 세상이 내릴 무렵…
이은의 숙소 창문에 까만 그림자 하나가 내려앉았다.
“아가씨, 가주님에게서 명령이 하달됐습니다.”
“뭔데?”
“이씨 가문의 가주가 실종된 사실이 저희 가문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아저씨 행방은 알아보고 있어?”
“백방으로 조사 하고 있지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날 아저씨를 죽이려고 했던 운남종 장로에게서 뭔가 알아보려 했지만… 도련님께서 이미 그 자를 죽여 버리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지. 아버지가 납치당했다는데 미치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어. 그보다, 아버지가 내리신 명은?”
“열쇠를 찾지 못했다면 그냥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이한이 실종되어 열쇠를 찾을 방법이 없으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이준 도련님은 아가씨께 어울리지 않으니 쓸데없는 생각일랑 접으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가문의 장로님들도 같은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아가씨, 아가씨는 본래 도련님이 은빛성을 떠날 때 돌아오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후로 벌써 3년을 돌아오지 않고 계십니다. 장로들이 당장 아가씨를 데려오라고 난리입니다. 어르신께서도 한 달 내로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직접 데리러 오겠다는 말까지 하셨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잘 알아들었어.”
이은의 담담하고도 단호한 표정 앞에 세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하룻밤 사이 원기를 회복한 준은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먼저 보람이 가지고 온 ‘불의 정령의 뿌리’를 제련해 ‘약재 경단’을 만들었다.
유 장로가 ‘용의 힘’을 언제까지 제조해달라고 하지는 않았으니, 그 문제는 그리 급하게 생각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에서 나오자 어느 새 보람이 쪼르르 달려나와 준의 뒤를 따라왔다.
어린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보람의 눈망울 앞에 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실력은 ‘괴물’이 따로 없었지만, 보람의 마음은 티없이 맑은 어린 아이의 그것이었다.
약재가 먹기 좋게 변하자, 보람은 더 이상 이준을 귀찮게 하지 않고 바로 얌전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거구의 사내가 이준을 찾아왔다.
“네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참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어. 며칠 동안 경기장에서 몇 판 붙긴 했는데 별 재미가 없더라고! 다들 나만 보면 도망간단 말이야.”
이른 아침부터 준을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닌 동수였다.
“엥? 근데 이 꼬마 아가씨는…”
그러나 준의 곁에 앉아있던 꼬맹이를 발견하는 순간, 언제나 호탕한 웃음을 짓던 동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너…네, 네가 여기에 어떻게?”
10대 강자 중 하나인 동수가 사색이 되자, 이은과 윤영, 오하늘은 영문을 알지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준은 피식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아침부터 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데?”
“마…맙소사…너, 너희들 괜찮냐?”
“보다시피.”
“너, 너, 저, 저게 뭔지 알고는 있는 거야?”
“그럼. 아주 귀여운 여동생.”
동수의 어리둥절한 반응에 이준은 웃으면서 보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귀엽다고? 맙소사…”
“흥, 난 밥 다 먹었으니까 이제 갈게. 그리고 우리가 한 약속 잊지 마. 그리고 누가 괴롭히거든 이 몸에게 말하라고! 그래! 저 놈처럼 아침부터 찾아와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놈!”
말을 마친 보람은 작은 주먹을 연신 흔들어대며 문 밖으로 걸어 나갔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동수가 새파랗게 질려 준을 바라봤다.
“이준…!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동수 선배가 말하던 사람이 저 사람이죠?”
“그…그래…귀신에 홀린 것 같군…왜 저 괴물이 너랑…”
반쯤 넋이 나가 말을 더듬어대는 동수의 모습에 준은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렇게 됐네요.”
그 때, 하태준이 다급한 표정으로 대청으로 달려들어왔다.
“왜 그래?”
“그게…어제 휴가를 내고 외원에 다녀왔는데, 누가 대장을 찾고 있었어.”
“나를? 누가?”
“이옥. 이옥이라고 했어. 아주 다급해보였어. 자기는 본원에 들어올 수 없으니 대장더러 나오라고…아주 사색이 되어있던걸. 보통 급한 일이 아닌 것 같아. 자기가 대장의 사촌 누이라고 했어. 정말이야?”
준은 태준의 말을 듣자마자 곧장 몸을 일으켜 이은과 함께 본원의 입구로 향했다. 마침 할 일이 없었던 동수 역시 둘을 따라 입구까지 동행했다.
본원의 숲을 벗어나자, 노쇠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원을 나가고 싶으면 장로 한 분의 서신이 있어야 한다. 무슨 연유로 본원을 나가려는 것이냐?”
준은 서 장로를 발견하자마자 다급하게 달려가 고개를 숙였다.
“서 장로님? 이준입니다. 급한 일 때문에 외원에 다녀와야 하는데, 미처 서신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급한 일입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이준? 왜 그러느냐? 내원에만 있는 게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게냐?”
“그런 게 아니라 급히 가봐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규칙대로라면 서신 없이 내보낼 수는 없지만, 뭐…너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 밖에 나가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지. 알겠다. 대신, 이번 한번만이다.”
“고맙습니다. 장로님.”
준이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자, 이은이 다정한 표정으로 그를 다독였다.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요. 설마 무슨 큰 일이야 있겠어요?”
“은아, 너도 알잖아. 이옥이 날 찾아올 정도면 뭔가 일이 있어도 있는거야. 그게 아니라면 날 찾아올 위인이 아니라고. 그것도 그렇게 급하게…가문에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
은색으로 된 큰 대문을 나서자, 끝없는 산맥이 시야에 들어왔고, 멀지 않은 곳에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강이 보였다. 강 옆의 계곡 앞에는 커다란 비행마수가 날개를 펴고 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외원에 가시는 거죠? 여기 올라타세요.”
“고맙습니다.”
준과 이은, 동수는 지체없이 비행 마수의 등 뒤에 올라탔고, 이내 마수가 날개를 펼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자,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외원의 광장이 준의 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비행 마수의 등장에 외원의 학생들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이준 일행을 바라봤다. 하지만 준은 오랜만에 돌아온 외원의 풍경을 돌아볼 틈도 없이 다급히 발걸음을 옮겨 광장을 빠져나갔다.
이준 일행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바로 외원의 교사인 예진의 거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초조한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이옥의 모습이 보였다. 본래부터 새하얀 그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더욱 창백해져 있어 보기에도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이옥은 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말을 잇지 못하고 곧바로 눈물을 쏟아냈다.
“울지 말고 무슨 일인지부터 얘기해봐.”
준이 의자에 앉으려 하자, 이옥은 아무 말도 없이 곧바로 준의 손목을 잡아끌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옥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이준의 가슴에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25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억지로 고통을 참는 모양인지 가끔 몸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혀…형!”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둘째 형은 가한제국에 있었던 거 아니야? 왜 갑자기 가람 아카데미까지 온 거야! 그리고 왜 형이!”
“이틀 전 갑자기 누가 나를 찾는다고 해서 대문 앞에 나가 봤더니…나에게 찾아왔을 때는 이미 이런 상태였어. 가문에 일이 생겼다는 한마디만 하고 쓰러진 뒤로 지금까지 쭉 이 상태야…”
이옥의 설명을 듣던 준의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부단장이 이곳까지 왔을 정도라면, 뭔가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난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준은 곧바로 저장반지 속에서 상처 치료제와 기력의 조각을 비롯한 각종 연금비약을 꺼내 이찬의 입에 넣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단 둘째 형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 형이 정신을 차리면 모든 걸 다 알게 되겠지.”
“운남종이 오라버니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운남종이라면 절대로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이찬이 눈을 뜰 때까지,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쿨럭…”
마침내 힘없는 기침소리와 함께 이찬이 눈을 뜨자, 준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형의 손을 붙잡았다.
“준아, 준이 맞지?”
“형! 그래, 준이야. 형 동생. 이준. 맞아! 정신이 들어?”
형의 창백한 모습에 준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둘째 형,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거야? 큰 형은? 운남종 자식들이 이렇게 한 거야?”
“가문 사람들이 사막 칼의 용병단에 도착한 뒤에도 한 동안은 아주 조용했어. 그런데… 쿨럭…! 너무 방심했어. 제길! 운남종이 우릴 포기한 거라고 생각하고 이씨 가문 사람들의 환영식을 하려던 날 놈들이 들이닥쳤어. 복면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 무투기는 분명히 운남종의…”
“이 자식들이…!”
이찬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자, 준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오라버니! 어디 가요!”
“가한 제국으로 돌아가서 운남종 놈들을 모두 죽여버리겠어!”
“오라버니! 진정해요! 지금 오라버니 실력으로는 안 된다는 거 알잖아요!”
“그럼 나더러 어쩌라고!”
분을 참지 못한 이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찬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준을 말렸다.
“준아…! 쿨럭…! 그만두지 못 해!”
“형…!”
“지금 네가 경거망동하면 모든게 끝이야. 이럴 때 일수록 냉정을 찾아야지. 게다가 그 날 우릴 습격한건 운남종 뿐만이 아니야…운남종 놈들 사이에 쇠사슬을 사용하는…처음 보는 놈들이…있었다.”
“쇠사슬?”
‘쇠사슬’이라는 말에 준의 머릿속에 퍼뜩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영혼의 궁전…”
“그들이 도대체 뭘 찾는지 모르겠지만, 큰 장로님이 눈을 감기 직전에 형님과 나에게 네 손에 있는 옥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그 물건이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