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땅의 정령단
내원의 깊숙한 곳, 창문 사이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고 있다. 검은 망토를 두른 백발의 노인은 창 밖을 내다보다가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헌아, 요즘 천계의 탑은 어떠냐?”
“구름 불꽃이 보름에 한 번씩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장로들이 힘을 합쳐 억누르고는 있지만…상당히 위험한 상태입니다.”
“점점 더 빨라지고 있구나. 후우…봉인이 강할수록 그 힘이 폭발할 때의 위력도 더욱 거세질 것인데…어쩌면 본원이 모두 날아갈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장님을 돌아오게 해야할까요?”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오늘부터 모든 장로들의 휴식 시간을 없애고 돌아가면서 탑을 지키도록 하자꾸나. 일단 구름 불꽃에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바로 모든 장로를 불러모아 억눌러 보자꾸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구름 불꽃이 폭발할 때 탑 안에 있는 모든 학생을 내보내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거라. 그리고 본원에 있는 모든 강자들을 대기시키거라. 만일 구름 불꽃이 폭발하면 본원을 감싸고 있는 공간 결계가 깨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 흑각성의 범죄자들이 본원을 습격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테니 본원의 모든 강자들을 불러모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흑각성의 ‘약황’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한샘은 연금술사이니, 틀림없이 이 불꽃을 노릴 것이다. 연금술사들에게 천지의 불꽃은 세상에 비할 바 없는 보물이니까. 놈은 이미 이곳에 구름 불꽃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을거야. 불꽃이 폭발하며 소란이 일면 반드시 이 불꽃을 노릴테지. 그저 평범한 투황 강자라면 두려울 것이 없지만, 놈은 6레벨 연금술사다. 분명히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 이곳으로 향할 것이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놈이 천지의 불꽃을 제어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구나.”
“어떻게 그 녀석이 그런 능력을…”
“그 녀석의 스승이 누구더냐…”
“후…약선…과연 약선의 제자답군요. 약선도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대체 그 정도의 인물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걸까요?”
“글쎄…한샘의 말에 따르면 약선이 연금비약을 만들다가 그리 됐다고 하지만, 약선 정도의 연금술사가 연금비약을 만들다가 사고를 당했을 리가 없다.”
“설마…!”
“됐다. 결국 진실은 그 둘만이 알겠지.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알아낸다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사력을 다해 구름 불꽃을 억누르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 뿐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그리고,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던 그 신입생은?”
“두 달 동안 산에 틀어박혀 수련을 했다고 합니다. 그 곳에서 투령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한솔과 연금술 대결을 펼쳐 승리했답니다. 그 날 5레벨 연금비약의 제조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대단한 아이입니다.”
노란색 망토를 두른 사내가 감탄하듯 탄식을 내뱉자, 검은 망토를 누른 노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5레벨 연금비약의 제조가 가능한 투령이라…어쩌면 그 녀석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구나.”
“네.”
“좋아, 그럼 내가 했던 말들을 각 장로들한테 그대로 전해 주게.”
그리고 진헌이 장로의 명에 따라 막 문밖을 나서려던 순간,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장로님…저기!”
사내의 말에 노인 역시 문가로 걸어와 바깥을 내다봤다.
“이럴수가…이런 현상은 적어도 6 레벨 연금비약을 만들 때에나 볼 수 있는 것인데…!”
“6 레벨 연금비약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본원에 그런 레벨의 연금비약을 제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 봐야 알겠어. 자넨 내가 지시한 사항들을 전하게.”
큰 장로는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곧바로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 * *
같은 시각, 산맥의 다른 곳에서는 청색 망토를 두른 사내 하나가 머리를 들어 큰 장로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군. 가람 아카데미의 노친네 실력으로는 6레벨 연금비약을 제조할 수 없을텐데…그 사이 실력이 그렇게 늘 리도 없고.”
30대 안팎으로 보이는 사내의 가슴 팍에는 여섯 개의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는 휘장이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신비한 푸른 색 빛기둥이 울창한 수풀을 꿰뚫고 하늘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약로가 미간을 찌푸린채 바삐 손을 놀리자, 파란 빛기둥이 서서히 옅어지며 흔들리다가 그 안에서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푸른 보석 하나가 튀어나와 노인의 손바닥 위로 날아들었다.
약로의 손바닥 위에 자리한 연금비약은 마치 햇살을 맞은 바다처럼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고, 간간히 파도 같은 물결무늬가 그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며 더욱 신비한 기운을 더하고 있었다.
하늘을 뚫고 있던 거대한 빛기둥이 사라지자, 그제야 이준도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현상이 계속 됐더라면 아마 본원의 장로들이 모두 산으로 달려오고 말았을 것이다.
“이게 바로 땅의 정령단인가요?”
약로가 피곤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체인 상태로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드는 것은 제 아무리 약로라도 쉬운 일이 아닌 듯 했다.
“스승님, 어서 반지로 돌아가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제 땅의 정령단도 생겼겠다, 얼른 구름 불꽃을 얻어서 육체를 되찾아 드릴게요!”
제자의 말에 스승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말거라.”
준이 손을 내밀어 6레벨 연금비약을 건네받으려 하자, 푸른 알약이 빛을 내뿜으며 몸을 떨었다. 마치 스스로의 의지로 약로의 곁에 머물기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6 레벨 연금비약은 다 이렇게 영기를 가지고 있는 건가요?!”
준이 화들짝 놀라 질문을 던지자, 약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레벨의 연금비약이라면 어느 정도 영기를 가지고 있단다. 보통 이런 정도의 영기는 아니지만 이 땅의 정령단은 6레벨 연금비약 중에서도 제법 고급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얼음 불꽃의 정수로 제련한 품질 높은 물건이라 일어나는 현상이다.”
“6레벨 연금비약이 이런 영기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보다 더 레벨이 높은 것들 것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이 안 가네요.”
“허허, 7레벨 연금비약부터는 정말로 신비하지. 심지어 어떤 연금비약은 솥에서 나온 뒤 달아나기도 한단다. 8레벨 연금비약은 사람과 싸울 수도 있다고 하더구나.”
신비하다 못해 기이할 정도의 이야기에 준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그럼 9레벨은…제가 평생 그런걸 볼 기회나 있을까요?”
“9레벨 연금비약은 사람의 모양으로 변할 수도 있다고 하더구나. 됐다. 지금은 안다 해도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지. 나중에 네가 그 레벨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약로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약솥을 회수한 뒤 푸른빛을 내뿜은 ‘땅의 정령단’을 준의 손에 쥐어줬다.
그러나 막 저장반지 속으로 들어가려하던 약로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면서 먼 산맥 쪽을 바라봤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피해라. 누군가 오고 있어.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야. 아마 우리 땅의 정령단을 만들 때 뿜어져 나온 빛을 본 모양이다. 어서 숨거라. 네 실력으로는 저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없으니 내 영혼의 힘으로 너를 보호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약로의 다급한 말투에 이준은 곧바로 날개를 움직여 주위를 살피고는 거대한 산봉우리 틈 사이에 몸을 숨겼다.
몸을 숨긴 뒤 얼마 되지 않아 별안간 바람을 뚫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도착했다. 그림자가 멈추는 순간, 거대한 무형의 힘이 전신을 압박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 있지? 저 정도 실력이라면 설마 본원의 큰 장로인가…?’
“누가 이곳에서 연금비약을 조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본원의 학생이라면 얼굴이라도 보여주게!”
육중한 염력이 실린 목소리가 산등성이를 타고 전해졌다. 그러나 준은 시체처럼 조용히 몸을 숲속에 숨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볼 뿐 이었다.
“흐음…이미 떠난 건가?”
백발의 노인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몸을 돌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후로 약 10분 정도가 지나고, 준이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갑자기 약로가 그를 덥석 붙잡았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스승의 제지에 곧바로 다시 몸을 숙인 이준은 그대로 납작 엎드린 채 또 다시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멀리 산등성이 한 구석에 검은 망토를 걸친 그림자가 숨어있는 것이 보였다.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 스승님이 아니면 정말 큰 일 날 뻔 했어.’
그렇게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숨어있기를 30분…마침내 노인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준은 사지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후로도 반나절을 산속에 숨어있던 준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가 되서야 본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비석의 숙소에 도착해 방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새하얀 그림자 하나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보…보람? 여긴 웬 일이야?”
“왜긴 왜겠어? 네놈이 만들어 준 경단을 다 먹었으니까 온 거지.”
태연자약하게 손을 내미는 보람의 모습에 준은 남몰래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고급 약재를 대충 녹여내 만든 경단을 며칠 만에 다 흡수하다니…보람이 어떤 마수인지가 새삼스레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보람과 함께 대청에 들어서자, 윤영이 다가와 보람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쟤 도대체 누구야? 아침부터 갑자기 우리 비석에 와서 너를 찾더라고. 그러고선 네가 없다고 하니 여기서 이렇게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어. 꼬마라 우리가 어떻게 함부로 할 수도 없어서…”
“잘했어. 정말 건드렸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애거든.”
이준의 진지한 말투에 하늘과 윤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람과 이준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자신들의 반 토막밖에 되지 않는 꼬맹이가 뭐가 그리 대단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으음… 여기서 저 아이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거야. 아니, 비등하게 겨룰 수 있는 사람조차 없을걸.”
바로 그 때, 어디선가 나타난 이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윤영과 하늘은 더욱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보람을 위 아래로 훑어봤다.
“에잇, 설마. 저렇게 앳된 꼬마가…?”
그러거나 말거나, 준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보람이 보따리를 꺼내 약재 한 꾸러미를 탁자 위에 쏟아냈다.
“이건 약 창고를 지키고 있는 그 영감탱이가 갖다 주라고 보낸 거야. 이 약재는 뭐 유 장로가 준비한 거라고 하던데.”
보람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약재를 올려놓은 뒤 곧바로 자신의 저장반지 속에서 식물 뿌리처럼 생긴 분홍색의 약재를 꺼내들었다.
“자, 이건 내꺼.”
준은 유 장로가 보냈다는 약재를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장로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한 여유분까지 고려한 양의 약재를 보냈으니, 한번에 성공한다면 여분의 약재는 자신의 것이었다.
그리고 보람의 손에 들린 약재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이 나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불의 정령의 뿌리’라는 이름의 약재로, 농후한 불속성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최고급 약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너 정말 뻔뻔하구나. 혁 장로가 너 때문에 뒷목 잡을 것 같은데…”
“흥, 아니야. 이 약재는 나 혼자 산에서 찾은 거라고. 난 원래 천지영물(天地靈物)을 느낄 수 있다고. 그 영감탱이 잔소리 듣기 싫어서 직접 산에 가서 채집해온 거란 말이야.”
“뭐…? 정말로 희귀한 약재를 느낄 수 있는 거야?”
보람의 한마디에 준의 눈이 반짝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연금술사에게 이보다 더 탐나는 능력은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 그런데, 영약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귀한 물건일수록 얻기가 힘들어. 마수들이 지키고 있거든. 며칠 전에 내원에서 은백색 머리를 가진 여자를 만났었는데, 내가 하얀 원숭이가 뭔가 신기한 물건을 지키고 있다고 알려줬거든! 혹시 얻거든 반반으로 나누자고 말이야. 그런데 아마 그 물건을 손에 넣지 못 한 것 같아. 알겠어? 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게 아니라구!”
순간 준의 머릿속에 ‘지하의 유액’을 지키고 있던 하얀 하늘 침팬지의 모습이 스쳤다. 한율이 알고 있던 정보의 출처가 바로 이 꼬맹이인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