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준비완료
유 장로는 준의 손바닥 위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는 푸른 씨앗들을 바라보자마자 마른 침을 꿀껌 삼키며 눈알을 굴려댔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물건의 등장에 너무 놀란 나머지 혁 장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 준은 스승이 왜 그렇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절대 그 물건을 누군가에게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했는지 실감했다. 그가 내민 것은 대지의 불꽃이 있던 연화대에서 손에 넣은 ‘연밥’이었다.
“그게… 대체 무슨 물건이냐? 엄청난 에너지구나.”
“천지의 불꽃의 기운을 담은 씨앗입니다. 어쩌다 손에 넣은 물건인데, 제가 알기로는 이런 씨앗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백 년 이상이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영혼의 정수보다 못한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뜻 밖의 보물의 등장에 놀란 유대영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입술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 알. 두 알이라면 생각해보겠다.”
노인의 뻔뻔스러운 제안에 준은 순간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신조차 11알의 연밥 중에 한 알만 복용하고 나머지는 아까워서 손도 대지 않고 있었고, 연밥 한 알의 가치가 결코 영혼의 정수만 못 하지 않은데 두 알이라니. 해도 너무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구름 불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6레벨 물 속성 마정석이 반드시 필요했으니, 준은 치솟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예의바른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떡하죠? 저도 한 알밖에 얻지 못한 터라… 내놓고 싶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준은 그렇게 말하며 파랗게 불타오르는 불꽃 씨앗을 저장반지 안으로 거두어 들였고, 연밥이 모습을 감추자 유대영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떠올랐다.
‘흥! 약아 빠진 노인네….’
상대의 반응을 몰래 살피던 준은 쐐기를 박기 위해 자리에서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혁 장로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유 장로님 생각이 그러시다니…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 어이. 자네 성격이 너무 급하구만.”
“유 장로님, 제가 거래를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장로님이 요구하는 걸 드릴 수가 없습니다.”
준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더욱 초조해진 유 장로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준을 붙잡더니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좋, 좋아. 그럼 ‘용의 힘’ 한 알에 그 불꽃 씨앗 하나와 바꾸자. 이건 괜찮겠지?”
“좋습니다. 하지만 규칙에 따라 필요한 약재는 장로님이 직접 준비해 주셔야 합니다.”
“하하하, 어린놈이 칼 같군.”
“하하! 죄송합니다. 칼 같다기보다, 용의 힘을 만드는데 필요한 약재를 구할 실력이 안 돼서 그러니 장로님께서 조금만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용의 힘을 만드는데 필요한 약재를 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5레벨 연금비약을 만드는데 필요한 약재를 구해줄 이유도 없었고, 그럴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수련하고 구름 불꽃을 얻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진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용의 힘의 조제에 필요한 재료들까지 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거래가 성사되자, 유대영은 아쉬운 표정으로 저장반지 속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진한 보라색 결정체 하나를 꺼내어 준에게 건넸다.
“자, 가져가거라.”
탁자 위에 놓인 아름다운 보라색 결정체를 보는 준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땅의 정령단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약재가 드디어 손에 들어온 것이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여기, 불꽃의 씨앗입니다. 용의 힘은 장로님이 약재를 보내주시면 곧바로 만들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거래를 마친 준은 혁 장로와 함께 오두막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에게 감사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혁 장로님.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됐다. 유 장로 저 괴팍한 노인네가 한 방 먹는 걸 보니 속이 다 후련하구나.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 오거라.”
두 사람은 그렇게 가벼운 농담을 끝으로 각자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혁 장로의 뒷모습이 서서히 사라지자, 준은 그제서야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으로 약로에게 말을 걸었다.
땅의 정령단은 6레벨 연금비약이니 지금 준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었다. 설령 만들 수 있다하더라도, 재료들이 워낙 귀했으니 스승에게 맡기는 편이 안전했다.
“스승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시간이 없다. 구름 불꽃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땅의 정령단을 만들자꾸나.”
“그럼 언제 시작할까요?”
“음…우선 이틀 정도 쉬다가 산으로 돌아가자꾸나.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어떠한 방해도 받아서는 안된다. 게다가 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날씨가 변하거나 이상한 조짐이 생겨나기도 하니 이곳에서는 할 수 없다.”
* * *
그 후 이틀, 준은 숙소에서 나가지 않고 조용히 수련에 매진했고, 이은에게 은밀히 산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은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을 뚫고 몇 시간 정도를 날아가자, 인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준은 혹시나 누군가가 있을까 싶어 영혼 탐지 능력으로 주위를 샅샅이 살핀 뒤 숲으로 내려가 연금비약을 제조할만한 동굴이 있는지를 찾았다.
“땅의 정령단을 만드는 동안 절대로 내게서 눈을 떼지 말거라. 모든 것을 머리에 담아두어야 한다.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은 연금술사에게 더할나위 없는 공부가 된단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약재가 완성될 때 하늘에서 이상한 조짐이 보일 것이다. 그 때는 잽싸게 안전한 것으로 몸을 피하거라. 자칫하면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어.”
주의사항을 모두 일러준 뒤, 약로가 다시 지시를 내렸다.
“됐어, 이제 약재들을 꺼내거라.”
약로의 분부에 따라 이준은 재빠르게 저장반지에서 희귀한 약재들을 하나하나 꺼내 정연하게 늘어놓았다.
농후한 약재 냄새가 온 산에 퍼져나가자 정신이 번쩍 들며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준비 됐으면 이제 시작하자꾸나.”
말을 마친 약로는 곧바로 자신의 약솥을 꺼내들었다. 그가 약솥을 꺼내들었다는 것만으로도 6레벨 연금비약의 제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었다.
곧이어 그가 주름이 가득한 손가락을 까딱 거리자 새하얀 화염이 피어오르며 주위의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검푸른 나무들 사이로 백색 화염이 춤을 춘다.
약로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자신의 약솥에서 흔들리고 있는 새하얀 불꽃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새카만 약솥 안에서 너울거리는 아름다운 백색의 불꽃은 그 안에 들어있는 약재들을 빠른 속도로 녹여냈고, 이내 형형색색의 약재들이 피처럼 붉은 액체로 변화했다.
곧이어 노인이 손을 흔들자, 붉은 액체가 파도치며 한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스승의 능숙한 손놀림에 준은 저도 모르게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약솥 안에서 약로의 지휘에 따라 소용돌이치던 붉은 액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빨간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에너지가 농축된 붉은 연기가 치솟자, 그 세찬 기운에 묵직한 약솥이 미세하게 뒤흔들렸다.
살아있는 생명체마냥 요동치며 그 안에 담긴 힘을 뽐내는 붉은 기체의 모습에 준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약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움직일 뿐 이었고, 이에 따라 백색 화염들이 더욱 격렬하게 춤을 추며 붉은 기체를 집어삼켰다.
새하얀 불꽃에 닿자, 붉은 기체들이 급격하게 움츠러들며 갈무리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재와 씨름하기를 한 시간 반, 마침내 그 안에 담겨있던 이물질들이 말끔하게 사라지며 붉은 액체가 더욱 맑고 선명한 붉은 색을 띠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로는 그 붉은 액체를 알약으로 변화시키지 않고 액체인 상태 그대로 붉은 화염으로 감싸 옥병안에 넣었다.
생전 처음 보는 제조 방법이었다. 준은 이 상식을 벗어난 제조 방식에 화들짝 놀라 스승의 얼굴과 약병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약병 주위로 얇은 화염막이 일렁이고 있었다.
준의 시선을 느낀 약로가 온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안에 있는 액체들의 온도와 순도를 처음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방식이다. 고급 연금비약은 이렇게 제작하는 경우가 많으니 머릿속에 새겨두거라.”
설명을 마친 약로는 붉은 액체를 담아둔 약병을 조심히 내려놓고 곧바로 다음 약재를 약솥에 투여했다.
다음으로 제련해야 할 약재는 바로 동수에게서 얻어낸 ‘청나무 넝쿨’이었다.
‘청나무 넝쿨’은 화염에 대한 내성이 매우 강한 약재로, 약로의 ‘얼음 불꽃의 정수’로도 쉬이 녹지 않았고, 천지의 불꽃으로 무려 한 시간을 달군 끝에야 그 안에 담긴 성분을 추출해 낼 수 있었다.
약로가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들기 시작한지도 어느새 두 시간이 흘렀다. 이는 평범한 연금술사에게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작업 시간이었지만, 노인은 여전히 멈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청나무 넝쿨의 제련을 마치자, 하늘에는 이미 별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약로는 숨 한번 돌리지 않고 곧바로 ‘용의 얼음’을 꺼내들었다.
용의 얼음을 제련하는데에도 청나무 넝쿨을 녹이는 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모든 약재에서 약효를 추출하는 데에만 꼬박 세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나마 천지의 불꽃을 가진 약로였기에 망정이지, 다른 연금술사라면 약재를 녹이는데에만 며칠이 걸릴지도 모를 일 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재료인 6레벨의 물속성 마정석이 투여되고, 그것이 파란 가루로 변할 무렵이 되자 어느 새 산 너머로 빼꼼히 말간 해가 얼굴을 드러냈다.
6레벨 물속성의 마정석은 화염에 대한 저항이 매우 강해 그것을 녹이는 데에만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약재를 모두 녹여냈으니 융합작업에 들어갈 차례였다.
최고급의 약재들을 융합하는 것은 약재를 제련하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었다.
약재들은 몇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섞이지 않았고, 결국 해가 지고 다시 뜨기를 두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아주 서서히 융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련을 시작한지 3일째 아침…마침내 옅은 푸른색의 알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금비약이 그 모양을 드러내자, 마치 천지가 호응하듯 주위가 어두워지며 허공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로는 그런 놀라운 변화 앞에서도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오로지 약솥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마침내 옅은 푸른색의 연금비약이 사파이어처럼 반짝거리기 시작하자, 은은한 푸른색 빛이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고 나서야 준은 왜 스승이 이 깊은 숲까지 자리를 옮겨 연금비약을 만들어야 했는지를 실감했다.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푸른빛이 본원 안에서 뿜어져 나왔다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잠깐 피해 있거라. 아직 놀라기엔 일러.”
스승의 명에 따라 준은 날개를 뻗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백색 화염이 더욱 크게 타오르며 약솥 안을 가득 메우고, 이내 새하얀 연기가 신비한 청색 섬광을 뒤덮었다.
그러자 파란 빛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사방으로 에너지를 뿜어내며 거센 폭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힘 앞에 산등성이에 자리하고 있던 돌들이 데굴데굴 구르며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곧이어 굵은 나무들이 휘청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그리고 연금비약이 또 다시 푸른빛을 뿜어내며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사방이 빛으로 가득 차며 푸른빛이 온 산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