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0화. 신비한 소녀
1위가 누군지 묻는 말에 동수의 표정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호탕하다 못해 괴팍하게 느껴질 정도의 성품인 동수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 이었다.
동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생각하기조차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뭐, 한 달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거야. 생각도 하기 싫군. 만에 하나 대회에서 놈을 만난다면 기권하는 편을 권할게.”
“그래도 일단 최선을 다해봐야죠.”
하지만 자신의 충고에도 준이 태연한 표정을 짓자, 동수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충고했다.
“에휴…! 그래. 난 분명히 경고했어, 그 때 가서 날 원망하지 말라고. 진짜 괴물 같은 놈이니까.”
잠시 후 임동수가 방 밖으로 나가자, 준이 피식 웃으며 이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난 잠시 혁 장로님께 다녀올게.”
“약재 때문이에요? 그것 때문이라면 우선 비석의 약재 채집팀에게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예요. 생각보다 성과가 좋거든요. 어쩌면 오라버니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을지도 몰라요.”
“흐음…그래? 혹시 용의 얼음이라는 물건도 있어?”
듣도 보도 못한 약재의 이름에 이은이 멋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젓자, 준은 이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뒤 발걸음을 옮겨 건물 밖으로 향했다.
* * *
본원의 약재 보관소 주위에는 투왕 강자인 혁 장로를 비롯해 십여 명의 호위 무사들이 24시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심지어 일반적인 학생들은 약재 보관소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지만, 관리 책임자인 혁 장로가 허가해주었기 때문에 이준은 자유롭게 그곳에 드나들 수 있었다.
“허허, 오랜만이다. 잠깐 안 본 사이에 투령이 되었더구나. 게다가 백청까지 꺾었다면서?”
약재 창고에 들어서자, 혁 장로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준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춘 뒤 곧바로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다름이 아니라…연금비약 제조에 필요한 약재가 부족해서 왔습니다.”
“그래, 대신 본원의 규정에 따라 네가 필요한 약재 수준에 걸맞는 연금비약을 하나 제조해 본원에 넘겨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준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얼음’과 연금비약 하나를 교환하는 것 정도라면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쪽이 귀한 약재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만약 찾게 되면 나에게 와서 말하고 약재를 가져가면 된다. 그럼 내가 약재 수준에 맞춰 만들어야 할 연금비약을 알려주마.”
혁 장로는 그렇게 말하며 하얀 명패 하나를 준에게 건넸다. 명패에는 여러 가지 약초의 위치가 새겨져 있었다.
“자네에게 필요한 약재 하나만 가져가게. 절대로 다른 약재들에 손을 대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약재가 사라지면 내가 즉시 알 수 있게 되어있으니 혹시라도 딴 마음 품지 말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 * *
나무로 된 문을 열자, 반짝이는 빛으로 뒤덮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창고 내벽은 온통 백색의 옥으로 쌓였고, 바닥에는 작은 틈 하나 없이 백옥이 빼곡히 깔려 있었다.
백옥은 약재를 보관하기에 가장 좋은 물질이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창고 전체를 백옥으로 만드는데 상당한 비용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불꽃의 풀잎, 영혼의 꽃잎…차가운 피의 열매까지?”
가람 아카데미의 약재 창고에는 심지어 준이 이름조차 모르는 진귀한 약재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준은 순간 그 약재들을 모두 저장반지에 쓸어 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왜 혁 장로가 반드시 필요한 약재 하나만을 가져가야 한다고 당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약재 창고는 대략 예닐곱 개 정도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어느 구역으로 가도 연금술사라면 눈이 돌아갈 만한 약재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준은 홀린듯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겨 창고의 가장 끝 부분에 위치한 구역의 선반 앞에서 멈춰섰다.
백옥으로 된 쟁반 위에 놓인 손바닥만한 열매의 정확히 절반은 붉은색이었으며, 나머지 절반은 하얀색이었는데, 하얀 색으로 된 부분과 붉은 색으로 된 부분에서 서로 다른 온도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준이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 열매를 잡으려는 찰나, 희고 가느다란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잽싸게 쟁반 위의 열매를 낚아챘다.
꿈에도 그리던 열매를 빼앗긴 준은 순간 돌처럼 굳었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 그 새하얀 손의 주인을 찾았다.
백옥처럼 뽀얀 손의 주인공은 13~4살 정도로 보이는 한 소녀로, 허리까지 닿는 긴 생머리와 눈처럼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귀한 약재를 빼앗긴 이준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소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갑자기 다른 손에 들린 약재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안 돼! 뭐하는 짓이야!”
여자 아이의 이 행동에 준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소녀의 왼손에 들려있던 열매는 ‘금강열매’라는 이름의 약재로, 그 이름에 걸맞게 금강석처럼 단단해 화염으로 달구어도 쉬이 어찌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이번에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 하나 깜짝 않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어 열매를 베어 물었다.
그 가지런한 새하얀 치아가 몽땅 부러지는 모습이 머릿속에 스치자, 준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곧이어 날카로운 금속성이 창고 안에 울려 퍼지자, 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
그러나 소녀는 무쇠보다 단단한 금강열매를 사과라도 씹듯이 태연하게 씹어먹고 있었고, 껍질이 깨어진 금강열매에서는 방울방울 노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소녀는 넋을 잃고 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준을 빤히 쳐다보며 노란색 액체를 손으로 닦아내고는 곧바로 반대쪽 손에 들려있던 ‘용의 얼음’을 입으로 가져다댔다.
“안 돼! 뭐하는 거야 대체!”
준은 황급히 손을 뻗어 소녀의 손에서 약재를 낚아채려 했지만, ‘금강열매’를 쥐고 있던 손이 번개처럼 준의 손을 붙들었다.
“아악…!”
상상을 초월하는 소녀의 아귀힘에 준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실로 괴물 같은 힘이었다.
“너…대체 뭐야!”
가녀린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힘 앞에 준은 온 몸의 털이 거꾸로 곤두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저기…아가씨, 그건 맛이 없으니까 나에게 돌려주면 안 될까?”
“안 돼. 빨리 크려면 이게 필요해.”
“크는 데는 시간이 필요해. 약재를 먹는다고 갑자기 크는게 아니잖아!”
“시간은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여기 있는 약재들에 함부로 손을 대면 혁 장로가 가만있지 않을걸.”
“그 영감탱이? 난 겁나지 않아. 내가 이곳의 약재들을 먹은 걸 안다 해도 어쩌지 못할걸.”
장로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게다가 맨 이빨로 금강열매를 씹어 먹는 괴력의 소녀라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막무가내로 나오는 것을 보면 무언가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흥, 시끄러. 오늘은 이 몸이 기분이 좋으니까 그냥 보내줄게. 저리가!”
그러자 그녀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손을 휘휘 젓고는 다시 금강열매를 먹기 시작했다.
“더럽게도 먹기 힘들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의 얼음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준은 전략을 바꿔 다정한 말투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약재들…별로 맛없지?”
“별로인 게 아니라 역겨운 정도야.”
“그럼 그쪽 손에 있는 열매를 주면, 내가 대신 맛있는 걸 줄게.”
“그건 안 돼. 맛이 없긴 하지만 에너지는 많으니까.”
“아니면 내가 네가 먹으려는 약재들을 제련해서 맛있게 해 주는 건 어때? 생으로 먹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너, 연금술사야?”
마침내 소녀가 반응을 보이자, 준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응, 그래. 그러니까 용의 얼음만 나에게 주면 내가 그 약재들을 맛있는 걸로 만들어 줄게. 어때?”
준의 제안에 소녀는 약간 고민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아쉬운 표정으로 용의 얼음을 준에게 내밀었다.
“근데 네가 만든 연금비약이 맛이 없으면 그 열매를 다시 뺏을 거야. 그리고 너도 씹어 먹을 거야.”
“나를 먹는다고?”
참으로 해괴한 협박이었다. 씹어 먹겠다니…! 가한제국에서 온갖 협박이란 협박은 다 들어보았지만, ‘잡아 먹겠다’는 협박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소녀는 준이 약재를 저장반지에 넣자마자 곧바로 준을 재촉했다.
“이제 열매를 줬으니 빨리 약을 만들어줘.”
“잠시만 기다려줘. 왜 그렇게 급한 거야. 일단 혁 장로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고.”
“그 영감탱이한테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해?”
소녀는 짜증스럽다는 듯 툴툴거리며 금강열매를 손에 쥔 채 준의 뒤를 따랐다.
* * *
창고 안의 조용한 방 안으로 들어서자, 인기척을 느낀 혁 장로가 잔뜩 쌓인 서류더미들을 읽어 내려가며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이준이냐? 벌써 찾으려던 물건을 찾은 게냐?”
다음 순간,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혁 장로가 준의 곁에 있던 소녀를 발견하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넌 왜 또 여기에 온 게냐? 여기는 네 밥집이 아니야. 필요한 약재가 있으면 스스로 산에 가서 찾거라.”
“혼자 찾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서 그래요? 어차피 쌓아놓고 쓰지도 않을거면서! 흥, 약재들도 내 뱃속에 들어가는 편이 좋을걸요? 그런 곳에 앉아서 먼지나 뒤집어쓰는 것 보다야 백번 낫지!”
소녀는 혁장로의 핀잔에 기가 죽기는커녕 되려 큰 소리로 역정을 내더니 곧바로 준을 바라보며 명령하듯 말했다.
“그리고 너! 이제 이 영감탱이한테 보고 끝났지? 그러니까 빨리 약속 지켜!”
준은 당당한 것을 넘어 뻔뻔하기 짝이 없는 소녀의 행동에 헛웃음을 짓고는 살짝 눈치를 보며 혁 장로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장로님…근데 저 사람 도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안하무인이죠?”
“사람? 무슨 소릴 하는게냐? ‘저건’ 사람이 아니야.”
“네?”
“저건 마수야.”
인간으로 변화된 마수라는 말에 깜짝 놀란 준이 자신을 바라보자, 소녀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 무슨 구경거리라도 났어? 그만 쳐다보고 빨리 약이나 만들어. 안 그러면 정말로 약재 대신 널 씹어먹을 테니까.”
소녀의 협박에 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흔들어 약솥을 불러냈다. 그가 꺼내든 것은 지난번 한솔과의 연금술 대결에서 터진 약솥을 대신해 새로 구매한 약솥으로, 본래 그가 사용하던 것과 성능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곧이어 준의 손바닥에서 푸른 화염이 피어오르자, 소녀가 후다닥 달려와 자리를 잡았다. 대지의 불꽃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천지의 불꽃은 대다수의 마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천방지축 날뛰다가 얌전해진 소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다고 느낀 준은 피식 웃으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푸른 불꽃이 가득한 약솥에 금강 열매가 떨어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향긋한 냄새와 함께 진득한 액체가 약솥에 가득 찼다.
이런 작업은 단순히 약재를 녹여냈다가 먹기 좋은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에 불과했으니 그다지 힘이 들지도 않았고, 다른 연금비약을 만들 때처럼 큰 집중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