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3화. 난폭한 본능
……
“기다리거라. 어부지리가 가능한지 한 번 보자구나.”
“양쪽이 모두 다치길 기다리잔 말씀이신가요?”
스승의 제안에 준이 조금 난색을 표했다. 모르는 사이라면 괜찮았을 테지만 한율에게는 이미 몇 차례 도움을 받았으니, 그들이 다치길 기다리는 것이 영 찝찝했던 것이다.
“하하하. 네가 저 녀석들을 과대평가 한 것 같구나. 저 앞에 있는 하얀 하늘침팬지가 이제 막 성년기에 들어선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기 드문 상급 마수야. 몸안에 깃든 마수의 피가 각성한다면 5성 투왕도 줄행랑치기 바쁠 거란다. 그런데 지금 저 중에는 완전한 투왕 계급이 한 사람도 없지 않니. 이길 가능성이 없어. 최악의 경우 사상자가 나올 확률도 높다.”
‘네? 그럼 도와줘야 하는거 아니에요?’
쿠와악!
바로 그 때, 침팬지가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며 임수혁을 향해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그가 울음소리를 내자 임수혁을 비롯한 몇 사람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고, 그들의 속도가 느려진 틈을 타 하얀 하늘침팬지가 발을 굴러댔다.
투왕급 마수의 힘 앞에 대지가 진동하고, 이내 새하얀 빛줄기가 번쩍이며 백색의 마수가 엄호 앞에 나타나 기다란 두팔을 휘두르며 얼음을 흩뿌려댔다.
얼음 발톱이 노리는 것은 엄호의 심장 부근이었다. 놈은 탐색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단숨에 적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엄호는 상상 이상으로 민첩한 마수의 몸놀림에 화들짝 놀라 손에 든 망치를 휘둘렀다.
콰직!
다음 순간, 손톱과 망치가 맞서며 거대한 울림이 일어났다. 얼음조각이 사방으로 튀며 엄호가 뒤로 밀려났고 열 그루도 넘는 나무를 박살낸 끝에 거대한 바위에 쳐박혀 피를 토해냈다.
“하하. 좋아. 역시 힘 세기로 유명한 마수답군. 그렇지만 겨우 그 정도로 날 죽이려고 했다면 큰 오산이야.”
그러나 엄호는 무시무시한 마수의 힘 앞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듯 다시금 단단히 망치를 움켜잡았다.
마수의 선공을 신호로 임수혁을 비롯한 몇 사람의 공격이 이어졌다. 이준과 약로의 예상과 달리 그들은 투왕급 마수와도 제법 비등하게 겨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매서운 공격을 쏟아내도 투왕급 마수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는 역부족이었다.
양측의 전투는 시간이 갈수록 격정적으로 변해갔다.
산골짜기 입구 쪽에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던 거대한 바위들은 양측이 내뿜는 에너지에 이미 가루로 변한지 오래였고, 땅바닥은 거미줄처럼 수십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손에 든 푸른 장검을 휘두르며 가볍게 공중으로 떠오른 임수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네 사람의 협공을 뿌리치는 하얀 하늘침팬지를 바라봤다.
곧이어 그가 든 장검이 천천히 떨리더니 푸른 염력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흘러 나와 칼을 덮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장검의 크기가 열 배도 넘게 불어나며 바람을 갈랐다.
“엄호, 저 녀석을 붙잡아!”
공중에서 생성되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낀 엄호와 다른 사람들은 곧바로 임수혁이 그의 비장의 무기를 꺼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사방에서 마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얀 하늘침팬지가 임수혁이 염력을 끌어모으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하얀 하늘침팬지는 공중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힘 앞에 본능적으로 폭발적인 울음소리를 내뱉었고, 그 순간 한기가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자신을 포위한 적들이 한기를 견뎌내지 못 하고 뒤로 물러서자, 침팬지는 곧바로 발을 굴러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한기가 어린 바람에 둘러싸인 마수는 곧바로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임수혁의 머리를 노렸다. 만일 그대로 명중한다면 임수혁 같은 강자도 뇌가 터져 절명할 것이 분명했다.
그 때, 준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임수혁의 등 뒤에서 색깔이 연한 에너지 날개가 돋아 나와 민첩하게 하얀 하늘침팬지의 공격을 피한 것이다.
다음 순간, 곧바로 임수혁의 장검이 수 차례 진동하며 검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염력 날개? 저 녀석…… 투왕 계급에 들어섰단 말이야?’
임수혁의 등 뒤로 염력 날개가 펼쳐지는 순간, 이준은 물론 자리에 있던 학생들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와 친한 사이라 할 수 있는 엄호마저도 너무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몇 초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물론 엄호 역시 수혁과 마찬가지로 투령과 투왕 사이에 걸쳐있었지만, 그는 아직 그 벽을 완전히 넘어서진 못한 상태였고, 기껏해야 투령 최고 계급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일 뿐이었다.
반면 임수혁 같이 오롯이 본인의 힘으로 만들어낸 염력 날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몹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염력 날개는 염력 수련에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날개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대륙 어디에 가든 진정한 강자의 반열에 올랐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푸른 바람의 노래!”
그 때, 공중에서 날카로운 소리와 동시에 산골짜기에 광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한번 시작된 광풍은 주위의 바람을 모조리 빨아들이며 점점 더 강하게 몰아쳤고, 폭풍이 한 점에 모여드는 순간 거대한 염력이 그 바람을 찢으며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쉬익—
살벌한 원기를 실은 푸른 형상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백색의 마수를 향해 날아드는 찰나, 하얀 침팬지도 있는 힘껏 땅을 밟고 몸을 날려 수혁에게 맞섰다.
마수가 입을 쩍 벌린 채 낮은 울음소리를 내자, 동그란 에너지가 녀석의 입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며 거대한 얼음공이 형성됐다.
공중에서 백색의 얼음 공과 날카로운 푸른 검기가 맞부딪히며 거대한 폭발음과 희뿌연 연기를 만들어 냈고, 마수가 만들어낸 백색의 얼음 공은 곧 탄알처럼 날아가 바닥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그 순간, 둘의 격돌을 지켜보고 있던 엄호가 곧바로 망치를 움켜쥐고 몸을 날릴 태세를 갖췄다. 부상 당한 하얀 하늘침팬지가 틈을 타 도망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때, 공중에 떠 있던 푸른 형상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나뭇가지 위에 자리를 잡고는 바닥 깊숙이 쳐박힌 얼음 공을 바라봤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염력 날개의 형태와 색은 흐릿하게 변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반짝 하고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쳇……! 과연 투왕급 마수야. 이렇게 여러 명이서 덤비는 걸 다 막아낼 줄이야. 비술의 도움이 없었다면 답도 없었겠어.”
임수혁이 자신의 푸른 장검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는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 기력이 빠진 듯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보통 자신의 염력을 응집시켜 염력 날개를 만들 수 있는 경우에 투왕으로 인정해주며, 그렇게 만들어진 염력 날개로 일정시간 비행할 수 있다면 진정한 투왕 강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아닌 비술이나 무투기를 이용해 날개를 만드는 경우에는 진정한 투왕이라고 볼 수 없었다. 즉, 임수혁은 날개를 만들 수는 있었지만, 아직 진정한 투왕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비술?”
그의 말에 엄호를 비롯한 이들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있던 이들은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으니, 임수혁이 정말로 투왕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이 당연했다.
“임 선배, 전투는 다 끝난 거야?”
그 때, 전투 구역을 지켜보던 한율이 임수혁을 향해 묻자, 그는 말 없이 눈썹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봤다. 자신의 공격 강도로는 하얀 하늘침팬지를 조금 다치게 만들 수 있었지만 목숨까지 빼앗기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임수혁은 말 없이 손을 들어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낸 뒤 바로 손을 휘둘러 바람을 일으켰다.
곧이어 세찬 바람이 불어 자욱한 먼지를 날려버리자, 바닥을 수놓은 투명한 얼음꽃이 시야에 들어왔다.
“뭔가 이상해. 다들 조심해!”
임수혁의 외침에 다른 사람들은 즉시 염력을 끌어내 몸 주위를 단단히 감쌌다.
“조심하거라. 하얀 하늘침팬지의 기운이 급속도로 강해지고 있어. 놈의 흉악한 본능이 깨어난 듯 하구나.”
약로가 심각한 목소리로 조언하자, 숲 속에 숨어있던 준은 자신의 기척을 더욱 약하게 만든 채 조용히 얼음꽃이 피어난 구덩이를 바라봤다.
그 때, 투명하던 얼음 꽃에서 갑자기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옅은 분홍색에 가까웠던 붉은 광채는 서서히 진해져 어느 새 피처럼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이 광경에 임수혁을 비롯한 본원의 학생들은 마른 침을 집어삼키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쾅!
그리고 얼음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구덩이 붉은 섬광이 튀어나왔다. 새빨간 광채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순식간에 임수혁 앞에 이르자, 임수혁은 재빨리 뒤로 구르며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푸른 장검이 공중에서 춤을 추며 그물 같은 형태의 바람을 일으켰지만, 차가운 얼음 바람이 불어 닥쳐 그의 몸을 가격했다.
매서운 냉기에 임수혁이 피를 뿜으며 날아가자, 자리에 있던 본원의 학생들은 곧바로 다시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새빨갛게 변한 하늘 침팬지는 임수혁을 쫓지도, 다른 이들을 공격하지도 않은 채 나무 위에서 지하의 유액을 훔칠 기회를 노리고 있는 한율을 노려봤다.
“한율, 도망쳐!”
마수가 설정한 목표물이 누군지 알게 된 엄호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한율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하얀 냉기를 내뿜은 붉은 섬광은 거의 눈에 비치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고, 곧이어 살기 가득한 마수의 울음 소리가 대지를 가득 메웠다.
“크와아앙!”
마침내 새하얀 발톱이 한율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 그녀는 새파랗게 질려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파앗—
그 때, 숲 속에서 시커먼 형상 하나가 바람처럼 몸을 날려 한율을 낚아챘고, 이에 하늘 침팬지의 발톱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한율이 습격당하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던 엄호와 다른 학생들은 이 급작스런 전개에 눈을 비비며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 이었다.
고개를 돌려 검은 형상이 향한 방향을 바라보니, 왼편에 있는 나무 꼭대기위에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 하나가 한율을 안고 서 있었다.
“한율 선배님 괜찮으세요?”
“이……준?”
“어디 다친 데 없죠?”
“어, 어어……!”
한율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준의 등장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한 듯 말조차 잇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지금 준의 속도가 본원 내의 10대 강자와 비교해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는 점이었다.
한편, 준의 개입으로 인해 사냥감을 놓친 마수는 더욱 살의에 불타며 섬칫한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율 선배, 저 녀석 이제 보니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은데요…… 빨리 도망가는 게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준은 놈이 완전히 각성하게 되면 5성급 투왕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고 했던 스승의 말을 떠올리며 놈을 바라봤다. 확실히 지금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고 해도 놈을 물리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그래.”
한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의 말대로, 본원의 최강자들을 불러모아 부대를 편성했지만 이 팀으로도 분노한 하얀 하늘 침팬지를 잡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지하의 유액이 아깝기는 했지만, 가능성도 없는 물건에 손을 뻗다가 나란히 황천길을 가는 것 보다는 나았다.
그 때, 엄호의 신호에 따라 본원의 학생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그 중 한무리가 임수혁을 엄호하러 달려갔다. 나머지 한 무리가 향한 곳은 이준과 한율이 있는 나무 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