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번개 바람의 힘
두꺼운 먹구름이 겹겹이 쌓여 하늘을 가득 덮고, 간간히 거대한 은색 뱀을 연상케 하는 번개가 구름을 뚫고 바닥으로 내리쳤다.
폭풍이 몰아치는 통에 마수들도 선뜻 돌아다니지 못하고 동굴 안에 숨어버렸다.
하지만 은색 두루마리는 날씨가 거칠어 질수록 점점 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스승님 언제 시작하면 될까요?”
“지금이면 될 것 같구나. 조심해라. 번개 바람의 에너지는 천지의 불꽃만큼은 아니더라도 아주 위험한 힘이니 말이다.”
약로의 목소리가 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네.”
준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2격 무투기를 익히는 것은 과연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앉은 상태를 유지하고 두루마리를 펼쳐 다리 위에 올려놓거라. 번개바람의 힘이 절정에 달하면 굳이 끌어내지 않아도 이 안에 있는 힘이 자연스레 쏟아져 나올 거다. 그 때 망설이지 말고 빨리 몸속으로 흡수하거라.”
약로가 설명을 마치자, 준은 한 번 더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두 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두루마리 표면에 봉인 효과가 있는 특수 약물을 들이 부은 다음 종이를 찢는 순간,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내뿜어지며 빛 줄기가 나와 먹구름을 꿰뚫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기현상에 준은 깜짝 놀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빛 기둥은 몇 초 정도 유지되다가 먹구름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생각보다 빛기둥이 빨리 사라지자,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이곳은 흑각성 인근이니만큼 빛기둥이 오래 지속되어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수련을 방해 받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두루마리 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그림이 떠올랐다. 준은 약로의 명에 따라 천천히 숨을 들이마신 뒤 정신을 집중해 영혼의 힘을 몸 밖으로 쏟아냈다.
이준이 정신을 집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다시 번개가 내리쳤고, 두루마리 위의 은색 빛이 점점 더 강해졌다. 곧이어 두루마리가 스스로 공중으로 떠올라 이준의 가슴 앞에 머물렀다.
은빛이 점점 더 강해지자 아른거리던 그림이 점점 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신비한 그림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으로, 사람들의 발이 번개 모양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빛이 번쩍일 때 마다 그림은 살아있는 사람마냥 공중에서 움직였고, 사람 모양의 그림들은 점점 더 두루마리의 속박을 벗어나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림이 완전히 두루마리의 속박을 벗어나는 순간, 은빛의 사람 형상 하나가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고 준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영혼의 힘으로 붙잡아!”
당황한 준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사이, 약로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준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재빨리 자신의 영혼의 힘으로 그 그림을 붙잡았다.
“이제 수거하거라!”
준이 스승의 명에 따라 영혼의 힘을 다시 몸 속으로 집어넣자, 에너지로 이루어진 사람 형상이 자석처럼 그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힘의 수정과 염력 회오리가 미친 듯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준은 곧바로 푸른 불꽃을 불러내 혈관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은색의 에너지를 다 잡으려 애썼다.
강력한 힘을 가진 푸른 불꽃이 등장하자 마구잡이로 날뛰던 은색 에너지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고, 순식간에 준의 염력이 굶주린 맹수처럼 빠르게 은색 에너지를 뒤덮었다.
치지직—
푸른 불꽃과 마주한 은색 에너지는 위험에 빠진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이에 대항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은색 빛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일각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내에 은색 에너지는 푸른 화염과의 교전에서 완벽히 패배하고 말았다.
은색의 에너지는 곧이어 준의 염력을 따라 은색의 작은 고리형태로 변했고, 그 안에는 번개처럼 빛을 발하는 에너지가 깃들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번개바람의 힘이 푸른 화염에 의해 잦아들며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본체는 작은 뱀 모양의 번개로, 극히 가늘고 손가락 하나 굵기도 되지 않았다. 작은 전기 뱀이 이준의 몸 안에서 똬리를 틀자, 그것이 입을 벌릴 때마다 미약한 번개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게 번개바람의 힘이란 말이지. 역시 일반 에너지랑 다르군. 지능은 없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의 본능은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자연에서 만들어진 힘이다 보니 인공적으로 수련해낸 에너지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
준이 혼자서 중얼대며 새로운 힘에 대해 분석하자, 약로가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대지의 불꽃이 굉장하긴 하군요. 저 난폭한 전기 뱀을 이렇게 쉽게 잠재우다니.”
“하하, 그렇지. 저 녀석의 힘도 대단하지만, 대지의 불꽃에 비할 바는 못 되니까. 이제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면 되겠구나.”
* * *
깊은 산 속, 이준은 양반다리를 한 채 녹색 돌 위에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몸 주변으로는 실체를 가진 전기가 번쩍이고 있었다. 하늘을 가르던 번개는 이미 완전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대신 지금은 폭우가 쏟아지며 쏴아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거센 소리가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을 중심으로 반경 3미터 가량의 범위는 마치 여름처럼 메말라 있었다. 빗방울이 준이 뿜어내는 열기에 곧바로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폭우는 꼬박 하룻밤 동안 쏟아진 뒤에야 천천히 가늘어졌고,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먹구름이 걷히며 햇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날씨가 맑아지자 준의 몸에 있던 전광 역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준이 눈을 뜨는 순간, 그의 동공에 은빛 섬광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이준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가락 사이가 찌릿거리며 미세한 전깃불이 튀어 올랐다.
“성공한 걸까요?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요.”
손가락 사이에 생겨난 가느다란 전깃줄의 모습에 준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수련이 생각보다 너무 쉬웠기 때문인지, 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 다 네 녀석처럼 천지의 불꽃을 갖고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느냐?”
스승의 한마디에 준은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어댔다.
“어찌됐든 번개바람의 힘을 손에 넣었으니 번개의 춤도 수련할 수 있게 된거겠죠?”
“그렇고말고.”
순간 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은색 두루마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가 어느새 새하얀 백지로 변해 있었다. 안에 있던 그림은 물론, 겉 표면에 적혀 있던 ‘번개의 춤’이란 글자마저도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됐기는. 다 네 머릿속에 들어갔으니 계속 종이에 남아있을 리가 없지. 평정심을 유지하고 어젯밤에 보았던 그 그림을 잘 떠올려 보거라.”
약로의 설명에 따라 침착하게 살며시 눈을 감자, 검은 시야에 은색 지대가 펼쳐진 것 마냥 기이한 자세를 한 사람 형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니 인물들의 발쪽에는 항상 은색 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잠시 후, 눈앞에 나타났던 그림이 신속하게 하나로 뭉치며 글씨로 변했다.
‘몸은 번개가 되고 마음으로 그것을 다스릴 것.’
그 글귀를 보는 순간, 준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곧이어 그의 몸속에 자리하고 있던 번개 바람의 힘이 밖으로 새어나오며 준의 발을 휘감기 시작했다.
은빛 광채에 휩싸인 발을 움직이자, 오른발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천천히 떠오르면서 방금 전에 자신의 머릿속을 스쳤던 그림과 똑같은 자세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번쩍이는 발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삽시간에 뒤바뀌고, 그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산봉우리를 지나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으악!”
* * *
푸르른 늪지대 위로 떠 있던 흰 연기가 살랑이는 바람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다 공중에서 흩어지고, 이에 늪지대의 푸른색이 더욱 선연하게 떠올랐다.
치직!
평온하던 늪지대 위로 번개불이 튀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머지않아 검은 색의 사람 형상 하나가 늪지대를 가로 질러 사라졌다.
그 사람의 등 뒤로는 한 무더기의 검은 독사가 입을 쩍 벌리고 화살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검은 형상의 속도가 너무 빨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탕!
검은 형상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자 두 발이 살며시 구부러지며 몸이 기이한 모양으로 기울었고, 검은 형상은 곧바로 한줄기 빛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그가 공중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10초도 되지 않았지만, 실상 염력 날개나 다른 도구 없이 공중에 일시적으로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은 최소 투황 계급의 실력자 정도는 되어야 가능했으니,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너무 놀라 까무러칠지도 모를 일 이었다.
“하하, 좋다. 역시 2격 무투기는 다르군! 속도는 이렇게 내는 거구나!”
검은 형상은 나뭇가지 위에 서서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번개의 춤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단다. 번개의 반짝임, 번개의 순간, 번개의 춤. 가장 마지막 단계인 사천 번개의 경지까지 이른다면 소리 없이 공간을 뛰어 넘는 이동이 가능하단다. 그리고 그 속도는 투종도 무시 못 할 정도지. 하지만 지금 네 상태는 그냥 미친 망아지나 다름이 없구나. 아직 첫 걸음도 떼지 못한 게야.”
그 때, 약로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래를 한 번 보거라.”
약로의 말에 문득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니, 발바닥이 온통 진흙투성이였다.
“번개의 춤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소리 없이 빠르지. 너무 빨라 그 기세만으로도 적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을 정도란다. 하지만 지금 네 움직임은 소리가 너무 크다. 백 미터 바깥에 있는 사람들도 다 들을 수 있겠어.”
스승의 날카로운 지적에 이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음을 지었다.
“영혼의 힘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네가 할 만한 실수는 아니구나. 앞으로는 조금 더 힘을 집중시켜 더 빠른 속도를 구현해 내거라. 투왕 정도의 속도가 된다면 첫 단계에 들어선 거라 볼 수 있겠지.”
“네.”
준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나무 위에 자리를 잡았다.
* * *
그렇게 한 달 반,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제 검은 형상은 늪지대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 위를 평온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준은 뒷짐을 진채 늪 위를 평지처럼 걸어 다녔다.
그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면 누구든 입을 떡 벌리리라. 그리고 지금 준의 발밑에는 손바닥만 한 은색 빛 덩어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늪 위를 걷는 사이 때때로 검정 독사가 그를 덮쳐왔지만, 그 때 마다 매번 은색 불빛이 번쩍였고, 불빛이 반짝일 때 마다 독사들이 죽어나갔다.
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늪 위에 떠다니는 뱀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은 뒤 오른발을 살짝 들어 올려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의 발바닥이 늪에 닿자, 은색 빛이 순식간에 영역을 넓혔다가 다시 작아지며 평온하던 늪에 파도를 일으켰다.
준은 그 힘으로 순식간에 20미터 가량을 날 듯이 이동했다. 뒤를 돌아보자, 자신이 이동한 동선 위로 잔상이 남아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스스로도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설마…… 성공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