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황금불
한솔이 고개를 끄덕이자, 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두 사람 다 호기가 넘치는군요. 아주 맘에 들어요. 그리고 대결이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연금술의 대한 시각을 넓힐 수 있게 도와준 두 학생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조합표는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는 씩 웃으며 두 사람을 향해 두루마기를 흔들며 물었다.
“그럼, 누가 먼저 보시겠습니까?”
“한솔 선배 먼저 보시죠.”
“좋아, 사양하지 않지.”
이준이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선수를 양보하자, 한솔이 웃으며 혁 장로 손에 놓인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루마리를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고, 심지어 마지막에 가서는 눈에 띄게 일그러지기까지 했다.
한솔의 표정 변화에 광장을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이는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광장에 있던 윤영 역시 미간을 좁히며 옆에 있던 이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일단 지켜보자…”
이은 역시 불안한 눈빛으로 준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솔의 낯빛이 눈에 띄게 나빠지자, 준 역시 다소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4레벨 연금술사가 난색을 표할 정도라면 결코 만만치 않은 수준의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한솔이 영혼의 힘을 거두어 들이고 조합표를 혁 장로에게 건넸다.
“장로님께서 고르신 문제가 많이 어렵긴 합니다만 약속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젊은 사람이니 한계에 도전할 줄도 알아야지.”
혁 장로는 그렇게 말하며 조합표를 준에게 넘겼고, 처방전을 넘겨받은 이준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두루마리를 펼쳐 빠르게 읽어나갔다.
이준이 처방전을 들자 한솔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상대의 손에 들린 조합표는 4레벨 연금술사인 자신도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였으니, 이준은 볼 것도 없었다.
한솔은 입가에 냉소를 띤 채 준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준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을 뿐, 크게 곤란한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저 녀석도 보통내기는 아니군…이런 상황에서도 표정을 숨길 줄 알다니. 하지만 막상 제조에 들어가게 되면 밑천이 드러나겠지.’
한편 광장 한켠에서 이준의 표정을 살피던 이은의 얼굴에는 다소 안도한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 보니까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가 봐.”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이 관심이 집중된 속에서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준이 두루마리를 접으며 혁 장로를 바라봤다.
“장로님께서 저희를 너무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이 정도의 5레벨 연금비약은 5레벨 연금술사들도 제대로 못 만드는 경우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5레벨 연금비약이라고?”
이준의 입에서 나온 말에 관중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4레벨 연금술사가 5레벨 연금비약을 만든다면 실패 확률은 거의 칠, 팔 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5레벨 연금비약이 조금 어려운 건 사실이나 정 안 되는 일이라면 두 사람 다 실패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혁 장로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웃음을 짓자, 준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내민 조합표에 기록된 연금비약은 ‘용의 힘’이라는 이름을 가진 5레벨 연금비약으로, 이 연금비약을 복용한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막강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힘은 염력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순수한 육체적 힘을 끌어 올려주었다.
곧바로 실력을 올려주는 종류의 연금비약은 일반적인 5레벨 연금비약보다도 제조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준과 한솔 모두 혁 장로가 이 정도로 난이도 있는 주제를 들고 오리라고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기에 당혹감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혁 장로는 그런 두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하게 웃음을 짓다가 이내 두루마리를 펼쳐 ‘용의 힘’의 등급과 그 효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은 심사를 하러 온거야? 놀리려고 온 거야? 저 어린 녀석들에게 5레벨 연금비약 제조를 시키다니…’
관중 사이에서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장로들은 혀를 차며 혁 장로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총 세 묶음의 재료를 쓸 수 있습니다. 즉,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죠. 이 세 번의 기회 안에 먼저 제조를 끝낸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혁 장로의 말에 한솔이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만일 둘 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거죠?”
한솔이 물었다.
“그런 경우에는 실패작을 통해 실력을 겨루도록 합시다.”
혁 장로의 한마디에 한솔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아마도 연금비약을 만드는데 성공할 자신은 없지만, 실패하게 되더라도 이준보다는 자신의 것이 훨씬 나으리라는 자신은 있는 모양이었다.
“어때요? 두 사람 다 심사기준에는 동의하나요?”
“동의합니다.”
두 사람은 경기 규칙에 동의를 표한 뒤 곧바로 각자의 테이블로 이동했다.
두 사람이 모두 준비를 마친 것을 확인하자, 혁 장로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외쳤다.
“그럼 대결을 시작하겠네!”
혁 장로가 대결의 시작을 알리자, 광장 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준은 탁자 위에 놓은 자신의 약재를 훑어보며 빠진 재료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붉은 그의 약솥이 탁자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이 사용하는 약 솥은 사실 그리 고급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근 들어 사용 횟수가 많아지면서 약 솥 표면의 색깔이 조금 까맣게 변색되어 있었다.
“큭…”
이준이 약 솥을 꺼내들자, 한솔의 얼굴에는 이내 자신만만한 표정이 떠올랐다.
연금술사들 사이에서 어떤 약솥을 쓰느냐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 중 하나였다. 좋은 약솥일수록 제조 성공률을 높여주니, 같은 실력이라면 약솥이 좋은 쪽이 당연히 우세했다.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날 리가 없어 보이는 상대가 한 눈에 보기에도 허접해 보이는 낡은 약솥까지 꺼내들었으니, 한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솔은 속으로 승리를 확신하며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약솥을 꺼내들었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황금빛으로 빛나는 약 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꺼낸 금색 약솥은 햇빛을 받자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준의 것과 대조되게, 그의 약솥은 연금술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법한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은 상대가 무엇을 꺼내들든 관심이 없다는 듯 자신의 약솥에 집중할 뿐이었다.
사실 지금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상대가 무슨 약솥을 쓰느냐가 아니라, 언제까지 자신의 약솥이 천지의 불꽃이 가진 열기를 견뎌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대지의 불꽃이 너무 강력해서 이런 하급 약 솥은 열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네. 나중에 약 솥을 하나 장만해야겠어. 오늘까지만 버텨줬으면 좋겠다만…’
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반대편에서 뜨끈한 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한솔의 손에서 황금색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황금색의 약솥안에 금빛 불꽃이 피어오르자, 광장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이런…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연금술사일지도 모르겠는걸…’
한솔의 황금색 불꽃이 등장하자, 한번도 흐트러진적 없던 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상대가 그 정도로 귀한 불꽃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해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한솔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과 비할바는 못 되었지만, 얼핏 보기에도 하늘사자의 불꽃보다는 훨씬 뛰어난 물건이었다.
어찌됐든, 천지의 불꽃을 가진 준이 보기에 한솔이 다루는 불꽃이 엄청나게 희귀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학생들이 보기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신기한 모양이었다.
광장안의 학생들은 진귀한 물건을 보게 되었다는 듯 하나 같이 홀린 듯 한솔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불꽃은 ‘황금불’이라고 불리지. 7레벨 마수의 껍질을 깨고 얻은 물건이야. 이 황금불은 마수의 몸에 3일 정도만 잔류하다 사라지기 때문에 이걸 얻기 위해서는 그 3일 안에 바로 마수를 사냥해야 하거든.”
한솔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끼고는 자랑하듯 자신의 불꽃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7레벨 마수라고?”
한솔의 설명에 학생들의 표정이 더욱 크게 변화했다. ‘7레벨 마수’라는 말에 혁 장로조차도 미세하게 반응을 보였다. 7레벨은 투종 계급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마수였으니 그들이 놀라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 이었다.
‘어쩐지…하늘 사자보다 더 상급 마수의 불꽃이었군. 운 좋은 자식.’
놀란 것은 이준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천지의 불꽃이 있으니 불꽃에서는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잠시 후, 평정을 되찾은 준이 손을 움직이자 푸른색 불꽃이 피어오르며 약솥을 달구기 시작했다.
신비한 푸른색 불꽃이 등장하자, 이번에는 학생들의 시선이 준의 손끝으로 향했다.
많은 학생들이 ‘비석’의 우두머리인 신입생이 신비한 불꽃을 다룬다는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한솔에게 쏠렸던 관심이 준에게로 집중됐다.
준은 학생들이 자신을 바라보거나 말거나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채 조합표에서 보았던 약재들의 제련 방법과 혼합 비율을 복기했다.
이것저것 다 합치면 40여 가지의 약재를 제련하고 섞어야 했으니, 관객들의 반응 따위에 정신을 팔 여력이 없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오른 손을 움직여 불꽃을 조종하는 동시에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약재를 약솥 안으로 떨구었다.
치익.
하지만 준의 약 솥의 온도가 과도하게 올라간 탓에 액체 형태의 연금비약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고, 이준의 실책에 광장에서 안타까움 섞인 탄성이 새어나왔다.
한편, 상대가 실수를 한 것을 알아차린 한솔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솔의 다음 순간, 한솔의 황금빛 약솥안에 있던 약재가 새까맣게 타 딱딱하게 굳어버리자,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헉…”
그의 실패는 이준보다 더 처참했다. 이준은 스무 가지 재료를 넣은 상태에서 실패했지만 한솔은 겨우 여덟 개 째에서 실패를 하고 만 것이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한솔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그는 애써 차분한 표정을 유지한 채 몇 번인가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금 약재를 집어 약 솥 안으로 넣었다.
반면 준은 한솔의 행동에 관심조차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준은 요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할 뿐 이었다.
그 사이 한솔은 벌써 20종류에 가까운 약재를 약솥에 집어 넣고 있었다.
“역시 4레벨 연금술사는 무시할 수 없구나. 그런데 저 녀석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불과 5분 만에 준의 첫 시도보다 더 많은 약재를 제련한 한솔의 모습에 윤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조급해할 거 없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게다가 오라버니에게는 아직 두 번이나 기회가 남았는걸.”
점점 빨라지는 한솔의 연금술 속도에 장내에는 점점 더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과 달리 혁 장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연금술은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지.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이 더 중요해. 기세는 좋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