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7화. 한솔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백청이 애써 화를 누르며 동수에게 말을 건넸다.
“동수, 이건 우리 백의와 비석의 일이야. 네가…”
“내가 이 친구한테 빚진 게 있거든. 빚을 져놓고 이런 상황에서 나 몰라라 할 정도로 약아빠지지 못한 내 성질머리를 탓해야지 뭐.”
하지만 임동수는 백청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없는 듯 피식 웃으며 족히 어린 아이 크기는 됨직한 붉은 도끼를 꺼내들었다.
”너…”
동수의 단호한 태도에 백청은 잠시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다가 이내 말 꼬리를 흐렸다.
만일 임동수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기라도 하면 백 명도 넘는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당할 것이 뻔했다.
“이준, 배짱 하나는 두둑한 줄 알았더니, 이제보니 아주 여기저기 잘도 손바닥을 비비고 다녔나보군. 지난 번은 한율, 이번에는 동수…아주 재주가 각별해.”
백청은 곧바로 잔머리를 굴려 준을 도발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수가 끼어들어 그의 체면을 짓밟았다.
“하하하! 너 이 자식, 정말 창피한 줄 모르는 놈이군. 이놈들은 이제 본원에 들어온지 한 달도 안 된 햇병아리들이야. 그런 핏덩이들에게 깨진 것도 모자라서 손바닥 뒤집듯이 약속을 어겨놓고는, 신입생들이 만든 조직하고 전면전을 벌이다 나 하나 끼어들었다고 겁을 집어먹고 잔대가리를 굴려?”
바로 그 때, 인파를 꿰뚫고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역시 본원의 미친 도끼라 불리는 동수답군. 여기저기 안끼는데가 없구만.”
사람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연금술사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설렁설렁 광장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선두에 서 있던 한 사내가 거만한 표정으로 동수를 노려봤다.
“연금술사 연합 아니야? 왜 여기까지 왔지?”
“맨 앞에 있는 저 사람 설마 연금술사 연합의 수장인 한솔이야?”
“우와…비석에는 임동수 백의에는 한솔…장난이 아닌데?”
연금술사가 떼로 등장하자 파랗게 질려 있던 백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호오…약쟁이들까지…이거 그림이 좀 묘한데?”
한솔의 출현에 동수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한솔은 동수를 무시한 채 곧바로 이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하, 그쪽이 비석의 수장이자 세 가지 연금비약을 만든다는 이준이죠? 대단하군요. 실력이 대단한 신입생이라고 들었는데, 연금술까지 그런 경지에 올랐을 줄이야.”
한솔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준의 머릿속에 번뜩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약재 사재기와 동시에 시작된 백의의 행패, 그리고 양측이 대립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연금술사 협회…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운 점이 많았다.
“한솔 선배, 당신…처음부터 백청과 손을 잡고 우리 비석의 연금비약 판매를 방해한 거였나?”
이준의 날카로운 지적에 한솔의 눈썹이 꿈틀댔다.
“글쎄요…비석과 백의가 갈등을 빚은 것은 본원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고, 이제 저희와도 연금비약 판매건으로 얽힌게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백청과 백의에게 손을 들어주는게 이상한가요? 상상력이 너무 과하군요.”
그 때, 동수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네 놈처럼 계산 빠른 녀석이 갑자기 이런 곳에 조직원들을 데리고 나타날 리가 없지. 내가 보기에도 이준이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보기에도 처음부터 네가 백의를 시켜 비석을 건드리는 것 같거든.”
“하…임동수…천계의 탑에서 불독이 올라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더니, 아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한솔이 동수의 말을 일축하며 혀를 차자, 다시 준이 앞으로 나섰다.
“동수 형님, 이 일은 제게 맡기시죠.”
이준은 동수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인 뒤, 한솔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비석이 연금비약을 판매하게 되면 그쪽 수입이 끊길까봐 걱정하고 있는 걸 압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대응도 결국 임시방편 아니겠습니까? 제가 손이 있고 발이 있는 이상 계속 연금비약을 만들 수 있는데 말이죠. 누구 연금비약이 더 나은지, 판단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그래?”
준의 당돌한 말에 한솔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그러나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준의 입에서 뜻밖의 제안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제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비석에서는 더 이상 연금비약을 판매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제안? 무슨 제안?”
한솔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우리는 모두 연금술사이니 다른 사람들처럼 칼 빼 들고 주먹 써가면서 겨루는 것도 모양이 빠지죠. 그러니 연금술사에게 걸맞는 방식으로 겨뤄보는건 어떻겠습니까? 만일 제가 진다면 비석은 연금비약을 일절 판매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한솔 선배님이 패배하신다면 더 이상 비석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약속해주시지요.”
“나랑 연금술 대결을 해보자는 건가?”
이준의 제안에 한솔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이미 정식 인가를 받은 4레벨 연금술사로, 또래의 연금술사들에게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물론 무력을 이용해 싸우시는 걸 선호하신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지요.”
준은 끝으로 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이준의 전투력에 대해서는 이미 본원 전체에 소문이 파다했으니 한솔 입장에서야 몸으로 부딪혀서 득볼게 없었다.
“왜 그러시죠? 설마 연금술사 연합의 수장께서 이제 막 본원에 들어온 연금술사에게 밀릴까봐 내기를 피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한솔은 바보가 아니었다. 연금술사의 세계라는 것은 우연이나 수련법, 무투기, 실전 경험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투사와는 달리 누가 더 낫고 못한 것이 명확한 세계인 것이다.
이는 연금술사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준이 너무나도 당돌하게 내기를 제안하자, 한솔은 무언가 계책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동안 의심스러운 눈길로 준을 바라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하지만 내기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만일 네가 지면 비석은 연금비약 판매를 중지하고 지금 판매하고 있는 연금비약의 처방전을 넘겨라. 내가 진다면 네 판매를 막지 않을 뿐 아니라 본원 시장에서 가장 목 좋은 다섯 자리를 넘기지. 우리도 불의 힘을 800개나 주고 산 자리이니, 얼추 균형은 맞다고 생각하는데…어때?”
한솔의 역제안에 이번에는 준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허…그쪽에서 제가 가진 처방전을 탐낼지는 몰랐네요.”
“선택해. 할 거야, 말 거야?”
“좋습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대결을 하는 게 좋을까요?”
“같은 처방전을 갖고 동시에 솥을 꺼내 제조를 시작하지. 승부는 완성 된 연금비약의 품질을 놓고 결정한다. 어때?”
“좋습니다. 그런데 처방전은 누구 걸 쓰죠?”
“우리 두 사람 중 한 명 걸 사용한다면 상대가 의심할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 처방전은 본원에 저장된 걸 쓰자고. 마침 처방전 관리창고의 관리자인 혁 장로님과 안면이 있으니 부탁해보도록 하지. 이 참에 그분께 평가도 맡기고 말이야.”
“흠, 혁 장로님이요? 둘이 아는 사이 아닌가요?”
이준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자 한솔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동수를 바라봤다.
“의심할 필요 없어. 혁 장로님 성격은 네 옆에 있는 동수가 더 잘 알겠지. 본원에서 그분만큼 공정하신 분은 없으니까.”
한솔의 말에 동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혁 장로님은 부정행위를 혐오하신다. 그분이 심사를 맡는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지.”
“그럼…이따가 함께 그 혁 장로라는 분을 찾아가 부탁드리죠. 승부는 내일 북쪽 광장에서.”
* * *
모든 사람들이 광장을 떠나가자, 이준은 한솔과 함께 연금비약 처방전 관리창고로 향했다.
그들이 모든 상황을 혁 장로에게 설명하자. 혁 장로는 크게 기뻐하며 처방전을 내주었다. 본원에서 투사들의 싸움이 아닌 연금술 대결은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단, 혁 장로는 대결에서 사용될 연금비약의 처방전을 자신이 고르겠다고 제안했다. 이준과 한솔은 의외의 상황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오라버니, 그 한솔이라는 사람 꽤 실력이 있는 사람 같던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이은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맞아. 4레벨 연금술사니까 어딜 가든 투왕 계급 강자와 비슷한 대우를 받거든.”
동수 역시 이은과 같은 의견인 듯 했다.
”승산이 있는 거야?”
두 사람의 말에 윤영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나 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4레벨 연금술사라고 뭐 대단할 게 있어? 내일 재밌는 구경이나 해보자고.”
* * *
이른 새벽, 사람들의 기대 아래 해가 떠오르며 커다란 본원을 빛으로 가득 감싸 안았다.
본원은 동서남북의 사대광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매 광장마다 족히 천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 중 이준과 한솔의 대결이 펼쳐지는 곳은 북쪽에 있는 광장이었다.
평소에는 인적이 드물던 북쪽 광장은 해가 떠오르자마자 본원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그 사이에는 몰래 구경하러 온 장로들도 함께 섞여 있었다.
땡!
광장에서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자 시끄럽던 소음이 조금 줄어들었다.
“크흠!”
소란이 조금 잦아들자 혁 장로가 헛기침을 했고, 그 덕에 광장은 더욱 조용해졌다.
곧이어 연금술사 복장을 입은 한솔이 먼저 광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가슴에는 4레벨 연금술사를 상징하는 네 줄짜리 휘장이 달려 있었다.
그 뒤를 이어 검정 망토를 입은 청년이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광장 중앙으로 이동한 뒤 사람들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두 사람의 연금술사가 광장 위에서 꼿꼿한 자세로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는 검소한 옷차림의 혁 장로가 진지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혁 장로의 머리카락은 이미 하얗게 세어 있었지만, 눈빛에는 젊은 사람 못지않은 총기가 가득했다.
잠시 후 혁 장로가 저장반지에서 색이 노랗게 바랜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들며 입을 열었다.
“저도 한 때 연금술에 관심이 참 많았었죠. 하지만 연금술사가 되기 위한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 조용히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본원에서 보기 드문 연금술 시합의 진행과 심판을 맡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제가 심판을 맡게 되었으니, 판결의 공정성 여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장로의 말에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잇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학원 최고의 공정한 인물이니만큼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오늘의 대결 주제는 제가 직접 골랐습니다. 지금도 이준과 한솔, 두 사람 모두 무엇을 제조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죠.”
곧이어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에 든 두루마리를 펼쳐보였다.
“사실 이 주제는 두 분에게는 제법 어려울 수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이준과 한솔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고, 한솔이 먼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장로님께서 어떤 주제를 가져 오셨든간에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는 꽤나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일단 4레벨 연금술사였고, 5레벨 연금비약도 얼추 제조할 수 있었다.
다만 성공률이 조금 떨어지는 게 흠이었지만…높은 레벨의 연금비약을 제조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이준보다는 더 나으리란 확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