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5화. 대량 제조
일단 준이 결정을 내린 듯 하자, 이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비석에서도 연금비약을 판매하죠. 그런데…오라버니, 괜찮겠어요?”
“조직의 장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아니면 너희들 볼 낯도 없고.”
“흠…연금 비약을 팔 생각이라면 경기장 쪽으로 가는게 좋을거야. 다치는 놈들도 많고, 특히 지난번에 우리에게 준 ‘기력의 조각’인가 하는 물건은 아마 원하는 놈들이 줄을 설 것 같군.”
평소 말이 없던 오하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하는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의견을 제시했다.
“기력의 조각 말이지…그건 어려울 거 없지. 그런데 염력을 회복시켜주는 물건이라면 ‘연금술사 연합’이란 곳에서도 팔고 있지 않겠어?”
이준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준 연금비약에 비할게 못돼.”
오하늘이 단언하듯 말하자, 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천계의 탑 안에서 판매해보는 건 어떨까? 수련하는 사람 중에서 불의 독에 침식당할까봐 무서워서 오랜 수련을 꺼리는 사람들이 꽤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좋은 생각이네요.”
준의 새로운 제안에 이은을 비롯한 세 사람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이렇게 하자. 우선 내일부터 연금비약 제조에 필요한 재료들을 함께 구매하고, 그걸로 내가 연금비약을 만드는 걸로.”
* * *
다음날 아침, 비석의 모든 조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임무를 수행했다. 이은을 비롯한 세 사람은 이른 아침부터 각자 돌아다니며 이준이 적어준 약재들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렇게 온종일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자, 어느 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이준은 작은 누각의 조용한 방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조직원들이 구해 온 약재를 살펴보았다.
“수고했어.”
“이거 사느라 180일치 불의 힘을 썼어. 사실 우리 네 사람이 가진 걸로는 턱도 없었지만…다행히 다른 애들이 선뜻 나서서 자기 불의 힘을 내놓더라고. 무슨 말인지 알지?”
이윤영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 약재들은 비석의 운명을 가름하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걱정 마. 누가 얼마나 기부했는지 꼭 기록해놓고 연금비약을 성공적으로 판매하고 나면 두 배로 돌려주자.”
“네.”
이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가느다란 손으로 한 가득 쌓여 있는 약재를 만져보더니 또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약재가격도 만만치 않더라구요. 아예 약재를 채집하는 팀을 따로 만들어서 매달 보상을 주는게 낫지 않을까요?”
“그게 좋겠다.”
준이 짤막하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은이 다정한 말투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앞으로의 일은 오라버니에게 맡길게요. 사실 연금비약을 만드는건 도와주려해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걱정 마.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내가 생각보다 괜찮은 연금술사거든.”
준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시켜서 ‘연금술사 연합’에서 파는 연금 비약을 사봤어. 하나는 하늘이가 말했던 염력을 회복시켜주는 물건이야. 활기의 알약이라나 뭐라나…다른 하나는 상처를 치료하는데 쓰는 약이었고.”
윤영이 연금비약을 내밀며 말했다. 준은 곧바로 ‘활기의 알약’을 받아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연금술사 연합의 주력 상품 중 하나라는 그 물건은 초록빛을 띈 연금비약으로, 향이 아주 미약한 것으로 보아 1레벨 연금비약 정도에 불과했다.
“역시 경쟁 상대가 없으니 아주 대충대충 만드는 군.”
이준은 곧바로 치료제를 손에 들고 낱낱이 뜯어보았다. 치료제는 연고 형태의 연금비약으로, 어두운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준은 두 연금비약을 바닥에 둔 뒤 곧바로 약 솥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세 종류의 연금비약을 제조할 생각이었다. 첫 번째는 염력을 회복하는 ‘기력의 조각’이었다. 기력의 조각은 이미 수 십번도 넘게 만들어 본 물건이라 실패하는 것이 더 신기할 정도의 물건이었다.
두 번째는 상처 치유에 제격인 ‘회복의 알약’이었다. 이 물건은 몸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도 쓰였지만 외부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도 꽤나 쓸모가 있었고, 무엇보다, 약효도 등급도 ‘연금술사 모임’에서 내놓는 연고 형태 치유제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 약은 원가가 낮지만 효과가 뛰어나 이준은 바보가 아닌 이상 출시되는 즉시 불티나게 팔리리란 믿음이 있었다.
세 번째는 바로 ‘맑은 얼음약’이다. 이 연금비약은 복용 즉시 불의 독을 억제해주는 물건이었다.
맑은 얼음약은 2레벨 중에서도 최고 계급에 속하는 연금비약으로, 사실상 3레벨 연금비약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보조제는 여타 치유제보다 훨씬 값어치가 높았다.
사실상 마지막 연금비약이야말로 이준의 야심작이었다. 연금술사 협회에서는 불의 독성과 관련된 연금비약을 판매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이 약 솥에 불을 붙힌 뒤 손을 뻗어 약재들을 하나씩 투입하자, 푸른 불꽃이 순식간에 약재를 집어 삼켰다.
곧이어 그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불꽃이 춤을 추고, 향긋한 약내가 방안을 가득 메워나갔다.
* * *
“벌써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는데…. 왜 안 나오지?”
준이 방안에 들어간지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이윤영이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먼저 언급했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 우리 중에 연금술사가 있는 게 아니니 아무도 제조 과정을 모르잖아. 절대 방해하면 안돼…”
이은이 웃으며 말했지만, 윤영은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실패한다면 전재산을 날린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철커덕.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세 사람이 동시에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준이 피곤에 쩔어 시커매진 얼굴로 피식 웃음을 짓는 순간, 세 사람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준은 곧바로 세 사람 앞에 백 여개의 약병을 늘어놓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연금비약은 총 세 종류야. 기력의 조각 83알, 회복의 알약62알, 그리고 맑은 얼음약 36알. 총 181알이네.”
“그렇게나 많이 한 거야……?”
탁자위에 빼곡히 늘어선 연금비약을 보고 세 사람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판매는 너희들에게 맡길게. 나는 도저히 힘이 없어서 안 되겠어…”
이준은 그 말을 끝으로 기절하듯 의자에 쓰러졌다.
“오라버니…”
이은과 윤영은 판매 계획을 세운 뒤 이준에게로 돌아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불과 몇 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그는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었다.
이은은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는 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부드러운 담요 하나를 그에게 덮어주었다.
“푹 자고 있어요. 오라버니.”
* * *
이준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시간이 꽤나 지나 창문을 통해 붉은 노을이 스며들고 있었다.
준은 자신의 몸에 덮인 담요를 보자마자 피식 웃음을 지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 때, 방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누군가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대장. 엄청 잘 자네. 새벽부터 자기 시작해서 지금 벌써 밤이야.”
“하하, 하태준!”
살며시 고개를 들이밀고 인사하는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준은 반가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은이랑 애들은 아직 안 왔고?”
“헤헤, 응. 비석 사람들을 거의 다 데리고 나갔어. 시간 보니 이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정말 고맙다.”
준은 곁에 놓인 냉수를 들이킨 뒤 입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고맙긴 뭘. 우리가 한 식구가 된 것도 다 대장이 우리를 보호해주니까 가능한 거지. 겨우 이정도 일 하나 못하겠어?”
하태준은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으며 연심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믿고 뭉쳐준건데, 이 정도는 해야지. 연금비약을 판매하고 나서 불의 힘이 생기면 두 배로 보상해줄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 새 문 밖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애들이 돌아오나 봐!”
“오라버니, 일어났어요?”
첫 번째로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이은이었다.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이준에게로 다가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응. 일단 앉아서 좀 쉬어.”
준의 얼굴이 한결 밝아보이자, 이은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번졌다.
곧이어 들뜬 표정을 한 윤영과 하늘이 그들 곁에 모여 앉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자가 부족한 까닭에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 텅 비어있던 대청이 어느 새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어땠어?”
“엄청나요. 기력의 조각은 30알, 회복의 알약은 25알이 팔렸어요. 맑은 얼음약이란 연금비약은 그리 많이 나가진 않았어요. 14알 정도. 처음 판매를 시작하는 거니까 일단은 신용을 쌓는 게 중요할 것 같아서 기력의 조각이나 회복의 알약은 불의 힘 하나씩을 받고 판매했고, 맑은 얼음약은 불의 힘 3개로 팔았어요. 마지막에 다 계산해보니까 합해서 107일치 불의 힘을 벌어 들였더라구요. 벌써 우리가 처음 투자한 금액은 거의 다 회수했어요. 왜 사람들이 연금술사 연금술사 하는지 알겠더라구요.”
생각보다 괜찮은 판매 실적에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우리 비석이 처음 연금비약 판매를 시작하는 거고, 아직 신뢰를 쌓아야하니까 가격은 낮게 책정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런데 맑은 얼음약은 확실히 비싸네. 일반 학생들은 큰 마음 먹고 사야겠어.”
“원래 모든 사람들이 다 사가기를 기대하고 판매한 것도 아닌걸요… 맑은 얼음약을 사간 학생들은 대부분 실력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어요. 제 생각에는 하루 이틀 기다려보면 약효를 체험한 사람들이 줄줄이 찾아올 것 같아요. 어쩌면 입소문을 타고 더 많은 사람이 올지도 모르고요.”
“맞아. 내가 보기에도 그래.”
이윤영 역시 이은의 말에 동의하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여댔다. 준이 만든 연금비약이 입소문을 타면 앞으로 비석의 구성원들이 불의 힘이 부족해서 걱정하는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오라버니, 오늘 번 불의 힘은 일단 다시 약재들을 사는데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워낙 돌발적으로 행동해서 그런지 연금술사 연합에서도 아직 별 반응이 없지만, 행여나 그 사람들 눈에 띄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니까요.”
“그쪽에서 약재를 다 쓸어갈 까봐 걱정하는 거야?”
“어찌됐든 그쪽이 우리보다 뿌리가 튼튼하고, 판매 경력도 오래 됐으니까요. 그만큼 가진 것도 많지 않을까요? 그쪽에서 약재 공급 수단을 끊어버리면 저희도 손 쓸 도리가 없잖아요.”
이은의 생각대로였다. 꼭 무력 충돌이 아니더라도, 연금술사 연합이 비석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네…내일부터 모두 같이 나가서 우리가 필요한 약재들을 좀 모아줘.”
“응!”
앞으로의 계획이 대충 서자, 준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대청에서 쉬고 있는 비석의 구성원들을 바라봤다.
“다들 고맙습니다. 오늘 연금비약 판매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판매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뒤에 한 사람당 5일치의 불의 힘을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장 만세!”
이준의 풍성한 보상에 대청에 있던 비석 구성원들은 곧바로 박수를 쳐대며 환호성을 보냈다. 한 사람 당 5일의 불의 힘을 상으로 지급하기 위해서는 총 200일이 넘는 불의 힘이 필요했으니, 이 정도 규모의 보상은 사실상 본원에서 제법 유명한 세력이라도 선뜻 입에 올리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리고 하태준처럼 자신의 불의 힘을 기부한 사람들은 기부한 양의 두 배를 돌려주겠습니다.”
준이 하태준을 보며 웃음을 짓자, 하태준이 민망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모든 조직의 구성원들은 대장의 시원스러운 보상과 선뜻 조직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는 하태준의 모습을 보며 비석이라는 조직에 대해 자부심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