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류지안
문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비석의 구성원들은 모두 지난번에 보았을 때 보다 월등히 성장해 있었다.
“대장!”
“오오, 한 달 못 본 사이에 대장도 힘이 엄청나게 강해진 것 같은데? 우리 비석에도 이제 투령 강자가 생기겠어. 앞으로 누구 눈치 볼 일 없겠어.”
이준이 어깨를 토닥이고 지나가는 순간, 그들 역시 준의 성장 정도를 어렴풋이 짐작했는지 웃음을 지었다.
“이봐, 대장이 누구 눈치 본 적이나 있었어? 너희도 요즘 천계의 탑에 자주 드나드니까 대장의 영웅담 다 들었을 거 아니야? 헤헤. 4성 투령이 대장 앞에서 굴복했다던데? 본원에서 이 정도 실력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러게, 나도 들었어. 하하. 요새는 탑 안에서 수련할 때 우리가 비석이라는 걸 들으면 은근히 피하더라고. 다 대장 덕분이야!”
비석 멤버들의 칭찬에 준은 민망한 듯 고개를 한번 까딱하고는 곧바로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입생 구역안으로 들어서자, 준과 마주치는 비석의 구성원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으음…역시 적응이 안돼…’
준은 몇 번이나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열심히 걸음을 옮겨 이은이 기다리고 있는 누각으로 향했다.
마침내 이은과 다른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숙소에 도착하자, 은과 윤영, 그리고 오하늘이 대청에 앉아 그를 반겼다.
그리고 대청 위에는 또 하나, 얼마 전 준과 거래했던 ‘임동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준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껑충 뛰어올라 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씨, 이자식! 드디어 돌아왔군! 네가 준 물건들은 이미 다 떨어지고 없다고! 벌써 삼일 째 여기 죽치고 앉아서 널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가 버선발로 달려나와 자신의 소매를 붙잡자, 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성격이 급한건 불에 중독되서 그런게 아닌 것 같네요.”
준은 그렇게 말하며 임동수를 대충 뿌리치고는 대청으로 발걸음을 옮겨 곧바로 자리를 잡았다.
“어때? 별 일 없어? 백의 놈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지는 않고?”
“응. 백의 놈들 몇 몇이 근처까지 와서 껄떡대긴 했는데, 천계의 탑에서 네가 한 일 때문인지 요즘은 또 잠잠하던걸? 게다가 아직까지 어떤 세력에 속하지 않은 재학생들이 우리 비석에 가입하고 싶다고 찾아왔어. 우리끼리 심사숙고 해봤는데, 크게 문제를 일으킬만한 성격의 사람들도 아닌 것 같고, 실력도 좋으니 받아주려고 해. 대부분 대투사급이야.”
“정말?”
윤영의 대답에 준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사고를 쳤다고 생각했는데…의외의 결과네.”
“응. 맞아. 사고쳤어. 세원이라는 사람이 대장 이름만 나와도 이를 간다더군. 그리고 헤이라는 계집애 성질머리도 건드렸다지? 그 계집애도 문제지만, 그 계집애 사촌을 건드린건 정말 사고친거야.”
“류지안? 얼마나 강한데?”
윤영의 입에서 ‘류지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준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오하늘한테 물어봐. 저 녀석은 매일 같이 경기장에서 싸움박질만 하고 다니니까.”
윤영이 턱짓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오하늘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류지안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본원 전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야. 그 위로는 다들 비슷비슷해서 사실상 류지안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해. 감히 그 사람과 대적하겠다는 학생이 없어서 대결이 성립이 안될 정도라더군.”
그 때, 옆에서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동수가 끼어들었다.
“아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 자기 사촌 동생 챙길 정신같은건 없을테니까. 보름 후면 5년에 한 번 열리는 본원 대회가 있거든. 그것 때문에 요즘은 매일 천계의 탑에 틀어 박혀 있지. 가끔 밖으로 나오더라도 경기장에 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해. 적어도 대회가 끝날 때 까지는 별 일 없을거야. 뭐, 그 후에는…고민 좀 해봐야겠지만.”
“본원대회? 그런 대회가 있나요? 저는 처음 듣는데.”
‘본원대회’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한 듯, 준이 동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너랑은 상관 없는 일이니까. 그건 강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고수들이 벌이는 경기거든. 나머지는 관전자지. 당연히 몰랐을 수밖에. 그 대회에서 10위안에 들면 장로 후보자가 될 자격이 주어져. 게다가 천계의 탑 9층에서 심장불꽃의 근원을 단련을 할 기회도 얻을 수 있고 말이야. 아, 심장 불꽃의 근원이 뭔지도 모르겠군. 쉽게 말하면, 심장 불꽃의 근원을 단련하면 투왕 계급이 될 수 있다고 보면 돼.”
“투왕이요?”
‘투왕’이라는 단어에 윤영과 오하늘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장불꽃 근원?”
하지만 두 사람과 달리 이준은 다른 단어에 꽂혔다. 아무래도 그 ‘근원’이라는 것이 구름 불꽃의 본체를 의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9층은 어떻게 들어가죠?”
“꿈 깨. 일반 학생들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 9층과 10층이니까. 장로급은 되어야 입장 자격이 주어지는 곳이 바로 9층이야. 그래서 본원의 학생들이 졸업하고도 이 곳에 남는거지. 장로가 돼서 9층에 들어가려고. 그곳에 들어가면 투황이 되는것도 꿈이 아니니까.”
“투황이라…”
이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대회…강자 목록에 들어가야만 참가할 수 있는 거죠?”
“맞아. 너 설마 본원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이 장로 선출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동수가 어이가 없다는 듯 질문을 던지자, 준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갑자기 드러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장로, 장로라…’.
* * *
준은 방 안으로 들어가 동수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토끼처럼 새빨갛던 눈은 며칠 사이 상당히 안정을 찾은 듯 이제 어느 정도 흰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방 안에서 이준은 동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의 충혈되어 있던 눈이 이전보다 훨씬 건강한 흰색으로 돌아온 모양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얼음정령단과 눈꽃 세정액이 효과가 있는 것 같군요.”
“그래. 확실히 그런 것 같아. 매일 반식욕을 할 때마다 물이 조금씩 빨갛게 물들더군. 몸이 훨씬 가벼워진 느낌도 들고 말이야.”
동수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오랫동안 골머리를 썩히던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니 몹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대로 한 달만 더 지나면 완전히 해독 될 겁니다.”
이준은 빙그레 웃으며 저장반지에서 다시 얼음 정령단과 눈꽃 세정액을 각각 한 병씩 꺼냈다.
그러자 동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두 병의 연금비약을 낚아채고는 입이 찢어져라 웃어댔다. 아마도 준이 만들어준 연금비약의 효과를 몸소 체험하자 자신의 몸에 스며든 불의 독을 제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동수는 곧바로 손을 뒤집어 자신의 저장반지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들었다.
“이건…?”
그리고 준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물건을 상대에게 건네주었다. 이준은 그가 건넨 청나무 넝쿨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주시면 나중에 해독이 안됐을 때 어떻게 하시려고요?”
“푸하하, 됐어 됐어.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지. 이미 상당히 효과를 보고 있어. 만에 하나 완치가 안 된다 해도 신입생을 모아서 조직을 만들만큼 배짱이 있는 놈이 거짓말을 하고 달아나지는 않겠지. 이 정도라도 해준건 네가 처음이라고. 일단 이건 너에 대한 나의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둬.”
“하하…거참…그럼 감사합니다.”
준은 동수의 화끈한 언행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는 곧바로 청나무 넝쿨을 자신의 저장반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성격이 급한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이런 방식으로도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 했던 터라 기쁘면서도 다소 어안이 벙벙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 네가 꽤 마음에 들거든. 처음에야 서로 필요가 맞아떨어져서 만났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아주 화끈한 친구인 것 같아서 말이야.”
그는 신이 나서 연신 웃음을 지으며 계속 제 할 말을 해댔다.
“아, 그런 의미에서,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자네가 직접 오기 힘들면 자네 조직원 중 누굴 보내도 좋고. 그럼, 난 이만.”
동수는 그렇게 끝까지 제 할 말만을 한 뒤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하…참 성격 급한 사람이군. 하지만 첫인상과는 달리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준은 멀어지는 동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 다시 피식 웃음을 지었다.
……
“오라버니, 남은 불의 힘이 얼마나 되요?”
대청에 있던 이은이 손에 든 자신의 불의 힘 카드에 적힌 숫자를 보며 물었다.
“음…이제 30 조금 넘게 남은 것 같은데…4층으로 올라가면 열흘도 못 있겠어.”
이에 이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혹시 불의 힘이 필요해?”
이준이 질문을 던지자, 옆에 있던 이은 대신 답했다.
“우리 말고, 비석이 필요해서 말이야…”
“너도 알잖아. 비석에서 불의 힘을 상으로 주고 있는 거. 아무래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다 보니까 상으로 주어지는 불의 힘을 우리가 다 부담했었거든. 은이는 이제 거의 다 썼을 걸. 요즘 천계의 탑은 구경도 못하고 말이야. 난 지난번에 무투기 하나랑 바꾸는 바람에…오하늘은 경기장에서 계속 잃고 있고.”
윤영의 말에 오하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안하군…”
그들의 대화를 듣자, 이준은 죄책감이 들어 견딜 수 없었다. 명색이 조직의 장이라는 자가 자기의 수련에만 몰두하느라 동료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너무 많은 생각할 거 없어요. 오라버니는 비석 밖에서 활동 했고, 우리는 안에서 또 우리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오라버니가 밖에서 위상을 잘 세워준 덕분에 우리도 기반을 잘 다져갈 수 있었던걸요.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발전하기도 힘들었을거예요.”
그 때, 그런 이준의 마음을 꿰뚫어봤는지 이은이 가볍게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족한 불의 힘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불의 힘 사냥 대회에서 얻은 불의 힘을 거의 다 소진했으니 이제 다시 벌어 들여야겠군…본원에서는 어떻게 불의 힘을 얻을 수 있어?”
“최악의 방법은 청소. 그런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양도 적고, 수련에도 도움이 안돼. 다음 방법은 매달 본원에서 지급해주는 불의 힘을 기다리는 것. 다른 방법은 경기장에서 이기는 것. 그런데 이건 꽤 위험하지. 잘못하면 오하늘처럼 손해만 보게 되거든.”
윤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불의 힘을 얻을 다른 방법들을 주욱 나열했다.
“아니면 산에 들어가서 마수를 사냥하는 방법도 있어. 약재를 채집해서 파는 것도 있고.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본원내에서 보석이나 진귀한 보물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더라고. 넓어도 보통 넓은게 아니니까.”
준은 윤영의 설명을 가만히 듣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질문을 던졌다.
“혹시 본원에서 연금비약 같은 걸 파는건?”
“당연히 가능하지. 연금비약은 공법이나 무투기만큼이나 진귀한 물건이잖아.”
“오라버니, 혹시 연금비약을 팔 생각이에요?”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혹시 본원에서 연금 비약을 파는 사람도 있어?”
준의 제안에 이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긴 있어요. 단, 사람은 아니고, 한 세력이 팔고 있죠.”
“세력이라고?”
“연금술사 연합이요. 그 무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연금술 학과에 들어간 본원의 연금술사거든요.”
“이 연금술사 연합이 거의 본원 연금비약 판매량의 9할을 차지하고 있어. 다른 연금술사들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지어 거기 수장이 4레벨 연금비약까지 만든다더군. 문제는 우리도 연금비약을 팔면, 그쪽에서 가만히 있겠냐는 거지.”
이은의 설명에 윤영이 설명을 덧붙였다.
“흐음…하지만 우리도 먹고는 살아야지. 그쪽에서 어떻게 할지는 나중에 생각하면 될 일이고.”
4레벨 연금비약을 만드는 정도라면 세 줄짜리 푸른 정령의 비약도 만들 수 있는 준에게는 사실 그리 어려운 상대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