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0화. 청나무 넝쿨
준은 그런 이은의 반응을 보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탑에 있는 동안 ‘백의’ 놈들을 조심해. 아무리 봐도 6개월이라는 약속을 지킬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오라버니 걱정 말고 수련에 집중해요. 오라버니가 돌아왔을 때쯤이면 우리 ‘비석’의 동기들도 모두 강해져 있을 테니까요.”
이은이 이준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아 맞다. 혹시 본원에서 약재나 마정석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이은의 믿음직스러운 말에 이준은 비석에 대한 걱정을 덜고 바로 다음 문제로 화제를 바꿨다.
“본원 동쪽 지역으로 가면 교역 장터가 있다고 해요. 신기한 물건들을 많이 판다고 들었어요. 당연히 약재들도 있겠죠. 그런데 그 물건들은 본원 학생들이 직접 산에 들어가서 가져온 것들이라, 사고 싶으면 불 에너지를 내야해요.”
준은 이은의 설명을 듣자마자 교역 장터의 위치를 묻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세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기숙사를 나와 동쪽 지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 천계에 탑에 들어가게 된다면 꽤나 오랜 시간 그곳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해서는 준비물이 필요했다.
* * *
30분 가량을 걸어가자, 드넓은 광장이 보였다. 광장 안에는 수 많은 판매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로는 각양각색의 상품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판매대 근처로는 시끌벅적한 인파들이 끊이지 않았다.
커다란 교역장에 들어가자 주변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그는 빽빽하게 들어선 사람들 틈을 헤치고 들어가 판매되는 물품들을 살펴봤다. 그 곳에서 파는 물건들은 검은 성 같은 큰 성에 견주어도 손색 없을 정도였고, 심지어 검은 성의 여느 상점에서도 보기 드문 귀한 물건들도 꽤나 찾아볼 수 있었다.
준은 본원 학생들의 뛰어난 능력에 연신 감탄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약재를 찾아보았다.
오늘 그에게 필요한 물건은 고급 연금비약을 만들 때 쓰이는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견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대략 한 시간 정도 돌아다니자, 그가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 물건을 구매하는데는 총 30일 분량의 불의 힘이 필요했다.
카드에 나타나는 불 에너지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든 걸 보자, 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본래 백 일 정도의 분량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또 턱없이 부족한 듯 느껴졌다.
그러나 준이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약로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멈춰세웠다.
“준아! 앞에서 여덟 번째 점포에 한 번 가보거라.”
갑자기 울리는 약로의 목소리에 이준은 곧바로 몸을 돌려 스승이 말한 점ㅍ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회색 셔츠를 입은 남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도저히 물건을 팔러 온 사람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이 사람 보통이 아니야. 백청 따위와는 비교도 안돼. 분명 강자 순위에 이름을 올린 고수일거야.’
준은 자신의 영혼탐지능력으로 사내의 힘을 가늠해보았다. 사내는 여전히 관심조차 없다는 듯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판매대를 훑어보자 각각 다른 속성의 4레벨 마정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 정도의 마수라면 최하 투령 계급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마정석이 아니라 메마른 넝쿨이었다. 그 넝쿨은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여 마치 비취를 깎아 만든 조각품처럼 보였다.
그 위로는 자연이 만들어낸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구불구불한 모양이 초록색 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넝쿨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독특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스승님…이 식물이 뭐죠?’
한 눈에 보기에도 귀한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준의 식견으로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까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청나무 넝쿨이란다!”
약로가 웃으며 말했다.
“청나무 넝쿨이요?”
스승의 대답에 준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청나무 넝쿨은 ‘땅의 정령단’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준은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판매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준이 ‘청나무 넝쿨’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갑자기 서늘한 냉풍이 준의 팔을 스쳐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에 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푸른 불꽃을 품어 자신의 몸을 뒤덮었다.
준이 서둘러 손을 거두며 앞에 있는 사내를 응시하자, 그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빨간빛이 감돌고 밀었다. 이준은 그 빨간빛이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천계의 탑에서 오랜 시간 수련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통 불에 중독 됐다고 표현하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며칠 사이 눈이 약간 충혈된 사람을 몇 만나봤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처음이었다.
“안 살 거면 함부로 건들지 마시죠.”
사내가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이자, 준이 퉁명스레 답했다.
“누가 안 산답니까?”
“그럼 불의 힘을 꺼내시든지. 재잘재잘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는 갑자기 짜증을 내며 탁자를 쾅 내리쳤다.
‘불 중독이 이 정도로 심각하다니. 정신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군.’
갑작스레 분노를 터뜨리는 남자를 보며 준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아무리 대지의 불꽃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해도 천계의 탑에서는 마음을 놓아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넝쿨, 얼마죠?”
준은 특이한 모양의 초록색 넝쿨을 가리키며 담담히 물었다. 상대방이 그 물건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둔 것은 그도 그 물건이 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손쉽게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400개.”
회색 옷의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순간 주위에 정적이 흘렀다. 400개라면, 2년이나 3년 정도를 죽어라 모아야 가능한 숫자였다. 아무리 희귀한 물건이라 해도 400개는 너무 과했다.
“너무 비싼 것 같은데요?”
“솔직히 저도 이게 어디서 쓰는 물건인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투왕 계급의 마수 두 마리랑 목숨 걸고 싸워서 얻어낸 거니 그 값어치는 충분할거요. 목숨을 걸었으니 사백 일의 불 에너지라면 비싼 것도 아니요. 안 살 거면 가시죠. 장사 방해하지 말고.”
그는 이준을 흘깃 노려보며 말했다.
사내의 설명에 주변 사람들은 하나 같이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투왕급 마수 두 마리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아올 수 있다니. 실력은 둘째치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준 역시 여느 행인들과 다를 바 없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투왕 계급 마수 두 마리에게서 청나무 넝쿨을 얻어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 어쩌면 그 정도의 값을 받는 것도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른 물건으로 교환 가능한가요? 사백일치의 불의 힘을 지불할 만한 여유는 없습니다.”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청나무 넝쿨은 땅의 정령단을 만들기 위해 빠져선 안 될 주요재료였다. 즉, 이 물건을 손에 넣지 못하면, 구름 불꽃을 손에 넣는 것도 요원해지는 것 이다. 무엇보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 물건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가능합니다. 무투기가 필요하니 2격 무투기가 있으면 이 물건을 내어드리죠.”
이준의 제안에 상대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러나 주변에 있던 다른 학생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2격이라니, 해도 너무했다. 평생 한번 구경이나 할까말까한 물건을 내놓으라니, 정상적인 거래가 아니었다.
물론 이준에게는 2격 무투기가 있었다. 그러나 본인이 수련을 해야 했기 때문에 청나무 넝쿨을 위해 선뜻 꺼내기는 어려웠다.
“그것도 어렵겠는데요.”
회색 옷의 남자는 이준을 노려보고는 뭐라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성질머리하고는…’
하지만 준은 자리를 뜨지 않고 그 앞에 서있었다. 그렇게 1,2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자리에 앉아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염력을 뿜어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학우들이 재빨리 뒤로 몸을 피했다.
“저 녀석, 하필이면 임동수의 심기를 건드려서는…쯧쯧.”
다른 학생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냥 저 넝쿨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준은 침착한 말투로 상대를 진정시키려 했다.
“10초 줄 테니까 내 앞에서 꺼져.”
그러나 사내는 준의 그런 차분한 태도에 더욱 화가났는지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준을 노려봤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인해 가늘게 떨려오고 있었다.
“저는 400일치 불의 힘도, 2격 무투기도 없습니다……”
결국 준이 물러서지 않자, 사내는 토끼처럼 새빨개진 눈을 부릅뜬 채 더욱 거세게 염력을 폭발시켰다.
그 때, 준이 그의 빨간 동공을 직시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 몸에 있는 불 독을 제가 제거해줄 순 있죠.”
“뭐… 뭐라고?”
뜻밖의 제안에 빨간 눈을 한 사내의 태도가 급변했다. 사내는 곧바로 염력을 거두어들인 뒤 기대와 흥분이 가득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제가 불의 독성을 제거해줄 테니 그 나무 넝쿨을 제게 주는 건 어때요? 이런 식의 거래도 가능할까요?”
“당신을 어떻게 믿고? 내 몸에 있는 불의 독성은 여러 연금술과의 학생들도 절대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몸속에 있는 불의 독이 아주 깊이 침투되어 있군요. 이런 건 저도 처음 보기는 합니다.”
준은 일단 상대가 자신의 얘기를 들으려 하는 듯 하자 곧바로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지도 없지 않나요? 이미 불의 독으로 인해서 정신에도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이렇게 지내다간 곧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꼴이 될 겁니다.”
“당신이 뭐라고! 내 몸 속에 있는 독성을 해독할 정도의 실력자라면 내가 이름조차 못 들어봤을 리가 없잖아!”
화를 억누르며 존댓말을 사용하던 사내는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반말을 해댔다. 아마도 또 다시 불의 기운이 몸에 뻗치는 모양이었다.
“신입생, 이준입니다.”
이준은 웃으며 그를 향해 허리를 가볍게 굽혔다.
“이준? 비석의 우두머리라는 그 이준?”
이준이 이름을 공개하자 주변이 도리어 더 소란스러워졌다. 회색 옷의 남성도 처음엔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서서히 평정심을 되찾아갔다.
“후배였군. 불의 힘 쟁탈전에 참가하는 놈들은 대부분 쓰레기들이라 그놈들을 이긴 걸로는 명함도 못 내민다고! 설마 겨우 그딴 놈들을 쓰러뜨린 걸 네 실력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떠들어 대는거냐!”
그렇게 사내가 또 다시 이성을 잃어가자, 준은 말없이 손가락을 펴 그 끝에서 푸른 불꽃을 피워냈다.
“자, 보세요. 저는 대투사이지만 염력으로 이루어진 불꽃이 아니라 실재하는 불꽃을 불러낼 수 있습니다. 그래도 믿기 어려우시다면 제 연금술사 휘장이라도 보여드릴까요?”
신비로운 푸른 불꽃이 뿜어내는 예사롭지 않은 불꽃에 임동수는 다시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확실히 그는 매순간마다 이성을 잃고 폭발하려는 상태와 그것을 억누르려는 상태를 오가고 있었다.
“확실히 네 불꽃이 다른 연금술 학과 녀석들 것보다 조금 더 강한 것 같군. 좋아! 일단 네 말을 믿어보지. 하지만…독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이 물건을 주기는 조금 아깝단 말이야.”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또 다른 제안을 꺼냈다.
“이렇게 하지. 내 몸속 독을 완전히 제거해주고 백 일치 불의 힘을 보태준다면…”
준은 순간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