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태령황제의 옥
노인의 말에 이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설마 그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네.”
“운남종이 어떻게 그 사람들이랑 손을 잡을 수가 있죠? 아니, 그보다도 왜 그들이랑 엮이려고 하는 건가요?”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 다만, 왕래한 시간이 그리 오래 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 지난 운남종 종주, 그러니까 운산 때부터 왕래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 일은 운남종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겁니다. 제 생각에는 현재 운남종 종주인 진율희도 모르는 것 같더군요.”
“만일 그들이 정말 운남종과 손을 잡은 게 맞다면…이한 아저씨의 실종도 그 녀석들이랑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 쪽은 이씨 가문이 ‘그 물건’의 열쇠 중 일부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하지만, 나와 이씨 가문의 관계를 빤히 알면서도 움직이다니…심히 불쾌하군요.”
“맞습니다.”
세형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이씨 가문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지 않으셨습니까? 아가씨께서 열쇠를 얻어 가문으로 오지 않고 가람학원으로 오신 것에 대해 가문에서 말이 많습니다.”
노인의 말에 갑자기 이은의 눈에서 황금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괜찮습니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되요. 그보다, 오라버니에게는 아직 운남종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 알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적어도 운남종에 대적할 실력이 될 때까지는 비밀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아요. 일단 본원을 떠나세요. 여기에는 강자가 너무 많아요. 이미 눈치챈 자들도 많으니, 내일 당장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니까요.”
이은의 말에 따라 세형은 곧바로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푸른 하늘에는 어느 새 새하얀 반달이 떠있었다.
……
“오라버니!”
저 멀리서 한 소녀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준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소녀의 부름에 이준은 손에 꺼내놓고 만지작거렸던 옥 조각을 도로 넣으려고 했다. 그 순간, 준의 손에 들린 옥조각을 발견한 이은이 놀란 표정으로 그 물건을 가리켰다.
“오라버니, 이… 이거…태령황제의 옥 맞아?”
“태령황제의 옥?”
이은의 말에 준이 더 놀란 표정을 하며 그 옥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게 뭔지 알아?”
“오라버니, 이걸 어디서 받은거죠? 이게 무슨 물건인지 알고 있는거예요?”
“우리 가문이 터전을 옮길 때 장로님이 주신 거야. 나한테 보관하라고 하셨어.”
이은은 순간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매우 불안한 듯 준과 눈길조차 맞추지 않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야?”
그녀는 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은과 알고 지낸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준은 그 신비한 물건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물건임을 직감했다.
“오라버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이 물건을 보여줘서는 안돼요.”
이은이 이준의 손을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투기대륙에서 이 물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지만…오라버니 손에 이 물건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아는 순간, 전쟁이 벌어질 거예요…”
“태령황제의 옥이 무슨 물건인데? 이게 이씨 가문 가주의 징표가 아니라는거야?”
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토록 중요한 물건이라면 왜 가문의 장로나 가주조차 그 사실을 몰랐단 말인가.
“후…세월이 오래 지났으니, 어쩌면 이씨 가문에서도 이 물건의 진정한 가치를 모를 수도 있어요. 그러니 이런 물건을 가문의 보물이나 가주의 상징 정도로 생각하는 거겠죠. 아마도 지금 이씨 가문에서는 이한 어르신의 영혼을 안에 넣어두고 가주님의 생사를 파악하는 용도로 쓰고 있겠죠?”
이은의 추측대로였다. 현재 이씨 가문에서 이 신비한 돌을 활용하는 방식은 고작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물건의 가치가 그 정도일 리가 없었다.
고급 수련법이나 무투기, 연금비약에도 코웃음을 치는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이은이, 지금 이 작은 돌조각 하나에 전에 본 적 없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이다.
“대체 이 물건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 거야? 어쩌다가 우리 이씨 가문이 이런 물건을 갖게 된건데?”
이준은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보통 대단한 정도가 아니지…’
이은은 속으로 쓴 웃음을 지은 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지금 당장은 모든 것을 알려줄 수 없어요. 정말로…정말로 안돼요. 만일 오라버니가 절 믿는다면, 이번 한번만 제 부탁을 들어줘요. 절대로,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 물건을 보여줘선 안돼요. 이야기도 꺼내지 말아요.”
준은 미간을 좁히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이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목숨이나 안전보다 이준의 안위를 더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 옥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것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는 것도, 모두 준의 안위와 직결되는 문제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령황제의 옥을 품에 넣자, 이은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 보관해두세요…언젠가 오라버니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거예요.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물건에 대해 알려서는 안돼요. 그 순간 이 물건은 오라버니의 목숨을 위협하는 물건으로 바뀔 테니까요.”
이준은 살며시 끄덕이며 이은을 바라봤다. 다음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자, 이은이 다시 한번 간곡한 표정으로 준의 손을 붙잡았다.
“오라버니, 이 물건에 대해 숨기는 게 너무 많지만, 날 믿어줘야 해요. 절대 오라버니한테 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준은 너무나도 간절한 상대의 눈빛을 보고는 왠지 마음 한켠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알았어. 대신, 언젠간 내게 모든 걸 말해줘야해.”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휴. 됐어. 임무 같은 건 신경쓰지 말자. 우리 가문 사람들도 어차피 이게 오라버니 손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거야….’
* * *
준은 방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영혼 에너지를 끌어내 까만 반지를 두드렸다.
잠시 후, 빛 한 줄기가 반지에서부터 발산 되며 익숙한 형상이 이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님…”
약로의 형상을 보고 이준은 입을 움직여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약로는 곧장 손을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태령황제의 옥에 대해 물어보고자 하는게지? 그렇지만 나도 모호하게 전해 들었을 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란다.”
약로조차 한 번도 본적이 없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준은 그 물건의 내막이 더욱 더 궁금해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스승님께서는 이게 무슨 물건인지 알고 계신건가요?”
“내가 지금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이 태령황제의 옥이 천년 전의 태령황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뿐이구나….”
“태령황제요? 사람인가요?”
“신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지.”
약로의 말투에는 일찍이 볼 수 없는 일종의 경외감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기대륙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을 리가 없었다.
“설마, 그 사람… 투제인가요?”
“그래…투성 강자도 투기 대륙 전체에서 손에 꼽는 존재들이다. 비록 투제와는 한 계급 차이지만, 쉽게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어 세상을 뒤흔들만한 재능을 갖고 있는 자들도 감히 꿈꾸지 못 하는 단계이지.
그리고 이 대륙에는 아직 두 번째 투제가 등장하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단다… 그러니 지금까지는 그가 유일한 투제라고 할 수 있지. 네가 갖고 있는 태령황제의 옥이라는 것이, 아마도 전설 속 그분이 남긴 유물이 아닐까 싶구나.
하지만 그 물건의 정확한 용도도 모르고…모양을 보니 어떤 유물의 작은 한 부분인 것 같구나. 그러나 주인의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이 손에 넣기 위해 눈에 불을 키고 달려 들 이유가 충분하지.
적어도 그 꼬마 계집이 다른 사람 앞에서 아무에게도 그 물건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말할만한 물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약로의 표정 역시 이은 못지 않게 진지하고 어두웠다. 가한제국의 작은 가문에 불과한 이씨 가문에게 태령황제의 옥이 있다는 것은, 그 대단한 약로라 해도 상상조차 못한 일인 듯 했다.
“그냥 너도 그 물건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라.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 물건에 대해 발설하지 말고… 언젠가는 그 옥이 네게 도움을 주겠지. 일단은 수련이다. 중요한 물건이 손에 있으니 더욱 더 강해져야지. 내일부터 천계의 탑에 들어가서 지내거라. 최대한 빨리 투령 계급이 되어 구름 불꽃을 손에 넣자꾸나.”
약로가 웃음을 짓자, 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투황도, 투종도 아니고 무려 투제였다.
투존이나 투종도 꿈처럼 느껴지는 그에게 투제는 너무 현실감이 없어 되려 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약로의 말대로 였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우선 투령이 되어 구름 불꽃을 손에 넣고, 그 힘을 빌어 수련에 몰두하는 것뿐이었다.
* * *
다음 날, 방에서 나온 준은 대청에서 윤영과 하늘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제 막 숙소로 돌아온 듯 했다.
윤영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오하늘의 몰골은 가히 가관이었다. 그의 얼굴 곳곳은 새파랗게 멍들어 있었고, 온 몸 구석구석에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만족한 기색이 가득했으니, 아마도 가혹한 전투 속에서 무언가 큰 수확을 거둔 듯 보였다.
“이준, 승급한 거야?”
이윤영은 준과 마주하자마자 곧바로 상대가 승급했음을 알아차렸다.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대청 가운데에 앉아 오하늘에게 물었다.
“경기장은 어땠어?”
“강자가 많더군. 진짜배기들이야. 4일 동안 3승 5패. 불의 힘을 20개나 잃었지.”
“그래?”
오하늘의 말에 준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하늘 정도의 강자가 3승 5패라니, 생각보다도 훨씬 수준이 높았다.
오하늘이 떡 하나를 입에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난 천계의 탑보다 그쪽이 좋다.”
과묵한 오하늘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천계의 탑보다 그쪽이 자신에게 맞고,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고, 또 즐거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아무튼, 그는 천계의 탑보다는 경기장에 자주 모습을 비출 것 같았다.
이준이 웃으며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이은이 걸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침 다 모였으니 얘기를 시작할게. 나는 천계에 탑에 들어가서 한 동안 나오지 않을 생각이야. 비석 운영에 관련된 일들은 세 사람한테 좀 맡기도록 할게.”
“나오지 않는다고?”
세 사람은 이준의 갑작스런 선언에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놀란 것은, 역시나 이은이었다.
“얼마나 있을 생각인데요?”
“8성은 되어야 나올 것 같아.”
“뭐? 이제 겨우 7성을 돌파했잖아. 그런데 8성? 천계의 탑이 아무리 큰 도움을 준다 해도 단시간 안에는 불가능하지 않아?”
이윤영은 고개를 저으며 준을 말리려했다.
“1, 2층에서는 속도를 내기 힘들 수 있지. 하지만 우린 청색 불 에너지카드를 갖고 있잖아? 이 카드만 있으면 우린 5층, 심지어 6층까지도 내려갈 수 있으니까.”
그러자 오하늘이 눈을 크게 치켜뜨며 말했다.
“욕심이 과하군. 무리야.”
하지만 이은만은 생각이 달랐다.
“걱정 마. 오라버니는 분명 가능할 거야. 오라버니가 매번 기대 이상의 일들을 해내는 걸 다들 충분히 보지 않았어?”
그녀는 이준이 충분한 계산과 확신 없이 일을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으니, 다른 두 사람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