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8화. 변화
준은 네 사람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애써 무시한채 자신의 초록색 불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카드의 숫자는 139였다.
‘139? 왜?’
그는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저도 모르게 선배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수련을 한 건가요?”
“나흘이요.”
“아아, 그렇게 오래 됐구나. 어쩐지……”
선배 중 하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흘이라고 답하자, 준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나 시간이 지났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민망함과 놀람은 금세 기쁨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4일 만에 7성 대투사라니! 본원 밖에서라면 꿈도 못 꿀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순간 준의 머릿속에 구름 불꽃의 본체를 손에 넣는다면 얼마나 빨리 성장하게 될지 궁금증이 일었다.
* * *
밖으로 나오자, 따뜻한 햇살이 부서지듯 쏟아져 내렸다. 햇살이 기분 좋게 뺨을 간지럽히자, 준은 그 자리에 가만히 누운 채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5일이나 탑 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으니, 열기가 없는 바깥세상의 시원한 공기가 몸 안을 훑어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흐음…아무리 불에 대한 면역력이 있다고 해도 탑 안에 너무 오래 있으면 좋지 않겠어…’
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비석의 멤버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4일이나 안에 있었는데…그 동안 은이랑 이윤영은 어떻게 하고 있었으려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나자, 신입생 기숙사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다행히도 기숙사 주위에서는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준은 그제서야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걸음을 늦췄다.
하지만 여유로운 걸음으로 기숙사로 향하는 준의 시야에 네 개의 인영이 들어오는 순간, 그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혔다. 네 사람은 모두 연한 녹색 바탕에 검은색 문양이 새겨진 휘장을 달고 있었다.
‘저 녀석들은 또 어디 놈들이지? 설마 또 우리를 건드리려고 찾아온 건가?’
준은 바짝 날이선 채로 검은 송곳을 향해 손을 옮겼다. 요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재학생들이 신입생들을 찾아오고 있었다.
“대장, 드디어 왔구나!”
그 때, 네 사람이 이준을 향해 뒤를 돌아보며 미소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준은 순간 동작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던 네 사람을 바라봤다. 몇 초 후에야 이준은 무언가 깨달은 듯 물었다.
“너희…비석 사람들이야?”
“하하. 응.”
네 사람 중 한 청년이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은이 우리만의 휘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서 만들었어. 그래야 우리도 소속감이 생긴다고 하면서 말이야.”
준은 안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검은 송곳의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방금 전까지 임전태세였던 터라, 손에는 약간의 식은 땀이 남아 있었다.
“은이가… 그랬군….”
그는 피식 미소를 지은 뒤 네 사람을 향해 물었다.
“은이는 안에 있지?”
“응. 안에 있어. 우리도 순찰대가 필요할 것 같아서 네 사람이 한 조로 돌아가면서 숙소를 지키기로 했거든. 게다가 돌발상황이 일어날 걸 대비해서 안에는 열 명이 대기하고 있어. 다른 애들은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어.”
청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준이 묻기도 전에 지난 며칠간의 변화들을 줄줄이 읊어 주었다.
준은 그의 말을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불과 5일 사이, 비석은 제법 조직다운 모양새를 갖추는데 성공한 듯 했다. 자신이었다면 아마 이 정도로 꼼꼼하게 신경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헤헤. 대장, 이제 들어가봐. 우린 아직 임무가 남아서 말이지. 보초를 3일 설 때마다 이은에게서 불의 힘을 하나씩 받기로 했거든. 공짜로 하는 것도 아니니 확실히 해야지.”
‘보초 임무에 대한 보상까지 생각했단 말이지…대단한데?’
그는 속으로 이은의 철저한 일처리에 감탄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은 철웅이야. 혹시 나중에 내가 도울 일이 생기면 언제든 불러줘. 우리 비석의 형제들이 모두 힘이 되어줄 테니까.”
이준이 이름을 물어보자 청년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하. 든든한걸. 좋아. 그럼 잘 부탁할게.”
준은 가볍게 손을 흔든 뒤 누각의 대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피자,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아름다운 뒷모습이 보였다.
준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 한켠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라버니?”
그렇게 조용히 이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얼마 뒤 소녀가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달려왔다.
“제법이던걸? 나 없는 사이에 뭐가 많이 바뀌었더라고. 아주 잘했어.”
만나자마자 준이 자신을 칭찬하자, 이은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아니에요. 중요한 일은 윤영 언니가 거의 다 한걸요.”
“너희 둘이 있어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비석이고 뭐고 제대로 관리도 안 됐을 걸. 나나 오하늘이나 둘 다 머리 빈 싸움꾼이지 이런 쪽으로는 영 재주가 없으니까.”
준은 다정한 표정으로 이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은 뒤 주위를 둘러보고는 나머지 둘의 안부를 물었다. 벌써 5일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확인할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아 맞다. 이윤영이랑 오하늘은?”
“언니는 본원 무투기실에 갔어요. 언니한테 맞는 상급 무투기를 좀 찾아보겠다고 했어요. 오하늘은 경기장에 갔구요. 벌써 이틀 째 안 돌아오고 있긴 한데, 걱정할 건 없어요. 비석의 다른 일원들이 계속 상황 보고를 해주니까.”
잠시 후, 이은이 갑자기 준의 손을 잡아끌고는 방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그래?”
“사실 보여줄 사람이 있어.”
이은은 해맑게 웃으며 준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깜깜하던 방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리고 방이 밝아지는 순간, 낯익은 얼굴의 노인 하나가 웃음을 지으며 준과 눈을 마주쳤다.
“하하, 잘 지냈는가……”
“당, 당신은…?”
* * *
방안에서 준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운남종에서 자신을 구해준 의문의 강자 ‘세형’이었다.
그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굳어버린 준을 보고 온화한 웃음을 지은 뒤 이은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아가씨, 오셨군요.”
정신이 돌아온 이준은 세형이 이은을 부르는 호칭에 더욱 놀라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둘이 어떻게…?”
“하하. 이준 도련님께서 은빛성을 떠난 지 반년쯤 되었을 때, 아가씨께서 절 가한제국으로 보내 도련님의 종적을 찾아 암암리에 보호해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세형은 그렇게 말한 뒤 혹여나 준이 이은을 나무랄까 염려되었는지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행여나 아가씨가 마음대로 간섭했다고 화내시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시에는 아직 도련님께서 미약하셨으니, 아가씨께서 걱정이 앞서셨던 모양입니다. 본디 저는 아가씨를 지켜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만 아가씨께서 워낙 강경하게 요구하셔서 말이죠. 가문 분들께서 아신다면 경을 치실 일이지요. 허허허…”
준은 노인의 말을 듣자마자 그 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본인의 경호를 맡은 사람을 가문과의 합의 없이 비밀리에 떼어놓는다는 것은, 곧 이은 자신이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은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발언이었다.
‘머리가 좋으신 분이군…’
그리고 세형의 의도대로, 준은 화를 내지 않고 피식 웃으며 이은을 바라봤다.
“이 아가씨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봤자지.”
준이 자신을 크게 원망하는 것 같지 않자, 이은은 비로소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아, 지난번에는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었으니 뭐라도 보답을 해드리고 싶은데, 세형 선배님을 만족시킬만한 보물을 가지고 있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언젠가 꼭 이 은혜를 갚도록 하지요.”
“하하하.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제가 맡은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죠.”
세형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사실 이렇게 자리를 만든 이유가 있어요. 사실 세형에게 우리 가문 강자들의 동정을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했었거든요. 하지만 가문의 투황 급 강자들 중에는 가한 제국에 발을 들인 사람이 없대요.”
이은의 말에 준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그늘이 드리웠다. 이은의 가문과 관련이 없다면 대체 누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단 말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씨 가문과 연이 닿아있는 투황급 강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도련님, 단언컨대, 아버님의 실종사건은 저희와는 무관합니다. 아주 오래전 이씨 가문과 우리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긴 했지만… 불미스러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불미스러운 일을 빌미로 이씨 가문을 치자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자는 소수였고, 가문의 결정은 이씨 가문에게 손을 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장로회에서 결정된 사안은 그야말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집니다. 저희 가문에서 그 결정을 무시하고 단독으로 누군가가 일을 벌였을 리는 없습니다. 있다 해도 투황급 강자나 그 이상의 강자라면 은밀히 행동해 가한제국까지 가는 것은 불가합니다. 모든 투황급 이상의 강자들은 그 일거수일투족을 가문에 보고하도록 되어있으니까요.”
세형의 논리정연한 답변에 준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후…이상하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희 가문은 가한제국내에서도 이류 가문 축에 간신히 낄 정도니까요. 그런데 투황급 강자가 개입하다니…그나마 걸리는게 운남종인데, 정작 운남종에서도 행방을 모르니…”
이한은 운남종 대장로에게 쫓기는 와중에 실종 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실종 된 것인지, 누군가가 납치해간 건지,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턱이 없었다.
게다가 그 마지막 목격자가 이미 사망했으니, 이한의 행적은 완전히 미궁 속에 빠지고 만 것이다.
“휴우……”
이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됐든 아버지가 실종된 일은 운남종과 관련이 있으리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가한제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허나 자신은 운남종에 의해 쫓기는 신세였고, 지금 실력으로는 감히 운남종과 대적할 수 없었다. 결국 이준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조용히 수련을 하고, 구름 불꽃을 손에 넣는 것 뿐 이었다.
“운남종…”
세형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불쾌하다는 듯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 때, 이은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내가 사람들을 시켜 운남종을 감시하도록 할게요.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우선은 수련. 알고 있죠?”
이은의 말대로였다. 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는 세형과 몇 마디 정도 더 이야기를 나눈 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홀로 방을 나섰다.
준이 저 멀리 사라지자, 이은은 혹여나 누가 들을까 싶어 문은 물론이고 창문까지 꼼꼼히 닫고 주위를 살핀 뒤 세형 앞에 앉았다.
“운남종에 대해서 뭔가 새로운 정보가 있나요?”
세형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번에 돌아가서 운남종에 관련된 정보를 좀 알아보던 와중에 몰랐던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뭐죠?”
“가한제국에서 항상 숨어 지내던 그 세력과 비밀리에 왕래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녀석들?”
노인의 말에 이은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