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225화 (225/818)

제225화. 인사

등불이 켜진 방 안에서는 약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방 안에는 어두운 표정의 청년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서 있고, 어떤 이는 앉아있기도 했지만, 하나 같이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대장, 이대로는 안 된다고. 신입생들에게 당하다니,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이대로는 본원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닌다고.”

“맞아, 대장. 주빈 형을 봐서라도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잖아.”

한 사내의 말을 시작으로 방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입을 열어 불만을 표시했다.

사람들에게 ‘대장’이라고 불리던 남자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조용히 턱 끝을 매만졌다. 외모는 백성찬과 조금 비슷한 듯했지만 한결 성숙하고 차가운 이미지였다.

“방주빈, 몸은 어때.”

대장이 입을 열자 주변의 잡음이 모두 사그라 들며 온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그렇게 큰 부상은 아니야. 그래도 4, 5일 정도는 지나야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준이란 녀석 대체 실력이 어느 정도야?”

백청은 싸늘한 말투로 주빈에게 질문을 던졌다.

“본인 실력은 5성이나 6성 대투사 정도. 하지만 비술을 하나 익히고 있는 것 같아. 비술을 사용했을 때는 2~3성 투령급이야. 그것보다 문제는 놈이 사용하는 불꽃이야. 내 물 속성 무투기를 증발시켜 버릴 정도의 위력이었어.”

백청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돌렸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의 시선 끝에 놓인 것은 바로 백성찬이었다.

“응, 형. 주빈 형 말대로야. 그놈, 이것저것 부릴 줄 아는 잔재주가 많아. 더 강력한 무투기도 쓸 줄 알고 말이야. 예전에 라훈 형도 괴상한 불꽃에 맞아서 당한 거잖아. 오늘은 왜인지 쓰질 않았지만…”

그 때, 주빈이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 대장, 오늘 내 실수는 인정해. 하지만 이제 놈의 수법을 알았으니 다시 싸우면…”

“입 닥쳐 방주빈. 네가 섣불리 내기를 하는 바람에 다시 싸우려면 최소한 6개월은 있어야 하니까.”

백청의 날선 한마디에 방주빈과 백성찬은 끽 소리도 내지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반년이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야. 매일 천계의 탑에 가서 수련 한다고 해도 대투사 최고 단계나 되겠지. 투령이 그렇게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니까. 반 년만 기다려라. 그 때 확실히 박살을 내주지. 그 때는 일대일이 아니라 백의 전체가 비석을 밟아버린다.”

백청은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백성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비석 놈들을 잘 감시해.”

* * *

다음날 새벽, 하늘이 막 밝아올 무렵, 신입생 기숙사 곳곳에서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을 비롯한 네 명의 숙소 앞에 ‘비석’의 구성원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잠시 후…작은 누각의 방 문이 열리며 네 사람이 안에서 걸아 나왔다. 그들은 흥분과 투지로 가득 찬 구성원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준은 이 정도의 투지를 가진 아이들이라면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구성원들의 머릿수를 확인하자마자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 이준 아니야?”

“헤헤, 생각보다 잘생겼는데?”

“저 사람들이 ‘비석’인가? 이번에 새로 창설 됐다는 신입생 세력 말이야. 기운 넘치는 것 같아 보이네.”

“그 얘기 들었어? ‘백의 무리’에 방주빈이 말이야……”

“……”

그들이 걸어가는 길 내내 속닥거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준은 들려오는 말소리에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목을 받는 것은 역시 성격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을 이끄는 입장에서 세를 불리고 조직원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준은 그들의 수근거림을 무시하려 애쓰며 천계의 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게 말로만 듣던 ‘천계의 탑’이군요. 정말 신기하네요. 땅속에 묻힌 탑이라니.”

천계의 탑에 도착하자마자 이은은 신기하다는 듯 탑 이곳저곳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응, 맞아.”

준은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탑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규정상, 탑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 때, 하태준이 준에게 다가왔다.

“대장, 조심해. 저기 ‘백의’의 수장인 백청이 오고 있어.”

“알겠어.”

준이 고개를 끄덕인 뒤 신호를 보내자 준의 주변에 있던 신입생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백청을 바라봤다.

백청은 자신을 바라보는 신입생들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상대가 누구인지를 직감한 듯 무리를 한번 쭉 훑더니 이내 이준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네가 이준이지? 성찬이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다. 오늘 직접 만나보니 생각보다 더 실력 있는 녀석이구나.”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는 아주 신사적인 태도로 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심지어 악수를 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는 순간, 백청의 몸속에서 강렬한 힘이 분출되며 돌풍이 불어왔고, 힘이 약한 사람들을 바닥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손에서부터 느껴지는 엄청난 힘과 격렬한 통증에 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빌어먹을…방심했어.’

준은 곧바로 염력 회오리에서 대지의 불꽃을 끌어내 손바닥을 감쌌다. 그러나 상대의 움직임을 느낀 백청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지를 살며시 굽히더니 그것으로 상대의 손바닥 정가운데를 살포시 눌렀고, 이내 준의 어깨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다음 순간, 준의 손끝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준은 천지의 불꽃을 불러내자마자 그것을 상대의 손에서 폭발시켰다.

쾅!

마침내 두 사람의 손에서 기묘한 폭발음이 들리며 섬광이 터지자, 이윤영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저기요, 뭐 하는 거죠?”

“하하,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이준 후배의 실력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칭찬이 자자하길래 실력이나 보자고 한거야. 이 정도는 인사라고, 너무 호들갑 떨지마.”

백청은 능청맞게 말했다.

“소문대로 대단하네. 그리고 이런 일에 일일이 날 세우지 말라고. 이 곳 문화니까.”

“뭐라고!”

백청의 뻔뻔한 태도에 윤영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준이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를 말렸다.

“윤영. 그만해”

“대장…!”

준은 어깨부터 팔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통증에 상대와 자신과의 격차를 실감하고 있었다. 반면 상대는 자신의 불꽃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으니, 이곳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6개월 동안 우리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놓길 잘했군. 처음부터 이 자가 나섰으면 비석은 그 날로 끝이었을 거야.’

준은 속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짐짓 겸손한 표정으로 백청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강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선배답군요. 감탄했습니다. 저도 앞으로 백청 선배님처럼 강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상대의 예의바른 말에 처음으로 백청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인이 박힌 듯 입가에 붙어있던 미소가 사라진 것이다.

‘이런…! 생각보다 감정 절제가 뛰어난 놈이군. 골치 아프게 됐어.’

그는 준이 화를 억누르고 태연하게 웃음을 짓는 것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재능 있는 아이야 본원내에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만, 발톱을 감출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자는 흔치 않았다. 그리고 보통 강적이 되는 것은…섣불리 이빨을 들이밀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하하! 이거야 원, 소문이 자자한 후배님께서 날 그렇게 평가해주니 나도 열심히 노력해야겠는걸. 6개월 뒤에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백청의 말투는 부드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 말에는 분명히 뼈가 있었다. 이는 6개월 뒤에 백의가 비석을 치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비석 구성원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가는 찰나, 갑자기 어딘가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말이야. 정말 노력해야겠어.”

“한율?”

백청은 이 뜻 밖의 상황에 깜짝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져 갑자기 나타난 여인을 바라봤다.

곧이어 한율의 뒤로 가슴에 반달 모양의 휘장을 단 여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율이 나타나 갑자기 신입생의 편을 들자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꼴사납군. 정말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임수혁이나 엄호에게 가봐. 신입생들 상대로 추태 부리지 말고.”

한율이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비아냥거리자, 백청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백청은 그녀의 도발에 화가 났지만 욱하는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실력은 자신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 하지 않았고, 그녀가 이끄는 조직 역시 ‘백의’보다 못 하지 않았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한번 찌푸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흥, 신입생에게 인사 한번 잘못했다가 별 소릴 다 듣는군.”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손을 휘둘러 ‘백의’ 멤버들을 추슬러 탑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

백청이 멀어지자, 한율이 이준에게 다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분명 어제 내가 말 했을 텐데요. 힘을 기르기 전까지는 누굴 도발하지 말라고.”

“그쪽에서 먼저 찾아온 겁니다.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요.”

이준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한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늘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언젠가 꼭 오늘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지금은 뭘 도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 하니까. 일단, 오늘 일은 장부에 달아둘게요.”

한율은 준의 인사에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탑 개방!”

그 때, 탑의 개방을 알리는 노인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탑 문이 열리자 학생들이 앞 다투어 입구로 향했다.

탑에 들어가자, 한율은 ‘백의’의 일거수 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충고를 남기고 자신의 조직원들과 함께 다른 층으로 이동했다.

준은 한율에 호의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 뒤 조직원들에게 탑에 들어갈 때의 주의사항에 대해 일러주었다.

덕분에 신입생들은 준이 그랬던 것과 달리 큰 고생을 치르지 않고 불의 탑에 적응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역시나 이은이었다. 그녀는 불과 2분 만에 심장의 불을 끄고 눈을 떴다.

이은 다음으로 눈을 뜬 사람은 윤영, 하늘 이었고, 그 뒤로도 실력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가 무사히 심장의 불을 끄는데 성공했다.

“이곳…정말 대단하네요. 본원 재학생들이 왜 그렇게 빨리 실력이 느는지 알겠어요.”

이은은 처음 느껴보는 충만한 에너지에 연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여기서 훈련하면 효과가 두 배는 되겠다. 이 천계의 탑에서 수련을 하게 되면 1년도 안 되서 투령 계급까지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놀라기는 윤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석의 구성원들은 하나 둘씩 수련할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자네가 바로 이준인가?”

그리고 이준이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수련실을 찾고 있을 때, 중년의 사내 하나가 걸어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네. 제가 이준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슨 일이신가요?”

이준은 중년이 가슴에 달린 특별 휘장을 보고 그의 신분을 알아챘다.

“유 장로의 부탁을 받아 너희를 데리고 중급 수련실에 함께 가려고 왔다.”

중년의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의 말에 준의 머릿속에 어제 유장로가 말하던 특별한 중급 수련실에 대한 이야기가 스쳤다.

“감사합니다.”

“하하하. 아니다. 따라오렴.”

그는 이준과 그의 무리를 한번 눈으로 쓸어 보고는 웃으며 손짓을 했다.

“따라가자.”

준은 그의 뒤에 있던 자신의 무리들을 향해 손짓하고는 곧바로 중년 교사를 따라갔다.

몇 분 동안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어가니 낡은 수련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