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성가신 일
천계의 탑을 나온 준은 입구 앞에 서서 땅 위로 살짝 솟아 있는 신비로운 검은 탑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갑자기 머릿속에서 약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 감정과 지혜가 있는 불의 정령이라니…본원이 이렇게 엄격하게 격리 되어 있는 이유를 알겠구나. 투존 강자들이 전력을 다 해야 시전할 수 있는 공간 감옥까지 만들어낼 정도이니…”
“불의 정령이라니, 그게 뭔가요?”
“순수한 화염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또 다른 생명체란다. 네가 전에 봤던 그 무형의 불 구렁이는 아마 구름 불꽃으로부터 탄생한 정령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불 구렁이가 저 천계의 탑 가운데에 자리한 구름 불꽃의 본체인 것 같다.”
“네? 그 구렁이가 구름불꽃이라고요?”
“그래. 내 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천지간의 기이한 불꽃은 세월이 지나며 온갖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네가 지난번에 용암에서 봤던 대지의 불꽃같은 경우에는 연꽃 같은 식물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 그 역시 천 백 년의 세월에 걸쳐 그런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약로는 한숨 섞인 말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다행히도 그건 식물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만큼 자기감정이나 지능을 갖고 있지 못했지. 그렇지만 네가 보았던 불 구렁이는 지혜를 갖고 있는 화염이었지. 우리는 그걸 불의 정령이라고 부른단다. 사람 모양으로 변신할 수 있는 최상급 마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정도지.”
“그…그걸 제가 손에 넣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눈에 비추었던 무형의 불 구렁이를 상상하자, 준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공포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그것을, 도저히 삼킬 자신이 없었다.
“어려움이 따르겠지…그냥 다른 천지의 불꽃을 찾아보겠느냐?”
약로의 말에 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 마세요…다른 천지의 불꽃을 찾는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일단 지켜보자구나.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본원에서 학생들의 실력을 빠르게 끌어 올려주는 비장의 무기가 바로 구름 불꽃이라는 거다. 그들은 영혼이 된 구름 불꽃을 천계의 탑 안에 가두고 그 분신이 학생들의 피 안으로 들어가 염력을 제련하게 만드는 것 같구나.”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네요.”
준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약로는 콧방귀를 뀌었다.
“대단하다고? 불을 끌어들여 몸을 태우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요? 저는 별 일 없었던 것 같은데요.”
“허허, 지금이야 공간을 이용해 감옥 같은 울타리를 만들어 가둬놨으니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공간 방벽으로 평생 구름 불꽃을 가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특히 구름 불꽃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탄생한 기이한 불이라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 결국 본원의 이런 조치는 그저 화산 입구를 애써 틀어막는 것밖에 되지 않는단다. 언제가 폭발하고 말게야…”
준은 그 말에서 스승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스승님의 뜻은…? 구름 불꽃이 스스로 폭발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말씀이신가요?”
“지금으로선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일단은 저 탑에 들어가서 수련하는 데에 힘을 쏟거라. 반년 안에 투령급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자. 네가 투령이 된다면 대지의 불꽃은 물론 평범한 공격도 훨씬 강해질 게다. 그 상태에서 대지의 불꽃과 하늘 사자의 불꽃을 결합한다면 그 위력은 서 장로도 한 손으로는 막아내기 힘들 정도겠지.”
준은 산더미처럼 쌓인 임무에 저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이준과 오하늘은 약 40분을 달려 다시 신입생 기숙사에 도착했다.
하지만 묘하게도 신입생들의 숙소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이준을 발견한 누군가가 숨을 헐떡이며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이준 대장, 일 났어!”
“무슨 일이야?”
“누가 와서 신입생을 데려가려고 해. 아무도 지원하지 않으니 여기에서도 또 분탕을…”
“뭐? 누가?”
준의 표정에 순간 살기가 돌았다. 하지만 신입생은 상대가 누구냐는 준의 질문에 답변은 하지 않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어서 말해!”
“그게… 백성찬이… 선배들과 같이 왔어.”
신입생 기숙사 내부에 있는 공터에는 본원의 학생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의 중심에는 두 사람이 마주본 채 서로를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둘 중 한 무리는 사람이 열댓 명밖에 없었고, 반대편에 사람이 더 많았지만, 풍겨오는 기운으로 미루어보아 인원이 적은 쪽이 더 우세해 보였다.
“이은, 이윤영, 고집 부리지 마. 신입생들끼리 뭉쳐 만든 세력이라니, 본원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대체 왜 이래. 너희들처럼 재능 있고 똑똑한 애들이 왜 이런 멍청한 선택을 하는 거야.”
“이건 우리 일이니까 동료를 배신한 네가 참견할 거 아니야.”
“볼일 끝났으면 이제 가봐. 우리 신입생들 중 널 반가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윤영이 가시 돋친 말로 먼저 포문을 열자, 이은 역시 싸늘한 말투로 백성찬을 비난했다.
두 여자의 비난에 백성찬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언제나 웃음이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는 이미 단 한조각의 미소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백성찬, 이게 무슨 시간 낭비야. 신입생들은 매가 약이다. 지금 기를 확 눌러줘야 우릴 따라 오지.”
그러자 백성찬 옆에 있던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나섰다.
“하하하. 주빈 형님 말씀도 맞지만 상대는 여자 애들이잖아요. 괜히 함부로 손을 썼다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체면도 못 차리고 욕만 먹을 거예요.”
“흠, 그건 그러네.”
성찬의 말에 방주빈은 못 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생, 그것도 여자 아이들을 두들겨 패주는 것은 확실히 체면이 사는 일은 아니었다.
“이은 후배라고 했나? 이준이라는 녀석이 널 데리고 불의 힘 쟁탈전에서 이겨줄 수 있는 능력은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본원 안에서는 그렇게 쉽지 않을 걸? 괜히 말려들어서 피해보지 말고 지금 넘어오라고. 아마 며칠만 지나도 개고생을 하고 ‘비석’이라는 조직을 빠져나가려고 안달일 거야.”
“신경 끄시죠.”
상대가 준을 비난하자, 이은의 얼굴에는 곧바로 살기가 돌았다.
하지만 주빈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칠 뿐 이었다.
“정말 고집불통이구나. 좋아. 너희에게 양보를 좀 해주지. 오늘 다섯 명의 신입생을 데리고 와. 그럼 우리 ‘백의’는 더 이상 너희를 괴롭히지 않으마. 어때?”
“주빈 형, 그건….”
주빈의 제안에 백성찬의 얼굴이 대번에 돌처럼 굳었다. 그가 굳이 이곳까지 온 것은 고작 별 것 아닌 애송이 다섯을 데려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 다섯 명 중 반드시 이은 후배 네가 있어야 하고. 아니면 너보다 실력이 있는 사람이 하나 끼어 있어야 해.”
방주빈은 백성찬의 말을 무시하고 그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섯명? 단 한 명도 넘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은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자, 결국 주빈의 얼굴에도 살기가 끼었다.
“그렇다면 힘을 쓰는 수밖에. 너희 비석에서 가장 강한 놈들을 전부 쓰러뜨리면 우리가 누굴 데려가든 어떻게 막을 건데?”
“한 번 해보시지.”
계속되는 협박에 결국 윤영의 몸에서 비취색의 염력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석’에서 간부급에 해당하는 윤영이 먼저 기운을 폭발시키자, 그녀의 뒤에 있던 수십 명의 신입생들 역시 염력을 끌어올렸다.
“호오? 정말 듣던 대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신입생들이구나. 아주 기고만장해 가지고는…이런 건방진 신입생들은 또 처음이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타협책을 내놓던 방주빈은 신입생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태도를 바꿔 세차게 발을 굴렀다.
무시무시한 염력이 깃든 발바닥이 대지와 맞닿는 순간, 엄청난 울림과 함께 짙은 청색의 염력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좋아. 아주 화를 자초하는군. 백성찬, 너도 애들을 데리고 움직여라. 깡다구가 좋아서 마음에 들었는데, 도를 넘었어. 오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고집이 어떤 참사를 부르는지 깨닫게 해주지.”
백성찬은 미묘한 표정으로 신입생들의 눈치를 한번 살피고는 곧바로 손을 휘둘러 신호를 보냈다.
“가자!”
“내가 백성찬을 막을게. 이은, 네가 사람들과 함께 다른 놈들을 좀 맡아줘.”
이에 맞서 윤영은 곧바로 녹색 채찍을 꺼내 휘둘렀고, 이내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광장 안에 울려 퍼졌다.
“응.”
그러나 백성찬과 이은이 막 맞부딪히려는 순간, 돌연 하늘을 가르고 새까만 그림자 둘이 날아들었다.
“드디어 왔군….”
비릿하게 풍기는 피내음과 뜨끈한 열감에 윤영을 비롯한 신입생들은 모두 자리에 나타난 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 저 사람들이…”
“그래, 다 알고 있어.”
준은 손을 저으며 무언가를 설명하려던 이은을 향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뒷일은 나한테 맡겨.”
“네가 이준이야?”
주빈은 갑자기 현장에 난입한 애송이의 등장에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 저 녀석이 이준이에요.”
백성찬이 자신을 가리키자, 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백성찬. 사람이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 난 네가 우리 곁을 떠날 때 아무런 비난도 하지 않았어. 그건 네 판단이 나름대로 합리적이었고, 존중할만한 것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제보니 단순한 겁쟁이에 비겁자였군. 강한 사람에게 맞서 볼 용기도 없고, 오로지 더 강한 쪽에 서서 잘난 척을 하고 싶어 하는 쓰레기였어. 붙잡지 않길 잘했군.”
준의 날선 비난에 백성찬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너 이 자식…”
“됐어. 시끄러워.”
그 때, 방주빈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난 너랑 입씨름할 생각 없어. 우리 ‘백의’에 15명의 신입생을 넘겨라.”
“싫다면?”
준이 검은 송곳의 손잡이를 단단히 잡으며 물었다.
“그렇다면…힘으로 무릎 꿇리는 수 밖에.”
그러나 준이 막 검은 송곳을 뽑아들려는 순간, 갑자기 단단한 손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오하늘 이었다. 자신이 해보겠다는 뜻 이었다.
“저 녀석은 투령 강자야. 지금 나서면 꽤 힘들 수도 있어. 이번에는 나에게 맡겨줘.”
하지만 준은 고개를 저어 오하늘의 뜻에 대해 완곡하게 거절을 표한 뒤 직접 앞으로 나아갔다.
“일대일로 싸우자. 네가 이기면 네가 하자는 대로 하고, 만일 네가 지면 백의 인가 뭔가 하는 조직은 3개월 동안 절대 우리 비석을 찾아와 성가시게 굴지 않는 걸로. 어때? 해볼래?”
“주빈 형, 받아주지 말아요. 저 녀석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저러는 거예요. 녀석 투령 강자와 대적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서 저러는 겁니다. 지난번에 라훈 형도 저 놈 손에 졌다고요. 차라리 다 같이 달려들어서 신입생들을 묵사발 내주고 저 놈을 협공하는 게 나을 거예요.”
주빈은 불쾌하다는 듯 백성찬을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고는 가볍게 그를 밀쳤다.
“그럴 필요 없어. 라훈 놈은 어차피 이제 막 투령 계급에 진입한 상태라고.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백성찬의 발언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주빈은 갑자기 내기 조건을 높였다.
“내기 조건을 바꾸지. 흥이 안나서 말이야. 내가 지면 6개월 동안 얼씬하지 않는 걸로. 이 몸이 너 같은 애송이에게 질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