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동굴
“그보다, 이리 와보게. 내가 자네에게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노인은 어리둥절해 하는 소년의 손을 잡아끌어 은색 치마를 입은 여자에게로 데려갔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천계의 탑 6층에서 수련을 하려던 ‘한율’이었다.
“이 친구의 이름은 한 율이다. 본원에 온지 이미 3년이 됐지. 네 선배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하. 실력이 아주 뛰어나고, 본원에서 ‘월령’이라는 이름의 세력도 창설했단다. 꽤나 힘이 있는 세력이지. 현재 본원에서 손에 꼽는 세력 중 하나다.”
“응?”
준은 눈 앞의 여자를 보자마자 전신의 털이 쭈뼛서는 느낌을 받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본원엔 역시 무서운 사람들이 많군. 이 나이에 이 정도 실력을 가졌다니…’
“안녕하세요, 한율 선배.”
“이준 후배님, 이번 신입생들을 다 이끌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한율이 피식 웃으며 인사말을 건네자, 준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처럼 번거로운 일이 많이 생길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걸 그랬네요.”
“선배들이 괴롭히는 것 때문에 그런 거죠?”
한율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후배님이 본원의 상황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어떤 세력에 들어갈지 정해둔건 있나요?”
준은 상대의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고는 잠시 망설이다 쑥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마 저는 어딘가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미 신입생들과 ‘비석’이라는 세력을 새로 만들었거든요…그래도 좋은 뜻으로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스로 세력을 하나 만들었다구요? 게다가 구성원은 전부 신입생이고요?”
준의 말에 한율은 물론이고 유장로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네.”
“이준 후배님, 제 생각엔…엄청 성가신 일이 될 것 같은데요.”
한율은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 본원에 신입생으로 이루어진 세력을 만들면 안 된다는 규정이라도 있나요?”
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본원에 그런 규정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음…그건 맞아요. 하지만 매년 본원에 들어오는 신입생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요. 많은 세력들이 신입생들을 불러 모아 젊은 피를 수혈하거든요. 세력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요. 매련 이렇게 해오니 관례가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이준 후배가 지금 모든 신입생들을 한 데에 불러 모으면…다른 세력들이 아주 언짢아 할거예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것만으로도 많은 세력들이 그 세력을 적대시하게 될 것 같군요.”
유 장로도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율의 설명에 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세력을 만들자마자 적으로 둘러싸이다니. 게다가 몇 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의 실력으로는 한 세력도 감당하기 힘든 상태였다.
“생각도 못 해봤습니다. 스스로 무덤을 팠군요.”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거운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이미 일이 다 벌어진 뒤라 저도 방법이 없어요. 정말 누군가가 ‘비석’에 손을 댄다면 있는 힘껏 싸워볼 수 밖에요.”
준의 답변에 한율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몇 번 정도 발끝을 까딱거리더니 갑자기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행여나 앞으로 도움 필요한 게 있으면 찾아와요. 내가 도와줄게요.”
아주 뜻 밖의 제안이었다. 준은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은 자신의 세력을 선뜻 도와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말뿐이라도 감사한 일 이었다.
“하하. 정말 고맙습니다, 한율 선배님.”
“벌써부터 고마워할 건 없어요. 사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사실 많지 않아서요. 중요한 건 아무래도 스스로의 잠재력이겠죠.”
“네. 그래도 감사합니다.”
“그래요, 후배님. 그럼 유 장로님과 천계의 탑을 한 번 둘러보도록 하세요. 저는 6층까지 가야 해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을 것 같네요.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보죠.”
한율은 그 말을 끝으로 1층에서 사라졌고, 한율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유장로가 웃음을 지으며 준에게 말을 걸어왔다.
“허허. 율이를 어떻게 생각하니?”
“좋은 사람 같군요. 재능도 아주 비범한 것 같구요. 몇 년 뒤에는 저도 저렇게 되어 있을 수 있을까요?”
“하하하, 내가 보기엔 너도 아주 비범해 보인다만 말이다. 게다가 영특한 아이이니, 아무 계산도 없이 선뜻 너를 돕겠다고 하진 않았겠지. 아마도 네 미래를 보고 투자한 듯 싶구나. 자, 따라 오거라. 천계의 탑에 대해 알려주마.”
* * *
유장로의 뒤를 따라 탑 안을 돌아보니, 천계의 탑의 크기는 준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충 둘러보아도 한 층에 족히 500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원형의 탑 내부 공간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수련의 방이 있었고, 그 수련실의 대부분은 아마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방 문 위쪽에는 붉은색의 작은 문패가 있었는데, 그 위에는 계급이 쓰여져 있었다.
각각 상급, 중급, 하급으로 그것이 바로 하태준이 말했던 방의 등급을 나타내는 문패인 것 같았다.
준은 탑 내부를 쭉 돌아보며 고급 수련실일수록 탑 중앙과 더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탑의 외벽과 가까운 방은 대부분 하급 수련실이었다.
“천계의 탑에는 불문율이 있단다. 이런 상급, 중급, 하급의 수련실들은 보통 자기 실력으로 빼앗아 차지해야 하지. 결국 실력이 뛰어날수록 더 좋은 조건에서 수련할 수 있는 것 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쩔 수 없이 바깥쪽에 있는 하급 수련실을 사용해야 하고 말이다.”
“같은 시간을 수련해도 얻을 수 있는 성과가 천지차이인데, 그럼 강자는 계속 강해지고 약자는 계속 약해지는 불공평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나요?”
장로의 설명에 의문을 느낀 이준이 물었다.
“어려움에 맞닥뜨리지 않으면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일종의 압박과 경쟁이지. 극한의 수준까지 압력이 가해졌을 때 실력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며 빠른 속도로 다른 강자들을 따라잡더구나. 강자 들 역시 따라잡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결국 서로를 위해서 좋은 것 이다. 선의의 경쟁이란 것이지.”
노인의 설명에 이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이준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그는 돌연 발걸음을 멈춘 채 탑의 중앙 부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건…?”
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까만 동굴이 하나 있었다. 까맣고 깊은 구멍은 탑 지붕으로 가려져 있어 밖에서는 보지 못 했던 것 이었고, 그 안에서는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동굴 안에 있는 무언가가 탑 전체에 열기를 전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을 뻗어 그 뜨거운 공기를 만져보자, 갑자기 준의 눈동자에 파란 불꽃이 일었다. 준의 몸에서 대지의 불꽃이 요동치니 이에 대응하듯 동굴 안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이 푸른 불꽃에 휩싸인 눈으로 동굴 안을 계속해서 바라보자, 갑자기 동굴 안의 공간에 미세하게 굴곡이 생겨났다.
“이준, 멈춰라!”
바로 그 때, 유 장로가 벽력 같이 호통을 치며 준을 제지했다.
치이익…
다음 순간, 무언가가 타오르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탑안의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쉬이익…쉬익…”
무언가가 불타는 소리가 난지 수 초 뒤, 동굴 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준은 무언가 위험한 것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때, 동굴 입구에서 2미터 가량 떨어진 공간이 점점 더 일그러지며 정체불명의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유 장로는 새파랗게 질려 준을 붙잡더니 동굴 쪽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뒤쪽으로 준을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그것은 분명한 ‘공포’였다.
……
한편, 대지의 불꽃으로 감싸진 준의 동공에는 노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보이고 있었다.
일그러진 공간에는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렁이가 자리잡고 있었다.
구렁이의 몸은 온통 불꽃에 휩싸여 있었고, 거대한 입 사이로는 준의 허벅지 굵기만한 이빨이 보였다.
준은 구렁이의 몸에서 일고 있는 불꽃에 담긴 공포스러운 힘 앞에 온 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투황급 강자라 해도 저 불꽃에 스치는 순간 새하얗게 재가 되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구렁이는 그렇게 준을 노려보며 혀를 낼름거리다가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더 이상 앞으로 나오지 못 하고 몸부림을 쳐댔다.
“유 장로님, 저… 저건 뭐죠?”
이준의 질문에 유 장로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갔다.
“이곳의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원래 학생은 탑 중앙 부분에 들어와선 안 되는 것인데, 오늘 내가 실수를 한 것 같구나. 다행히 오늘은 내가 당직이라 큰 문제는 없었지만…자칫하면 아주 큰 일이 벌어질 뻔 했다.”
“네, 전 아무 것도 못 봤습니다. 다만 이곳의 온도가 갑자기 높이 치솟고, 동굴 안에서 뭔가 울음소리가 들리길래 여쭤본 겁니다.”
“못 봤다면 다행이다. 어떤 일들은 모르는 게 약이 될 때가 있지. 앞으로는 이곳에 오지 말거라. 혹시라도 들키게 된다면 오늘 당직을 선 나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단다.”
유 장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준을 이끌고 탑의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중앙지대에서 벗어나자, 유 장로의 얼굴에 다시 혈색이 돌아왔다.
그는 준을 데리고 1층을 자세히 돌아본 뒤 계속해서 탑 내부의 규칙과 주의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일러 주었다.
“이준. 하나 충고를 해주마. 네가 천계의 탑에 들어와 수련을 할 때, 섣불리 고급 수련실에 손을 대지 말거라.”
준은 무언가 질문을 하려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가 본원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좋은 수련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면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릴 것이 자명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가뜩이나 적을 많이 만든 상황에서, 더 이상 스스로 무덤을 파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천계의 탑 내부 규칙상 장로들은 학생들의 싸움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단다. 그러니 정말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우리도 움직이질 않지. 일단 그렇게 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투령이 되거라. 그럼 2류 세력이라도 될 수 있을게다.”
“투령이 되어야 2류 세력이 될 수 있는 건가요?”
유장로의 말에 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생각한 것 보다 벽이 너무 높았던 것 이다.
“하하, 뭐,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지. 그리고 한 세력에 투령이 3명은 되어야 일류 세력 대열에 낄 수 있지.”
“으음…”
준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자, 노인이 웃으며 수련을 시작할 것인지를 물었다.
“어떠냐, 오늘 수련을 해보고 갈 테냐?”
“아닙니다. 제 세력은 오늘 막 만들어졌으니, 일단 그 문제부터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그래. 원래 처음 자리 잡는 것이 가장 힘든 법이지.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중급 수련실을 보여주마.”
“감사했습니다.”
탑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자, 준은 감사의 의미로 장로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 곧바로 오하늘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