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1화. 진동
“왜 그러세요, 스승님?”
준은 형태 없는 불꽃을 영혼 탐지능력으로 찬찬히 뜯어보며 약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상하구나… 이런 형질은 구름불꽃의 특징은 맞지만 이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아아, 그렇구나. 이 불꽃은 구름불꽃의 본체가 아닌 것 같다. 본체와 가깝지만 분신인 게지.”
“무슨 의미죠?”
“이 형태 없는 불씨가 진짜 구름불꽃이 아니란 소리란다. 그저 구름불꽃의 분신이 네 몸속에 들어온 것이지. 이런 분신으로는 ‘불개’를 진화시킬 수 없어.”
약로의 설명에 이준의 얼굴에는 실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실망하지 말거라. 어쨌거나 구름불꽃의 분신이 네 몸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니까 말이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구름불꽃은 이 탑 안에 있는 것 같구나. 이화를 이런 곳에 숨겨놨을 줄이야. 허허, 찾기 힘들 법도 하구나.”
약로의 웃음에는 안도감과 기쁨이 서려있었다.
“구름불꽃이 이 탑 안에 있다는 말씀이죠?”
“본원 학생들이 탑에 들어오면 수련 속도가 증가하는 이유가 그게 아니라면 또 뭐겠니.”
약로는 또 다시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구름불꽃이랑 수련이랑 상관이 있나요?”
“그럴 수밖에 없지. 대지의 불꽃을 잠시 거두고 염력을 움직여보거라.”
스승의의 지시대로 몸을 보호하고 있던 대지의 불꽃을 납령 안으로 다시 돌려 놓자, 엄청난 고온을 가진 무형의 불씨가 혈관을 타고 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 고통과 고온을 견뎌내니 무형의 불씨와 만난 염력이 점점 갈무리되고 압축되면서 빠르게 농밀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본체도 아니고 분신이 이 정도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 거면 본체는 얼마나 강하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저절로 마른 침이 넘어가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염력을 증폭시켜주는 불꽃이라니…실로 놀라운 힘 이었다.
“어떠냐?”
약로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 제자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스승님, 이 구름불꽃이라는 건 어쩌면 지금의 저에게 대지의 불꽃보다도 더 필요한 물건일지도 모르겠어요! 꼭 손에 넣죠!”
따뜻한 등불이 켜진 오래된 탑 안에서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눈을 감고 있는 이준과 오하늘을 둘러싸고 귓속말을 해대고 있었다.
“비켜, 비켜, 유 장로님 오신다.”
그 때 누군가가 소리쳤고, 인파가 벌어지며 작은 길을 냈다.
‘천계의 탑’에서는 각 층의 장로들의 지위가 가장 높았으니, 그들의 신경을 거슬리는 자들은 누구도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곧이어 갈라진 사람들 틈 사이로 소박한 차림을 한 노인이 서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인자한 너털웃음을 지으며 딱딱하게 굳어 있는 이준과 하늘을 쳐다봤다.
“어허허,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녀석들이군. 천계의 탑에 처음 들어오면서 미리 보고 한 번 하지 않다니.”
“킥킥. 매년 자기 무덤을 파는 신입생들이 있다니까. 괜히 ‘천계의 탑’에 들어와서는 말이야. 다 자기 업보지…”
재학생 무리 곳곳에서 즐거워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입생은 본원에 이제 막 들어왔으니까 규정을 잘 모르는 게 당연하지, 비웃을 건 또 뭐야? 마치 네놈들은 처음 올 때부터 규정을 다 지켰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군.”
그 때 차분한 목소리가 군중 속을 뚫고 나왔다. 사람들이 시선을 돌려 보니, 은색 옷을 걸친 여인 하나가 걸어 나왔다. 여인의 깡마르고 날렵해 보이는 몸에서는 서늘하고 예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오, 율이었구나. 이 노인네가 눈이 침침해서 그런지 보질 못했구나. 저 녀석들은 다 철부지들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거라.
노인은 은색 옷을 입은 여인을 발견하자마자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유 장로님.”
“이번엔 몇 층에서 수련을 할 생각이냐?”
유 장로는 이준과 오하늘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은색 옷의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은색 옷의 여자를 바라볼 때 마다 즐거운 듯 연신 고개를 끄덕여 댔다.
“6층이요.”
“6층? 거기는 최소 6성 투령은 되어야 내려갈 수 있는 곳인데, 벌써 그 정도 수준이 됐단 말이야?”
여인의 답변에 주변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몇 번이나 그녀를 훑어봤다.
“뭐라?”
유 장로조차 여자의 놀라운 성장속도에 놀란 듯 했다.
“몇 년 못 본 사이에 많이 성장했구나. 본원 장로 직함을 달아도 손색이 없겠어… 허허허, 언제보아도 놀라운 재능이구나.”
“전부 ‘천계의 탑’ 덕분이죠 뭐. 저 혼자 수련했으면 겨우 투령 계급에 발 들이는 정도였을 거예요.”
그녀는 겸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두 명의 풋내기를 바라보았다.
“유 장로님, 두 사람을 먼저 구해주시죠. 이러다가 몸이 다 망가지겠어요.”
하지만 노인은 즐겁다는 듯 웃으며 여인의 청을 거절했다.
“일단 기다려보자. 네가 처음 이 탑에 발을 들였을 때 얼마나 견뎠었는지 기억나느냐?”
“아마…17분 정도였을 거예요. 제가 탑에 들어가기 전에 누군가가 미리 조언을 해준 게 도움이 됐죠.”
“처음 천계의 탑에 들어오는 순간이 그 사람의 잠재력을 알 수 있는 기회란다. 처음에는 모든 신입생들이 어떻게 심장의 불씨를 끄는지 모를 테지. 그러니 오래 버티는 사람일수록 불에 대한 면역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나중에 수련할 때 아주 큰 도움이 되지. 이미 이 두 사람은 대략 8분 정도 버틴 것 같구나. 음, 아주 훌륭해.”
“저 친구들의 한계를 시험해 보시는 거군요?”
“그렇지.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 까만 옷을 입은 녀석이 이준이란 친구이지. 이번 신입생들을 이끌고 ‘불의 힘 쟁탈전’에서 재학생들을 누르고 승리를 이끈 녀석 말이다. 아주 재미있는 친구야.”
“저 친구가 이준이었어요?”
‘이준’이라는 말에 여인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유장로는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준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바라보고 있었다.
“별 일 없으면 먼저 탑으로 내려가거라. 이쪽엔 나 혼자 있어도 되니 말이다.”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저 아이를 지켜보는 건 시간이 아깝지 않겠네요.”
그렇게 14분이 지났지만, 이준과 오하늘 둘 모두 아직 한계에 달하지 않은 듯 해보였고, 이에 장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보통 내기가 아니군….”
그리고 또 다시 2분. 오하늘의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한계가 온 것이다.
신입생의 이상 증세를 발견한 유장로는 곧바로 쭈글쭈글한 오른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우유빛깔의 백색화염이 형성되며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가 손가락을 구부리니 불꽃이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가 오하늘의 심장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나와라!”
노인의 고함소리와 함께 하얀 불꽃이 춤을 추고, 형태 없는 불씨가 오하늘의 심장쪽에서 튀어나와 하얀 불꽃에 삼켜졌다.
무형의 불꽃이 튀어나오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있던 오하늘의 다리가 풀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겋게 달아올랐던 그의 얼굴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거칠게 몰아쉬던 호흡이 점차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하하, 16분이라니 무방비 상태로 당한 것치고는 아주 훌륭한 성적이구나. 이번 신입생은 확실히 지난해보다 더 낫군.”
유장로가 감탄하며 웃음을 짓자, 그 옆에 있던 한율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생이 불을 견디는 능력이 자신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은 17분을 버텼지만, 당시 그녀는 어느 정도 대비를 하고 탑에 들어온 것이었으니 오하늘의 재능이 더 나아보였다.
‘그 이준이란 친구는 아직도 버티고 있는 건가…?’
한율은 오하늘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다시 이준에게로 돌렸다.
‘신입생이 재학생들을 이겼다더니, 역시 보통이 아닌 모양이군.’
“좋아. 이렇게 된 거 오늘 저 녀석이 얼마나 버티는지 내가 한 번 지켜봐줘야겠군.”
그러나 장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이에 유 장로는 멈칫하다가 이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 기대가 너무 컸나보구나….”
“유 장로님, 18분 가까이 버틴 것만으로도 불에 대한 면역이 상당히 뛰어난 거예요. 본원에서도 이런 사람을 얼마 찾기 어려운 거 아시잖아요.”
실망한 유 장로의 표정을 살피던 한율이 피식 웃으며 그를 달랬다.
“그래. 훌륭한 건 사실이지.”
곧이어 유 장로는 손가락을 구부리자, 오하늘 때와 마찬가지로 하얀 불꽃이 무형의 불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백색 불꽃이 회전을 시작했건만 무형의 불씨가 나타나지 않고 갑자기 푸른 화염이 쏟아지며 하얀 불꽃을 집어삼키고 만 것 이다!
신입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불꽃은 하얀색의 불꽃을 단숨에 잠식하고는 자취를 감췄다.
대지의 불꽃은 하얀 불꽃을 소멸시키자마자 갑자기 유 장로를 향했다.
“흩어져!”
유 장로의 외침에 학생들은 황급히 후퇴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한 순간 탑 내부는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푸른 불꽃을 본 유장로는 굳은 표정으로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하얀 화염이 그의 손에서 분출되며 쾌속으로 불꽃 방패를 형성했다.
눈 깜짝할 사이 푸른 화염이 그를 향해 날아왔고, 이내 하얀 불꽃으로 이루어진 방어막과 강하게 부딪혔다.
쾅!
뒤이어 강렬한 염력이 힘을 겨루며 커다란 폭발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 * *
오래된 탑 가운데에 옅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잠시 후 그 안개의 끝쪽에서 노인의 형태가 서서히 드러났다.
노인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입던 옷은 절반이나 불꽃에 잡아먹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머리 역시 불에 그을려 고기 타는 냄새를 내고 있었다.
급히 불길을 피해 도망친 학생들은 이 광경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 했다.
탑을 지키는 장로는 엄격한 선발절차를 거쳐 임용 되는 만큼 최고의 투사들이 모인 이곳에서도 가장 뛰어난 투사라고 할 수 있었다.
본원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천재들이 간혹 고된 수련을 통해 장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하지만, 이는 몹시 드문 일 이었다. 게다가 그 조차도 본원에서 3년 이상 수련을 했을 때의 이야기다. 단 한 번도 신입생이 장로의 목숨을 빼앗을 뻔한 상황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한율은 일분 가까이 멍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신이 든 듯 눈을 빛냈다.
“콜록…”
곧이어 정적으로 가득하던 탑 내에 기침 소리가 울려퍼지며 정적을 깨뜨리고, 유 장로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걸레짝이 되어버린 옷을 툭툭 털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준 이 녀석, 왜 다른 장로들이 계속해서 이 녀석에 대해 떠들어 댔는지 알 것도 같군.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본원의 장로들도 못 가져서 안달인 물건을 가지고 있다니, 하하하하!”
다른 학생들은 장로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눈앞의 신입생이 무언가 대단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때, 이준이 엄청난 기운을 내뿜으며 안개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에게서 풍기는 압도적인 기운에 다른 학생들은 그가 신입생이라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허허. 처음으로 불타는 것일 텐데 자기 힘으로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다니. 지금까지 네가 처음이란다.”
안개속에서 나온 신입생의 혈색이 정상으로 보이자, 유 장로의 얼굴에는 다시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누구시죠?”
“하하. 나는 천계의 탑 1층의 수호를 맡은 장로다. 다른 녀석들처럼 ‘유 장로’라고 부르거라.”
장로는 또 다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신입생을 대하는 유 장로의 태도에 순간 재학생의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유 장로님 지금 상태가…”
준은 자신이 한 일을 모르는지 유장로의 상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다. 실수로 불을 조금 잘못 다뤄서 그런 것 같구나.”
유장로는 딱히 준을 탓하지 않았다. 준이 고의로 자신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