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신비의 검은 탑
준은 하태준이라는 사내에게 호감이 생겼다. 실력도 제법이었고, 정보도 많았다. 게다가 문제가 생기자마자 자신을 찾아온 것부터 지금 제안까지, 상당히 머리 회전이 빠른 사내였다.
이런 사람은 아군으로 삼는다면 큰 도움이 되지만, 적으로 삼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투사로서의 실력을 떠나 이런 사내는 조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준이 잠깐 더 뜸을 들인 뒤 천천히 입을 뗐다.
“대장이라는 호칭은 빼고 편하게 불러줘. 음…혹시 본원에 총 몇 명의 학생이 있는지 알아?”
“아마 천 명 가까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정확한 숫자는 집계가 안 됐을 거야.”
“천 명? 그렇게나 많다고? 매년 본원에 들어오는 사람만 해도 50명밖에 안 되잖아. 설마 여기 발 들인 학생이 평생 못 나가고 여기 남아있는 거야?”
“하하, 본원은 5년제야. 5년의 수련을 마친 후, 각자 제 갈 길을 찾아 떠나는 식이지. 물론 선천적인 재능이 뛰어나다면 2년 정도 더 다닐 수 있어. 물론 그 때 남은 학생들은 전부 강자 목록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지. 게다가 사실 선발 대회 말고도 본원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어. 연금술 학과나 집행부는 특별전형을 통해 본원에 들어올 인재를 모집하거든. 그러니 학생이 천 명 정도 되는 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지.”
“아아…”
태준의 자세한 설명에 준이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하태준이라는 사내는 여러모로 효용 가치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우리 40명 신입생이 모여도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겠네.”
“시작부터 큰 규모를 기대하긴 어렵지 않겠어? 이름 있는 오랜 세력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야. 아까 그 녀석이 말하는 ‘푸른 뫼’라는 세력도 본원에서 꽤 잘나가는 조직이야. 하지만 총 인원은 20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물론… 실력이야 우리보다 훨씬 낫지만… 어찌됐든 인원은 그렇다는 거야. 그러니 우리가 이 상태로 실력을 길러나가면, 빠르면 1, 2년 내로 제법 큰 세력이 될 수 있을 거야.”
태준의 제안은 하나부터 열까지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준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 하고 있었다. 일단 사람들을 이끄는 것은 자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람들을 이끄는 것에 그리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대장이 대장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할 바에는 각자 처음부터 다른 안정된 세력에 들어가는 편이 서로를 위해 나았다.
“오라버니, 저도 하태준의 말에 동의해요. 지금 결정을 못 내리면 얼마 못 가 신입생들이 다 흩어지고 말거예요. 그럼 이런 기회는 다신 오지 않아요.”
그 때, 이은이 다가와 이준을 설득했다.
“만일 조직을 관리하는 것이 걱정된다면 그건 저랑 윤영 언니에게 맡겨줘요.”
그녀는 이미 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이은의 설득에 머리만 긁적이고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준이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좋아! 다들 나를 이렇게 믿어줘서 고마워. 나를 위해서, 그리고 너희를 위해서, 한번 뭉쳐보자.”
마침내 준의 입에서 세력을 만들겠다는 말이 나오자, 신입생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박수를 쳐댔다.
잠시 후, 태준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며 준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우리 조직의 이름부터 지어야 하지 않겠어?”
“이름이라… 우리가 본원에 잘 자리 잡는 걸 목표로 하고 ‘비석’으로 하는게 어때? 우리의 새 새력이 비석처럼 본원 한 가운데에 반듯하게 자리잡길 바라면서 말이야.”
“좋아, 비석!”
“그럼 이제 우리도 세력이 생긴 건가?”
자신들의 새로운 조직에 이름이 붙여지자, 신입생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몇 년 뒤 자신들이 조직한 세력이 본원에서 이름을 떨치는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조직의 이름을 정한 뒤, 준은 이은과 윤영에게 신입생들의 배치를 맡기고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대장치곤 좀 무책임하군.”
그 때, 오하늘이 그림자처럼 준의 뒤에 바짝 붙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잘 해줄 거야. 사실 내가 오랫동안 혼자 지내서 이런 일에 좀 많이 서툴거든. 이런 일에는 나보다 그 두 사람이 훨씬 나을 거야.”
준은 오하늘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넓은 길을 응시했다. 그 곳에는 재학생들이 몇 명 지나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존재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는 않는 것 같아 보였다.
외원의 사신은 못 당하겠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짓고는 도로를 바라보는 준을 향해 질문을 했다.
“어디로 갈 생각이지?”
“북쪽으로 한 번 가볼까……”
준은 어젯 밤 약로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오하늘은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가자.”
* * *
본원의 크기는 두 사람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대투사 중에서도 탁월한 속도를 자랑하는 둘이었지만, 30분 이상을 달려 봐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북쪽으로 향하는 길목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과연 본원은 학생들 간의 대결을 장려하는 분위기인 듯, 싸움을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본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보통이 아니군. 이 정도 실력이면 외원 애들은 탈탈 털려 가루가 되겠어.”
준은 본원생들의 대결을 흘끔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수한 사람들만 모아놨으니까.”
오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짤막한 답변만을 하고는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달려가자, 눈에 띄게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북쪽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무언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북쪽에 뭐 구경거리라도 있나? 무슨 일이지?”
이 기묘한 현상에 이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보면 알겠지.”
오하늘의 말 대로였다. 가보면 알 일 이다. 준과 오하늘은 나란히 속도를 높여 북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20분이 지나자, 본원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많지?”
개미떼 같이 거무튀튀한 사람 무리에 준이 마침내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까이 가서 봐야겠어.”
준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숭이처럼 잽싸게 나뭇가지 위로 뛰어 올라 주위를 살폈다.
“저건…?”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안으로 움푹 파인 지형과, 그 안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검은 탑이었다. 검은 탑은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땅에는 탑 꼭대기와 1층으로 들어가는 출입문만이 빼꼼하게 보일 뿐이었다.
‘탑이 지하에 묻혀 있다고? 설마 저게 말로만 듣던 천계의 탑인가? 하늘이 아니라 땅에 묻혀 있을 줄이야. 수련이 가능하긴 한 거야?’
탑을 찬찬히 뜯어보니 그 주변의 공기가 주름진 듯 일그러져 있었다. 예전에 ‘장서각’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저런 방비도 해놨단 거지. 투존이라니…”
외원의 부원장인 대건의 말에 따르면, 이런 결계는 최소 투존급의 강자만이 펼칠 수 있었다.
‘쉬익-’
그 때, 주변에서 돌풍이 일어나더니 무언가가 준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자세히 보니 나뭇잎 모양의 휘장을 단 수 십 명의 사람이 검은 탑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휴…대단하군.’
준은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면 본원에서도 꽤나 강한 축에 속할 테지.’
잠시 후, 나무에서 내려온 준이 돌아오자 오하늘이 무심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뭐라도 알아냈어?”
“여기가 아마 그 천계의 탑 같아. 우리도 한번 들어가 보자. 그렇게 빨리 수련이 가능하다고 하니까 말이야.”
이준의 대답에 오하늘의 얼굴에는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그 순간, ‘천계의 탑 개방!’이라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종소리가 울려퍼졌고, 주위에 정적이 내려 앉았다.
“입장!”
준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오하늘을 향해 손짓을 해댔다.
“우리도 들어가자.”
가까이 다가가자 비로소 검은 탑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나왔다. 하지만 그들이 거대하다고 느낀 것조차 지면으로 나와 있는 탑의 일부분일 뿐 이었으니, 전체는 얼마나 거대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탑과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자, 오래된 검은 탑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천계의 탑은 얼음 종류의 재질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정말 희한하군. 탑 안에서는 엄청난 불 에너지가 느껴지는데 건물에서는 한기가 느껴지다니…”
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하늘과 함께 탑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칠흑같이 새까만 대문 앞에 서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눈앞이 한밤중처럼 어두워졌고, 발 아래로 차갑고 단단한 돌바닥의 느낌이 전해졌다.
그렇게 어둠속에서 걸음을 옮긴지 수 분 뒤, 갑자기 눈앞이 대낮처럼 환해지며 몸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곁을 돌아보니 오하늘의 몸에서도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입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뒤따라 들어오는 재학생들이 이준과 하늘의 모습을 보고 낄낄거리며 말했다.
“이런…아무 대비도 없이 천계의 탑안에 들어왔단 말이야? 본원에 처음 들어온 신입생 같은데…”
“빨리 본원 장로님을 찾아가야 할 거다. 천계에 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장로님의 도움이 없으면 온 몸이 익어버릴걸.”
하지만 준은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뿐 이었다.
“젠장.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지금 그의 몸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불꽃이 가진 열기는 그리 대단치 않았지만, 문제는 그 열기가 끊임없이 몸 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는 것 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장이 타서 죽어버리고 말 것 이다.
무형의 불꽃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는 준의 사정 따위는 알바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준의 몸으로 흡수되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육 곳곳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하늘 사자의 정수나, 대지의 불꽃을 삼킬 때 느껴졌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준은 속으로 깊이 심호흡을 하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체내를 바라보자, 염력 회오리 중심부에 위치한 납령 속에서 푸른색의 화염이 급속도로 끓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준은 침착하게 대지의 불꽃을 끌어내 천천히 이동시킨 뒤 자신의 몸에 둘렀고, 잠시 후 열기가 조금씩 차단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지? 어떻게 내 몸 속으로 흘러 들어 온 거야?’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자 준은 얼른 생각에 잠겼다. 천계의 탑에 들어온 이후 아무것도 만지거나 건드린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그 열기는 어디서 흘러들어온 것이란 말인가…
“음…무형의 불꽃이라니.”
그 때, 준의 머릿속에 약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승님?”
“형태도 색도 흔적조차 없다니… 이,이건 구름 불꽃인데…”
“네? 구름 불꽃이요?”
준이 깜짝 놀라 되묻자, 이에 호응하듯 무형의 불씨가 더욱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흥분하지 말거라. 진정하렴. 응?”
제자의 요동치는 마음을 느낀 약로가 황급히 그를 달랬다. 그러자 또 다시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냥, 불꽃의 열기가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