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대립
큰 소음에 하늘과 윤영도 동작을 잠시 멈추고 옆에 놓인 수건으로 흘러내린 땀을 대충 문질러 닦고는 물을 마셨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윤영이 물었다.
“밖에 신입생이 열댓 명 있는데 오라버니와 만나고 싶대.”
“신입생? 무슨 일이지? 그냥 들어오라고 해봐.”
당사자인 준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자, 머지 않아 열댓 명의 신입생들이 줄지어 밀려 들어와 이준과 다른 이들을 에워쌌다. 어찌된 일인지 그들의 얼굴은 모두 붉게 달아 올라있었다.
“이준 대장, 같은 신입생으로서 우릴 좀 도와주면 안될까? 본원 재학생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해.”
말을 꺼낸 청년은 상당히 흥분한 듯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준은 한 눈에 그를 알아봤다. 사내는 검은 사자 부대와 싸울 때 마지막까지 버텼던 세 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은 하태준이었다.
“왜 그래? 자세히 설명해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야. 어떤 재학생 무리들이 우리 신입생 구역에 들어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신입생들에게 상납금을 걷는다는 거야. 한 사람당 이틀 치의 불의 힘을 내놓으라고…우린 일을 크게 벌여서 좋을게 없을 것 같아서, 꾹 참고 순순히 불의 힘을 건넸어. 그런데 그 무리들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더 많은 재학생 무리들이 끊임없이 우리 신입 구역으로 들어와서 문을 가로 막고 상납금을 내라고 하더군. 벌써 세 조나 왔어. 이러다간 지금까지 애써 모은 불의 힘을 죄다 토해내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그들의 눈빛에는 억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진짜 너무 한 거 아니야?”
동기들의 하소연에 이윤영이 버럭 화를 냈다.
반면 이준은 차를 홀짝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준 대장, 우리도 무조건 괴롭힘으로부터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온 건 아니야. 신입생들이 재학생들한테 괴롭힘 당하는 건 일종의 관례니까…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렇게 끝없이 상납을 요구하는 건 정말 아니잖아. 게다가 이런 상황이 생긴 이유를 좀 알아보니까 우리가 불의 힘 쟁탈전에서 한 행동 때문이라는거야. 이런게 어디 있냐고, 물론 네 공이 가장 컸지만, 이건 신입생들이 모두 힘을 합쳐 정정당당하게 따낸 것 이잖아. 그걸 이렇게 빼앗아가는 법이 어디 있어! 물론…공짜로 도와달라는 것은 아니야. 차라리 너에게 상납을 할 지언정, 그 사람들에게는 못 내겠어. 치졸하잖아! 그러니 네가 좀 도와줘! 공짜로 도와달라고는 안할게!”
하태준은 분을 참지 못 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한테 상납금을 낸다고? 그럼 내가 그 재학생들이랑 다를 바가 뭐야. 일단 신입생들을 모아서 뭉쳐있어. 너희가 가 있으면 우리 쪽도 움직일게.”
이준의 말에 신입생들은 일사분란하게 누각을 빠져나갔다. 신입생들이 모두 퇴장하자, 준이 고개를 돌려 나머지 세 명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네가 대장이니까 마음대로 해. 단, 나는 신입생이라고 해서 바보처럼 가만히 당하는게 썩 좋아보이지는 않네.”
“어제 서 장로님도 말씀하셨잖아요. 본원 재학생들의 텃세를 우리 넷이서 버티기는 어려울 거라구요. 이번 기회에 신입생들 실력도 살펴보고 오라버니에 대한 신뢰도도 높여 보는건 어때요?”
“내가 새로운 세력을 만들었으면 좋겠어?”
이은의 제안에 준의 표정이 한결 진지해졌다. 제법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이 만든 세력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어차피 이곳에서는 자기 세력을 만들든지, 다른 사람의 세력안에 포섭되든지 해야할테니까요.”
“흠…”
준은 잠시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생각에 찬성해. 차라리 신입생들을 한데 모아 놓는 게 낫겠어. 언제든 부를 수 있게 말이야. 일단 해보자.”
* * *
누각을 걸어 나오자 초록 잎이 무성한 대로가 펼쳐졌다. 대로의 양쪽으로 는 다른 신입생들의 주거 건물이 줄지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지내는 숙소는 이준의 조원들이 지내는 누각에 비해 조금 단촐하고 낡아 있었다.
길 위로는 신입생들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 입구 쪽에 집합해 있는 듯 했다. 준을 비롯한 네 명은 망설임 없이 대로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마침내 준이 세 명의 조원들과 함께 길 끝에 도착하자, 신입생들이 환히 웃으며 환호를 해댔다.
대로의 한쪽에는 예닐곱 명쯤 되어 보이는 재학생들이 서 있었고, 그 뒤로 또 다시 시끌벅적 떠드는 재학생 한 무리가 보였다.
여덟 명의 재학생의 맞은편에는 이준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태준이 서 있었다. 그는 동기들과 함께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재학생들과 대치 중이었다.
“괜히 시간 끌게 하지 마, 신입생들이 상납금 내는 건 본원의 오랜 전통이라고. 순순히 주는 게 나을 거야. 어차피 뺏길 거 몸이라도 성한 게 낫지 않겠어? 게다가 이번에 상납금을 거절하면 앞으로 더 피곤한 생활이 펼쳐질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재학생이 으름장을 놓았지만, 하태준은 지지 않고 이에 맞섰다.
“신입생들이 상납을 해야 하는 불문율이 있는 건 맞지만, 그래봤자 두 세력에게만 상납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만일 다른 세력이 추가로 가져가고 싶으면 신입생들의 불의 힘을 가져간 두 세력에게 요구해야 하고요. 우린 이미 두 세력에게 불의 힘을 넘겼으니 할 도리를 다 한 거 아닌가요? 이렇게 끝없이 찾아와서 달라고 하면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죠?”
“하하하. 보통은 그렇지. 그런데 너희들은 꽤 여유가 있으니까 말이야. 아주 대견하게도, 불의 힘 쟁탈전에서 재학생들의 불의 힘을 빼앗았잖아. 아주 유례가 없는 일 이었지. 그러니 우리도 조금 전통을 벗어나 보려고. 잘나신 후배님들이 그랬듯이 말이야.”
“흥!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실력으로…”
말싸움이 길어지자, 결국 재학생 측에서 실력 행사에 들어가려는 듯 살기를 피웠다.
“하…그래,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 실력으로 상납을 받겠다는거야. 실력으로 불의 힘을 빼앗았다고? 그럼 이번에도 네놈들 실력으로 네놈들 물건을 지켜보라고.”
“당신…”
비열한 웃음을 짓는 청년을 보며 신입생들 사이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럴 실력은 있고?”
그 때, 차가운 비웃음 소리와 함께 좌중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뭐라고…?”
청년은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신입생들 사이에서 네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 대장이야!”
네 사람의 출현에 주변에 있던 신입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준? 라훈을 쓰러뜨렸다는 녀석 말인가?”
‘이준’이라는 이름에 재학생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네가 이준이야?”
라훈은 본원 전체에서도 100위 안에 드는 실력자였으니, 결코 만만하게 생각할 상대가 아니었다. 심지어 라훈은 본원 강자 목록에도 이름을 올린 적이 있었다. 비록 3일밖에 유지하지 못했지만, 그곳에 이름이 등재 되었다는 것 만으로도 실력을 보증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멍청한 녀석. 본원에는 라훈보다 강한 놈들이 넘쳐 난다고.”
청년은 준의 등장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은 듯 당당하게 소리를 쳐댔지만, 아무리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가장해도 목소리가 떨리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준은 그런 청년을 보며 피식 웃은 뒤 천천히 동기들을 훑어봤다.
“뭐…그렇다고해서 이렇게 무작정 불의 힘을 빼앗으려 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앉아서 뺏길 수는 없지. 그랬다가는 본원에 들어오고도 몇 달이나 불의 힘없이 지내야 할테니까 말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두 팀에게만 상납하면 됐던 것 아닌가? 전통이라고는 해도, 위 아래를 확실히 하고, 더 열심히 수련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거지, 정말로 신입생들이 영영 강해지지 못 하도록 하려는데 목적이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보다 정말 괜찮겠어? 나는 그렇다 쳐도, 이쪽은 46명이나 되는데 말이야.”
대장격인 준이 당당히 선배들에게 맞서자 자신감이 생긴 신입생들이 일제히 그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 살기등등한 풍경에 재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준 너 이 자식… 감히 머릿수로 우릴 겁주려 해? 우리가 ‘푸른 뫼’쪽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청년은 지지 않으려는 듯 또 다시 악을 써댔다. 하지만 준이 말없이 등에 메고 있던 검은 송곳을 뽑아들자, 결국 청년이 우물쭈물거리다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이 자식들…좋아. 한번 해보겠다는 거지?”
청년은 분을 참지 못 하고 슬금슬금 물러서면서도 신입생들을 노려보았지만, 그의 실력으로는 신입생들 전체는커녕 준조차도 어찌하지 못 했다.
결국 재학생들은 겁에 질려 하나 둘 자리를 떴고, 그들이 모두 물러나자 신입생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준 대장, 정말 고마워.”
잠시 후, 태준이 웃으며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말끝마다 꼬박꼬박 준을 ‘대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같은 신입생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그나저나, 불의 힘 쟁탈전에서의 일이 이렇게까지 선배들의 심기를 건드릴 줄은 몰랐네.”
“그야 처음 있는 일이니까…신입생들에게 불의 힘을 빼앗겼다는 게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지. 뭐…이미 저질러진 일이니까. 그런 것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하태준은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 혹시 네 세력을 하나 창설할 생각은 없어?”
“응?”
예상치 못한 제안에 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헤헤. 대장도 이미 아겠지만, 본원 내에는 크고 작은 세력들이 복잡하게 분포 돼 있고 숫자도 적지 않으니까. 게다가 본원의 분위기상 세력끼리의 연합이 규제 되지도 않고. 오히려 독려하는 추세거든. 아무리 날고 기는 천재라 해도 이곳에서 혼자 살아남기는 어려우니까 말이야. 게다가 ‘천계의 탑’에서 보다 높은 등급의 수련 구역을 차지하려면 더더욱 세력이 필요하고. 혼자서 좋은 곳을 차지하고 있으면 다른 세력들이 가만두질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 신입생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세력을 만들자, 이 얘기야?”
“이준 대장의 실력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고, 팀원들도 하나 같이 만만찮은 인물들이잖아. 하지만 네 명으로는 머릿수가 부족하지 않겠어? 우리가 그 때 ‘검은 사자’ 부대를 상대할 때 했던 일이 우리를 상대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이준 대장과 함께 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 대장에게 빚진 것도 있고, 앞으로 자기들도 본원에서 살아남으려면 믿을만한 대장 밑에 있고 싶어 할 테니까.”
상당히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준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길 뿐, 선뜻 답을 내놓지 않았다. 섣불리 세력을 만들었다가는 더 심하게 견제를 당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준 대장.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지금 이 기회를 놓쳐선 안돼. 새 세력을 만들려면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해. 신입생이 본원에 들어오면, 여러 세력에서 아이들을 포섭하려 한다고. 시기를 놓치면 실력 있는 아이들은 모두 뺏길 거야. 늦으면 늦을수록 더 많이 뺏기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해. 그 때가 되면 제대로 된 세력을 만들 수 없을 거야.”
그러자, 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태준이 그에게 빠르게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본원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거야?”
“헤헤, 내가 본원에 들어간 친구 한 명을 알거든. 자, 어서 결정을 내려줘. 만일 대장이 괜찮다고 한다면, 내가 신입생들을 설득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