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새로운 생활
“서 장로님! 저희 아직 진 게 아닙니다!”
한편, 라훈은 대투사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서 장로에게 항의를 해대고 있었다.
“맞습니다, 아직 싸울 수 있어요!”
나머지 하얀 사자 부대원 네 명도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시간만 더 있으면 모든 신입생들을 전멸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들의 생각이 영 틀린 것은 아니었다.
“모두 조용히 못할까!”
하지만 서장로의 뜻은 단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준의 필살기가 가진 위력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너희는 모두 산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했나 보구나. 이미 이번 경기가 끝났음을 공표했으니 그리 억울하다면 1년 후의 쟁탈전에서 다시 승부를 보거라!”
결국 서 장로의 벼락같은 호통 앞에 그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 했다.
그들을 따끔하게 혼을 낸 뒤, 서 장로는 이준을 비롯한 신입생들을 바라보며 인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번 불의 힘 쟁탈전에서 이긴 신입생들은 모두 20일치의 불의 힘을 상으로 받게 될 것이다. 특히 우수한 모습을 보였던 이준, 이은, 나래, 하늘, 이렇게 네 친구는 별도로 초록 불 수정카드와 30일치의 불 에너지를 더 수여하마.”
“초록 불 수정카드요? 그게 뭐죠?”
“하하. 본원에서 사용하는 불 수정 카드는 낮은 것에서 높은 것 순으로 검정, 파랑, 초록, 빨강, 보라, 이렇게 다섯 종류로 구별 된단다. 너희에게 먼저 배급 되었던 건 가장 낮은 등급의 검정 카드지. 그 카드는 천 년의 탑 2, 3층에서 훈련할 수 있는 출입증으로도 쓰인단다. 파란 카드는 3, 4층, 그런 식으로 점점 올라가는 거지. 수정 카드의 등급을 높이고 싶다면 본원에서 불 의 힘을 얻어 카드를 바꿔야 한다. 보통 검정 카드에서 파랑 카드로 바꾸는 데에 100일 분량의 불의 힘이 필요하지. 파랑 카드에서 초록 카드로 바꾸는 데에는 200일이 필요하고 말이다. 너희가 지금 초록색 카드를 가지게 됐으니 300일치의 불 에너지를 절약했다고 볼 수 있지. 절대 작은 액수가 아니니 아쉬워 말거라. 다른 본원 학생들도 대부분은 파랑 카드를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300일의 불 에너지요?”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의 보상에 준을 비롯한 신입생들은 입을 떡 벌리고 서로를 바라봤다.
설명을 마친 서장로는 손을 휘저어 네 장의 초록색 카드를 소환해 준과 그 팀원들에게 건넸다.
“상은 이미 안에 넣어뒀단다. 검정 수정 카드에 든 불 에너지를 이리로 옮기고, 빈 카드는 나에게 반납하거라.”
준과 나머지 셋은 혹여나 서 장로가 포상을 취소할까 겁이라도 나는 듯 빠르게 불 에너지를 옮긴 뒤 빈 카드를 서 장로에게 넘겼다.
“좋다. 이번 불 에너지 사냥대회까지 무사히 통과했으니, 진짜 본원에 들어가자.”
노인은 말이 마치자마자 곧바로 뒤를 돌아 깨어진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계단은 산언덕을 따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드디어 본원에 들어가는구나…!’
서 장로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이준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본원에 들어가기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 부었던가. 드디어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가자.”
그리고 한참을 걸어 마지막 층계를 올랐을 때,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광경이었다. 분지 안의 숲 속에는 기이하리만치 높은 건물이 덩그러니 서있었다.
“하하, 녀석들. 가람 아카데미의 심장, 본원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이제 쟁탈전도 끝났으니 모든 신입생들은 나를 따라 본원에 들어갈 수 있다. 단, 이곳에서 적응하는 것은 쟁탈전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니, 마음 단단히 먹거라!”
철커덩.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천천히 열리고, 따뜻한 햇살이 새어 들어오며 빛 한 줄기가 땅을 밝혔다.
“이준, 너희 넷이서 지낼 곳이다.”.
“넷이요?”
넷이라는 말에 준을 비롯한 모두가 화들짝 놀라 노인을 바라봤다.
“서 장로님, 저랑 은이 같은 다 큰 여자애들에게 저 남자애들이랑 같이 살라구요?”
“하하, 윤영아. 이 누각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방도 여러 개 있으니 너희끼리 한 침대 쓸 일은 없다. 걱정 말거라.”
서 장로는 윤영의 질문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래. 그런데, 너희 조원 중 나머지 한 명은 왜 보이질 않는 거냐?”
“그게…”
서 장로의 물음에 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갔어요. 검은 사자 부대의 실력을 보고 나서 저희를 버린 거죠.”
그러자, 윤영이 대신 나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오히려 자신들을 버리고 간 배신자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못하는 준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도망갔다고? 참 생각이 짧은 친구구나. 흠… 그래, 그렇다면 그냥 앞으로는 너희 넷이서 한조로 다니거라. 미리 말을 해주자면, 이 본원에서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혼자서 버티는 아이는 없다. 개인 서열 다툼 이상으로 치열한 게 세력 간의 다툼이니까.”
“본원이 그런 분위기인가요? 본원에서 제재하지는 않고요?”
노인의 말에 윤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허허. 제재할 건 또 뭐가 있겠니? 본원은 오히려 이런 경쟁을 추구한단다. 다른 사람들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으려면 자기 실력을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수밖에 없지. 적자생존이야 말로 세계를 유지시키는 기본 규칙이란다. 나는 본원이 고민 걱정 없는 유토피아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런 나태한 환경에서 영웅이 탄생할 리 만무하지.”
서 장로는 자신의 철학을 담담히 밝혔다.
“게다가 쟁탈전에서 뭔가 깨달은 것이 있지 않니? 실력이 뛰어난 오합지졸 다섯이 그보다 실력이 못하지만 똘똘뭉친 다섯에게 질수도 있단다. 쟁탈전에서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오늘부터 너희 넷이 한 덩이가 되어 본원에서의 싸움을 헤쳐나가거라.”
“네.”
오하늘이 짤막하게 답을 하자, 이은과 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 장로의 말대로였다. 쟁탈전에서 개인의 실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팀웍이었다. 강자들이 수두룩하게 모인 본원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휴, 좋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뭉쳐 다니는 편이 낫지.”
윤영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한번 삐죽이고는 준을 위아래로 두어번 정도 훑었다. 악감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간 해온짓이 있어서인지, 곧바로 한 식구처럼 지내기에는 조금 민망한 모양이었다.
한편 준은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해왔지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서 헤쳐나가야 했다. 그 전에는 원하든 원치 않았든 혼자였고.
하지만 이제부터는 ‘언제나 함께 할’ 동료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기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하, 너희들끼리 합의가 잘 된 것 같아 다행이구나.”
네 사람이 빈틈없이 한 팀으로 알맞게 구성된 것을 확인한 서 장로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날이 벌써 많이 어두워졌으니 각자 짐을 잘 정리하고 오늘은 이만 쉬거라. 내일부터는 본원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수업 일정은 없나요?”
‘구경’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윤영이 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본원에서는 딱히 수업이랄 게 없단다. 충분한 불 에너지를 들고 천 년의 탑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되니 말이다. 그곳에서 수련하는 게 그 어떤 수업을 듣는 것보다 더 값질 것이야. 여튼, 별도의 수업은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외에도 본원에는 ‘무투기관’이나 ‘수련법 방’같은 곳도 있으니 잘 찾아보거라. 어떤 수련법이나 무투기를 익히고 싶을 때 쓸 만한 장소이지. 그리고 앞으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날 찾아오면 된다.”
서 장로는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사라졌고, 이로써 공식적인 본원 생활이 시작됐다.
* * *
서 장로가 자리를 뜬 뒤 준의 팀원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 앞으로 자신이 생활할 숙소를 정리했다.
그리고 준의 방안에서는 칠색 이무기가 열심히 하늘 사자의 정수를 핥아대고 있었다.
“이 욕심쟁이……”
이준은 자신의 팔목을 휘감고 있는 칠색이무기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스승님? 어때요? 구름불꽃을 찾으셨나요?”
“아니 아직.”
약로는 가볍게 웃으며 눈으로 부지런히 사방을 살폈다.
“그러나 또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란다. 네가 본원에 들어온 뒤 뭔가 이상한 기운이 하나 감지된단다.”
“이상한 기운이요? 천지의 불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거의 그럴 것 같구나. 네가 필요로 하는 물건일 가능성도 있다. 그 이상한 기운의 발원지는 본원의 북쪽이다. 나중에 한번 가보자꾸나.”
스승의 말에 준의 얼굴에 대번에 웃음꽃이 피었다. 일단 여기까지 온 이상, 구름 불꽃을 반드시 손에 넣고 싶었다.
“본원에서는 많은 일들을 네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거다. 내가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금세 누군가에게 들키고 말 테니까.”
“걱정 마세요. 지금까지는 제가 스승님께 너무 의지한다고 걱정 하셨잖아요. 이제 제가 스스로 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실 거예요.”
* * *
이른 아침, 누각의 대청에서 두 사람이 빠르게 교차하며 염력을 뿜어대고 있었다.
대청 한 켠에 놓인 의자 위에서는 이은이 배시시 웃으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재깍 고개를 돌려 발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오라버니 일어났어요?”
“응.”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대청 위의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둘은 뭐 하는 거야?”
“요 며칠 사이 전투를 하면서 염력이 많이 향상됐나 봐요. 덕분에 둘 다 7성 대투사가 돼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하고 싶다며 아침부터 저 난리를 피우고 있는 거예요.”
“뭐? 승급했다고?”
준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과연 외원 최고의 유망주다운 재능이었다.
“은아, 그럼 너는? 지금 계급이 어떻게 돼?”
준은 고개를 돌려 이은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이준을 놀라게 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가 은빛성을 떠날 당시만 해도 이은은 투사에 불과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대투사가 되어 있었다. 약로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성장 속도였다. 게다가 은은 준보다 더 어렸다.
“저도 7성이예요. 하지만 불의 힘 쟁탈전에서의 경험이 저에게도 많은 도움이 됐나봐요. 아마 사흘안에 8성 대투사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은은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와…!”
준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백성찬을 제외한 나머지 넷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팀은 그야말로 천재들만 모아놓은 듯 했다.
게다가 이윤영의 할아버지 역시 외원의 부원장에, 투황 최고 단계에 이르러 있으니 이 역시 그녀의 성장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듣기로는 오하늘의 배후는 집행부의 수장이라고 했다. 집행부는 가람 학원의 군대나 다름없었으니 그의 배경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은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약로조차 몇 번이나 그녀의 배후에 대해 감탄해마지 않았으니, 배경을 놓고 따지자면 가람 학원 전체를 뒤집어보아도 그녀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쾅…!쾅…!
그렇게 이준이 팀원들의 실력에 혼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던 그 때,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은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