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시간 싸움
이은은 준에게 충고를 마친 뒤 곧바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윤영이랑 오하늘은 방금 전의 전투로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야. 한 명을 제대로 맡기도 힘들 수 있어. 나도 한 명 정도 밖에 상대하지 못할 것 같고. 그럼 상대편에 한 명이 남잖아.”
“나는 그나마 나아. 오하늘은 아까 수열이라는 선배와 싸우면서 염력이 거의 바닥 난 상태야. 이준이 준 연금비약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렇게 단시간 내에 회복 했을리는 없지… 게다가 이번 상대는 수열보다 훨씬 강해 보이고.”
이윤영의 목소리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승산이 있어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안심하라고. 염력은 얼마 남지 안았지만 아직 사람이 많잖아. 짧은 시간 안에는 우릴 어떻게 못 할 거야. 이준 대장 너희 쪽에서 누군가가 적을 먼저 처리하고 우리 쪽에 힘을 실어주면 바로 상승세를 탈 수 있을 걸.”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입생 중 한 명이 말했다.
“맞아. 우리가 최대한 오래 붙잡아두고 있을 께. 그렇지만 결국 마지막 승패는 이준 대장 너한테 달려 있어. 지금 우리 상태로는 5성 대투사 하나 이기기도 벅차니까. 우리 실력은 아직 8성에서 9성 무투사니까 말이야.”
준은 다른 신입생들이 자신을 믿어주자, 왠지 모르게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친구’라고 부를만한 것이 없었던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대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좀 맡길게. 상대 한 명을 잘 묶어두고 있으면 내가 최대한 빨리 한 사람과의 전투를 끝내고 너희 쪽에 합류해 마지막으로 처리하지.”
“좋아! 해보자고!”
“힘내, 이준 대장. 꼭 이겨!”
심지어 옆에 쓰러져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신입생들도 어거지로 몸을 일으켜 준을 응원하고 있었다.
준은 이은을 비롯한 세 명과 눈빛을 주고받고는 검은 송곳을 꽉 붙들었다.
“이준은 내가 맡지. 나머지 사람들은 한 사람당 하나씩 맡고, 남은 한 명은 저 신입생들을 빨리 해치운 다음 신속히 목표를 바꾸는 걸로 하자.”
한상철이 지시를 내리자, 시커먼 옷을 입은 재학생 무리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들은 사냥감을 찾는 맹수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각자의 상대 앞에 나타났다.
준은 실눈을 뜨고 자신의 얼굴 앞에 나타난 한상철을 응시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체격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몸에서 어두운 황금색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자, 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런 성질의 염력을 다룰 줄이야…’
황금속성 염력은 공격력과 방어력에서 정평이 난 속성으로, 전기 속성의 염력보다도 훨씬 드문 속성의 염력이었다.
그리고 손에 든 무기를 보니 상대도 근거리 공격형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준 역시 근접전에는 자신이 있다는 점 정도였다.
잠시 후 준의 몸에서 푸른색의 염력이 일렁이기 시작하자, 한상철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6성 대투사? 서영수를 이길 만 하군. 이 정도면 본원 일년차인 재학생들이랑 비등한 실력이겠어.’
곧이어 준의 형상이 흐려지며 한상철의 품안으로 파고 드는 순간, 다른 사람의 머리통한만 주먹이 곧바로 준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이런!’
준은 바위가 떨어지는 듯한 묵직한 일격에 화들짝 놀라 두팔을 들었다.
쿵!
낮은 소리가 울리며 두 사람이 부딪히고, 주먹에서 쏟아져 나오는 육중한 힘 앞에 준의 온 몸이 짓눌리는 듯 했다.
‘척력장!’
준은 순간적으로 한 팔을 빼내어 ‘척력장’을 펼쳤다. 최근에는 거의 사용해본 적이 없는 무투기였지만, 이미 대투사 수준에 오른 그가 펼치는 척력장은 그 위력에 있어서는 완전히 다른 무투기가 되어 있었다.
퍽!
형태 없는 염력이 자신의 가슴팍에서 폭발하자, 상철의 곰 같은 거구가 살짝 뒤로 밀려났다.
“호오…제법 희귀한 무투기를 다룰 줄 아는 군.”
그러나 바위도 깨뜨릴만한 위력의 무투기 앞에도 상철은 흥미롭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체격만으로도 반칙이잖아…’
준은 위로도, 옆으로도 평범한 사람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한상철의 몸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황금 속성의 염력까지…동년배 중에 이토록 강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염력을 끌어 모은 뒤 ‘대지의 불꽃’을 불러냈다. 몸에 부담이 가는 ‘천계의 불꽃’을 사용하지 않고 눈앞의 이 바위 같은 사내에게 대적하려면 ‘대지의 불꽃’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준의 손끝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렁이며 춤을 추자, 늘상 여유롭던 한상철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연금술사였냐?”
투기대륙에서 실제 화염을 불러 올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연금술사가 갖가지 마수 체내 혹은 대륙에서 얻은 불씨를 활용하는 것.
두 번째는 불 속성의 염력을 사용하는 강자가 불을 끌어내는 것. 하지만 자신의 염력으로 실제하는 불꽃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투왕 계급 이상이어야 했으니, 지금 준의 손에서 타오르는 것은 실제 불꽃임이 틀림이 없었다.
곧이어 준이 발로 땅을 구르자, 맑은 소리와 함께 돌이라도 녹일듯한 새파란 불꽃이 상철을 향해 날아들었다.
상철은 준이 불러낸 불꽃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지 못 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온 숲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정도의 불꽃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그는 피하지 않았다. 황금 계열 염력의 가장 큰 장점은 압도적인 공격력과 방어력에 있었다. 반면 속도가 떨어지는 것이 가장 큰 흠이기 때문에 이제와서 달아난다 해도 그 불꽃을 끝까지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흑색 사자부대의 대장이 신입생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는 것은 그의 성격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아아!”
상철은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온 몸의 염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거대한 바위덩이 같은 몸이 어둑어둑한 금색 염력 갑옷으로 뒤덮이며 열기에서 그를 지켜주었다.
‘빌어먹을…그래도 뜨겁군. 대체 뭐야 이 불꽃은…!’
그러나 염력갑옷으로도 대지의 불꽃을 완전히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상철은 시나브로 염력갑옷을 꿰뚫고 침범하는 열기를 느끼는 순간, 곧바로 준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승부를 서둘러야 했다.
황금빛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대기가 일그러지는 듯한 압박감이 준의 몸을 덮쳤고, 준은 곧바로 푸른 화염을 주먹에 모아 상대의 주먹에 맞섰다.
쾅!
두 개의 강대한 염력이 맞부딪히자 굉음과 함께 주위에 있던 나무가 쓰러져 나가고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큭…!”
잠깐의 힘싸움 끝에 결국 밀려난 것은 준이었다. 아직 그 위력을 완벽하게 끌어내지 못하는 천지의 불꽃보다는 한상철의 힘이 한수 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상철 역시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겨우 대투사급의 불꽃이 이 정도 온도라니…제 아무리 대담한 한상철이라도 모골이 송연해질만한 열기였다.
준은 전술을 바꿔 위력을 포기하고 속도를 높였다. 그는 민첩함을 내세워 서영수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상철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새파란 불꽃이 어린 주먹을 날려댔다.
이에 맞서 상철은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은 그 거대한 몸과 단단한 염력으로 버텨내다가 한번씩 육중한 힘이 담긴 주먹을 휘둘러 반격을 가했다.
* * *
윤영과 하늘은 그야말로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다. 전투를 시작한지 불과 반각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이미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오하늘의 공격이 풍겨대는 살기에 검은 사자 부대원들이 겁을 먹지 않았다면 진작에 패배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반면 이은은 금빛의 염력을 칼날처럼 쏘아대며 바람처럼 이리저리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과 윤영의 체력이 바닥난 것을 고려해 전력으로 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세 곳에서 일어나는 전투 외에 가장 혼란스러운 곳은 바로 열 다섯 명의 신입생과 검은 사자 부대원 한 명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 이었다.
신입생의 머리수가 많은 건 사실이나, 그들도 서영수의 조원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난 뒤라 멀쩡한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 상태로 5성 대투사 정도의 실력을 가진 강자와 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1각이 채 되기도 전에 열다섯 신입생 중 다섯 명이 검은 사자 부대원에게 중상을 당해 전투에서 빠졌고, 그 중 열 명이 겨우 남아 힘겨운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손발이 썩 맞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1각에 서너 번씩 큰 상처를 입으며 전투력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공터에서는 총 다섯 개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고, 승기를 잡고 있는 것은 오직 이은뿐이었다.
특히 빠른 속도로 패색이 짙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오하늘 이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수열과의 전투가 너무 큰 타격이었다.
수열도 오하늘도 상당히 격렬한 전투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부상은 없었더라도 이전 전투에서 가장 많은 염력을 소진한 것은 바로 그였다.
그리고 그의 체력이 바닥난 순간, 상대가 번개처럼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작은 칼로 그의 팔을 그어 버리고 말았고, 결국 오하늘은 팔에서 새빨간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상대는 오하늘이 힘을 잃고 자리에 쓰러지자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주먹을 들었다.
오하늘은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맥없이 상대의 일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적의 주먹이 그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코에서 피가 흐르며 짙은 살기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크으으…”
이윽고 그의 목에서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신음 소리가 터져나오며 두 손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체처럼 힘이 없던 그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이었다.
쾅!
그리고 오하늘의 주먹이 상대의 주먹과 맞부딪히는 순간, 검은 사자 부대의 재학생이 뒤로 밀려나며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외원의 사신은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동골이 풀린 채 서서히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쳇.”
검은 사자 부대원은 기진맥진한 하늘을 보며 콧방귀를 뀌고는 재빨리 그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금 날아갔다.
쿵!
하지만 오하늘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가 막 발을 떼려는 순간, 그의 왼쪽에서 갑자기 눈부신 금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괜찮아?”
이은이 질문을 던지자, 오하늘의 동공에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움직일 힘도 없어보였지만, 이를 악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맡기고 조금 쉬고 있어. 내 쪽은 이미 끝났으니까.”
이은은 오하늘의 어깨를 한번 툭 건드린 뒤 다시 온 몸에서 금색 섬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니. 빨리 끝내고 윤영을 도와줘야지.”
하지만 오하늘은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너 지금 그럴 상태가…”
그리고 이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신은 다시 몸을 움직였고, 오히려 이은이 오하늘의 뒤를 따라 공격을 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정말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이은은 비틀거리면서도 적을 향해 달려 나가는 오하늘을 바라보며 즉시 금빛 채찍을 만들어 휘둘렀다.
금색 채찍은 보일 듯 말듯한 금빛 불꽃으로 뒤덮여 있었고, 채찍 꼬리가 흔들리는 속도는 가히 번개와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