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어부지리
영배는 멍한 표정으로 얻어맞은 부위에 치료제를 발랐다. 붉은색의 연금비약이 얼굴 위에 흐르자 시원한 느낌이 퍼져나가며 순식간에 상처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저장반지에서 파란 빛이 나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준에게 내밀었다.
‘86?’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준은 상대가 순순히 카드를 건네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동료, 아주 심보가 못 된 것 같군. 그 녀석에게 아까 그 한 방은 꼭 되갚겠다고 전해.”
나무 기둥에 기대 있던 영배가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준은 성찬 대신 사과 인사를 건넸다. 이미 항복을 한 상대를 갑자기 걷어차다니…좋게 봐주기는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 결과로, 영배라는 사내는 성찬에게 상당히 악감을 품게 된 것 같았다.
“후…그런데 말이야. 우리 세 조는 어떻게 무너뜨렸을 수 있었겠지만 전승 무패로 본원까지 들어갈 순 없을 거야.”
“나도 알아. 그 흑백 사자라고 불리는 두 조 때문이겠지.”
“뭐? 알고 있는 게 꽤 많군.”
준이 ‘흑백사자’에 대해 알고 있자, 영배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어쨌든 이 ‘불의 힘 쟁탈전’라고 불리는 건 본원에서 만들어진 거야. 많은 신입들이 본원에 온다는 것만으로 다들 기고만장해져 있기 때문에 본원에서 이런 대회를 통해 좌절을 겪게 하는거지…처음부터 지라고 만들어 놓은 룰이라고.”
“그리고 만에 하나 신입생들이 기고만장한 상태로 본원에 들어가지 못 하도록 준비한 최후의 보루가 그 ‘흑백사자’다. 뭐 이런거야? 그렇다 해도 이건 너무한데…? 선배들이 신입생들 기를 죽이는 것 치고는 도를 지나쳤어. 그러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라고. 우리가 아니었더라고 다음 해, 아니면 그 다음 해에는 반드시 벌어졌을 일이야.”
준은 상대의 말을 가볍게 일축한 뒤 아직 공터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료들을 바라봤다.
‘열다섯? 흠… 애매하네.’
많은 수의 본원 학생들이 바닥을 기고 있었지만, 신입생도 15명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재학생이 쓰러졌고, 공터에는 승리의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최종적으로 남은 것은, 방금전까지 싸우고 있던 그 15명 이었다.
“하하! 모두들, 이제 다 끝났으니 동료들부터 돌보자고. 이 치료제를 바르거나 부어줘. 다른 사람들은 재학생들이 갖고 있는 카드를 수거해줘!”
“좋아!”
지금같은 분위기에서는 그야말로 준의 말이 곧 법이었다. 신입생들은 마치 준의 부하라도 된 것처럼 곧바로 준의 말에 따라 일부는 약을 받아 동료들에게 발라주고, 일부는 카드를 받으러 쓰러진 재학생들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별 일 없지?”
준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땀을 흘리며 서있는 이은, 윤영, 그리고 오하늘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은과 윤영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오하늘은 상당히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수열과의 전투에 상당한 염력과 체력을 소진한 것이 분명했다.
준은 지친 세 사람을 위해 저장반지를 뒤져 기력의 조각을 꺼내들었다. 승리의 주역이니, 이 정도는 전혀 아까울 것이 없었다.
“이걸 먹고 나면 염력이 회복 될 거야. 한 번 먹어봐.”
이은은 웃으며 연금비약을 받아 들었고, 윤영과 하늘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회기단을 쥐고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 * *
“껄껄.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군요. 재학생 세 조를 단숨에 집어삼키다니.”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드넓은 숲의 하늘 위에서 이 전투를 내려다보던 두 노인은 미처 예상하지 못 했다는 듯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이준이란 녀석, 실력이 아주 좋은 듯 하더군요. 서영수를 이렇게 빨리 패배시킬 줄이야. 소리 무투기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흐트러짐이 없더군요. 아주 대단해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냥 대회가 끝나면 대건에게 정보를 좀 달라고 요청할 생각입니다. 잠재력이 엄청난 것 같아요. 본원에서도 열손가락 안에 꼽겠어요.”
“그런데 아직 끝난 게 아니니 말입니다. 흑백 사자가 남아있으니까요.”
* * *
한편, 준은 자신의 손에 들린 열다섯 장의 파란색 카드를 바라보며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오, 올해 신입들이 하나 같이 보통 내기가 아니군. 나머지 8조를 다 무너뜨리고 말이야. 덕분에 귀찮은 일을 덜었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기 가득한 준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흑백…사자?”
나뭇가지 위에 갑작스레 나타난 다섯 사람의 존재에 공터에 있던 모두의 표정이 급변했다.
먹물을 들이 부은 듯 시커먼 옷으로 전신을 둘러싼 다섯 명…흑백사자 중 ‘흑’팀이 분명했다.
“한상철? 너희도 따라 온 거야?”
다섯 사람이 나타나자 나무기둥에 기대어 기운을 회복하고 있던 영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는 길에 신입생을 만나 소식을 들었지.”
다섯 사람 중 압박감이 들 정도로 몸집이 비대한 사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준 일행에게 당해 드러누워 있는 세 명의 강자를 바라보며 혀를 차댔다.
“쯧쯧. 너희 세 명마저도 신입생들한테 당할 줄이야. 대체 본원에서 뭘 한 건지.”
“올해 신입생들이 예전이랑 다른 걸 어떡하라고. 졌다 해서 이상할 게 뭐가 있어?”
“됐어. 한심하기는! 앞으로의 일은 내가 해결하지. 하지만 네놈들이 빼앗긴 불의 힘까지 찾아줄 수는 없어. 그건 자기 힘으로 지켜야 하는 거니까.”
한상철이라는 사내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준을 바라보며 하품을 한번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이준이지? 그 나이에 서영수를 이기다니…신입생들을 끌어 모을만 하군. 하지만 너무 건방져.”
“당신들이 본원에서 준비한 비장의 카드인가?”
준은 한상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바짝 긴장한 채 나머지 넷을 둘러봤다.
보아하니 다섯 중 넷이 서영수만 못 하지 않았고, 한상철이라 불리는 기골이 장대한 남자는 이미 대투사를 넘어 투령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듯 보였다.
“흑사자 부대라고 부르면 된다. 나는 대장, 한상철이다.”
상철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하얗고 빽빽한 치아는 그야말로 사자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좋은 소식 하나 알려주지. 너희 이야기가 이미 본원까지 들어가 그 안에서 꽤나 유명한 신입생이 될 것 같다. 물론 이번 ‘불의 힘 쟁탈전’의 마지막 두 팀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너희 같이 골치 아픈 신입생들을 쓰러뜨리는 거지. 그러니 무사하게 이 곳을 나가고 싶다면 그냥 카드를 내놓는 편이 좋을 거야.”
“선택지가 그것뿐인 거지?”
“생각보다 이해가 빠르군.”
한상철은 웃으며 아래쪽에 있는 신입생을 쭉 둘러보더니 다시 거만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머지 신입생들을 데리고 우리 한 조에게 덤볐어도 승산이 크진 않았을 텐데… 게다가 이미 세 조를 한 번에 상대하느라 기진맥진해있군. 결론적으로 너희만 쓰러뜨리면 간단하게 해결되겠어.”
상철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준은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검은 송곳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이은 윤영, 그리고 오하늘이 말없이 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열댓 명의 비교적 실력이 약한 신입생들까지도 이를 악물고 준에게로 다가왔다.
“왜? 한 번 죽어라 발버둥쳐 보려고?”
신입생들의 행동에 한상철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하. 좋아. 이 빌어먹을 숲에서 3일 동안 손을 쓰지 않았더니 온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으니까.”
“잠깐!”
그러나 한상철이 주먹을 꽉 쥐던 그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상철 형, 나 기억해? 지난 방학 때 우리 사촌 형 백겨울이랑 같이 만났었잖아.”
성찬이었다.
“백겨울? 네가 그럼 백성찬이냐?”
백겨울이란 이름을 듣자, 상철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맞아.”
상철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나오자 백성찬은 비로소 안도하며 웃음을 지었다.
“너도 이번 회차의 신입이고?”
“응.”
성찬이 끄덕이며 답했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상철 형, 우리 형 체면을 봐서라도 혹시…”
“흠…그래, 백겨울 얼굴을 봐서 넌 그냥 보내줄게.”
“음…”
한상철이 너무도 쉽게 자신을 놓아주겠다고 하자, 백성찬은 잠시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백성찬, 이미 충분히 많이 봐준 거야. 나는 흑사자 부대의 대장이고, 우리 동료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어. 지금 널 보내주겠다고 하는 건 이미 백겨울에 대한 예의는 다 갖춘 거야.”
그러나 한상철은 그의 동료들까지 놔줄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했고, 결국 백성찬은 꿀먹은 벙어리마냥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빨리 여길 떠나. 다른 놈들은 신경 쓰지 말고.”
“백성찬, 너 도망가려고?”
그 때, 준의 곁에 있던 윤영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차가운 목소리로 백성찬을 불러 세웠다.
“너 설마 우리가 진짜 팀이라도 됐다고 생각 한 거야? 서로 필요를 위해 잠깐 뭉친 것뿐이라고. 게다가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사람도 이준이고. 우리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다 그 녀석에게 빼앗길 거라고.”
“너… 이준이 이끌어주지 않았으면 너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 같아? 너 혼자서는 본원 재학생 한 명도 상대하기 힘들었을 텐데, 지금 같이 백 개가 넘는 불의 힘을 얻을 수 있었겠어?”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 간다는 사람 붙잡지 말자. 어차피 우리 조는 임시로 형성된 거니 구속할 이유도 없어. 다 본인 자유지. 백성찬 한 명 없다고 우리가 무너질 것도 아니고.”
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윤영을 말렸다. 그 역시 성찬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 억지로 잡아두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상태로는 그를 붙잡아 두는 것이 오히려 팀에 해가될 것 같았다.
“흥.”
윤영은 독살스런 표정으로 성찬을 노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동료를 배신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으니, 성찬은 이번 일로 완전히 그녀와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하늘은 거의 성찬을 벌레 보듯 하고 있었다. 그의 성품상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성찬에게 악감정을 품게 된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래. 너희는 저 놈이랑 같이 잘 해봐. 난 절대 못 해.”
신입생들의 따가운 눈총을 느낀 성찬은 준을 단단히 노려본 뒤 팔을 휘저으며 나뭇가지가 무성한 수풀 속으로 들어가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내가 말 했지, 저 녀석 별로라고.”
한 켠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영배가 불쾌한 표정으로 한 마디 거들었다.
“패배를 인정해. 흑색 사자팀은 우리랑 달라. 게다가 네 동료까지 떠났으니 너희도 이길 가능성이 줄어들었을 거고.”
사실 영배의 말이 맞았다. 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가슴에서 자꾸만 참을 수 없는 전의가 들끓었다.
“내가 저 친구들을 불러 모았으니 성공적으로 여기서 나가야지. 상대가 얼마나 강하든 절대로 물러나는 일은 없어.”
준의 한마디에 신입생들을 전신의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승패를 떠나서 최선을 다해 싸운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죽고 죽이는 살벌한 싸움판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준이 아니었다면 불의 힘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처참하게 패배하고 모욕당한 채로 본원에 들어갔어야 했다. 지금 그들의 가슴에는 수치심과 패배감 대신 전의와 투지가 들어차 있었다.
“하하, 배짱 좋군! 그렇다면 우리 검은 사자들이 이번 신입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봐주지.”
이 광경을 보자, 상철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달리 오만하고 싸늘한 미소가 아니라,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조심해. 한상철은 내가 맡을게.”
“오라버니, 저 한상철이라는 사람. 조금만 더 있으면 투령 계급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자예요. 평소대로라면 오빠가 이길 확률이 그렇게 높지 않아요. 그렇다고 선발 대회 때처럼 실력을 끌어 올리면 몸이 너무 많이 상할 거고…”
“하하. 괜찮아. 억지로 힘을 끌어올리지 않고도 다른 걸 빌려 이길 수 있을 거야.”
“져도 좋으니까 몸부터…알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