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대전투
준 일행은 눈을 감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잠깐 동안 찾아든 적막을 즐겼다. 약간의 흥분과 긴장감, 그리고 전투 뒤에 찾아올 막대한 보상을 떠올리자 그 짧은 몇 촌각간의 적막이 몹시도 즐겁게만 느껴졌다.
“왔다.”
마침내 준이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여는 순간, 나머지 네 사람도 동시에 눈을 떴다.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있던 수풀이 움직이며 열 개의 인영(人影)이 쏜살같이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곧이어 다섯 개의 기운이 준의 영혼 탐지 능력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내 사냥감이 모두 모인 것이다.
“좋았어…”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카드를 내놔.”
가장 먼저 달려온 청년이 가만히 앉아 있는 준을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까마득히 모른채로…
준은 함정에 걸려든 불쌍한 사냥감을 차갑게 비웃으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 다섯명이 모두 공터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선 순간…마침내 준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게 마지막이지.”
싸늘한 한마디와 함께 준이 검은 송곳을 움켜잡는 순간, 수풀 뒤에 몸을 감추고 있던 신입생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15명의 본원 학생들을 포위했고, 순식간에 두 배가 넘는 인원이 자신들을 에워싸자 청년의 낯빛이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서…설마…처음부터 함정이었나?”
“뭐…우연히 이 인원이 여기에 모이지는 않았겠지?”
청년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대충 적의 수를 헤아려보고는 다른 팀의 대장들을 향해 거래를 제안했다.
“영수, 단독으로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팀은 없는 것 같은데…어때?”
“좋아. 안 그래도 이번 선발전에서 5위 안에 든 녀석들이 얼마나 강한지 확인해보고 싶었거든.
사내의 말에 키 큰 청년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걱정할 거 없어. 신입생의 수가 많긴 하지만 다들 저 이준이라는 놈에게 기대서 잠깐 용기를 내고 있는 것뿐이니까. 결국 이준만 쓰러뜨리면 나머지 녀석들도 꽁무니를 빼면서 뿔뿔이 흩어지겠지.”
서영수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끄덕이며 웃었다.
“나랑 영배, 그리고 수열이가 맞은편에 있는 본원 학생 세 명을 맡고 있을게. 나머지는 신입생 무리들이랑 지금 바로 앞에 있는 두 예쁜 여학생을 막아줘.”
상대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전략을 세우자, 준 역시 잽싸게 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한 사람당 한 명씩 맡지. 남자들이 전면에 나서는 게 좋겠어. 은아, 너랑 윤영이가 다른 신입생을 도와 나머지 열두 명의 공격을 좀 막아줘.”
“알았어요 오라버니.”
이은은 대답을 함과 동시에 빠르게 이동해 다른 신입생들 사이로 자리를 옮겼다.
“내가 키 큰놈을 맞지.”
오하늘이 맞은편 쪽 세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 실실 쪼개는 놈은 나한테 맡겨.”
백성찬이 곧바로 다른 한 명을 지목하자, 서영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우리를 상대로 누구랑 붙을지 고를 줄이야.”
다음 순간, 본원의 강자 셋이 야수처럼 흉포한 기세로 눈 앞에 선 세명의 신입생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공터 위에서 수 십명의 투사들이 염력을 터뜨리며 맞부딪히자, 곳곳에서 광풍이 일며 나뭇잎들이 휘날리고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본원 학생들의 우두머리격으로 보이는 서영수라는 사내는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력면에서는 15명의 학생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분명했다.
쉬익—
거대한 검은 송곳이 바람을 가르며 서영수의 눈앞으로 치고 들어왔지만, 그는 중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양 가볍게 몸을 날려 상대의 공격을 피해냈다.
“이것봐라?”
그는 적의 공격이 가진 위력을 한 눈에 알아보고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소매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 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영수의 손에서 두 자루의 단검이 어지러이 춤을 추자, 준은 잽싸게 검은 송곳을 앞으로 내밀었다. 속도면에서는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 없었지만, 검은 송곳의 크기가 크기인만큼 웬만한 공격은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서영수의 단검에는 점점 더 속도가 붙었고, 종국에는 마치 두 마리의 매가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이곳 저곳에서 섬광이 번쩍여대 정신을 차릴 없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6성 대투사…본원 학생이라 그런지 역시 대단하군.’
준은 너무나도 압도적인 상대의 속도 앞에 자신의 손에 들린 쇳덩이를 휘두르는 것을 거의 포기한 채 급소를 지켜내며 계속해서 몸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세상은 넓군…가한 제국에서는 이 나이에 이정도 실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얘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한편, 자신과 실력이 비등한 영배와 붙게 된 성찬 역시 고전을 면치 못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은색의 장창이 전기를 뿜어내는 뱀처럼 쉴새 없이 움직였고, 영배 역시 이에 맞서 커다란 도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오하늘쪽은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수열이라고 불리운 청년은 무기조차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전신은 단단한 회백색의 바위 속성 염력에 둘러싸여 온 몸이 흉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오하늘 이었다. 그는 자신의 핏빛 장검을 꺼내 수열에게 맞섰고, 두 사람은 정말로 서로를 죽일듯한 기세로 상대에게 공격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공터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이 이따금씩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상대의 목이나 정수리를 향해 필살의 일격을 퍼부어대고 있다는 점 이었다.
나머지 열 둘과 붙은 신입생들 역시 쉽사리 승기를 잡지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개인의 힘이라는 면에 있어서도 신입생들은 본원의 학생들만 못 했고, 팀워크 라는 면에서는 더더욱 부족했으니 두배에 달하는 숫자로도 쉬이 승기를 잡지 못 했던 것이다. 윤영과 이은이 없었다면 진작에 본원쪽 학생들이 승기를 잡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은과 이윤영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대열이 갖추어지고, 결국 열 두 명의 본원 학생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 하고 서서히 고립되어 갔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지 대략 1각…마침내 본원쪽에서 먼저 피가 튀었다. 은과 윤영, 둘을 중심으로 한 신입생 무리가 열 두 명의 선배들 중 셋을 때려눕히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사이, 준도 상대의 수법을 파악하고 공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그가 검은 송곳을 쥐고 팽이처럼 몸을 휘둘러 거대한 폭풍을 일으키자,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서영수가 ‘퉁’하고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날파리처럼 정신없이 움직여대던 서영수가 떨어져 나간 순간, 준이 갑자기 검은 송곳을 바닥에 꽂으며 입을 벌렸다.
“크릉…!”
황금사자의 포효! 준이 본원에 들어가기 위해 밤낮을 새워가며 준비했던 소리 무투기가 드디어 그 위력을 선보이는 찰나, 서영수는 갑자기 머리가 쪼개지는 듯 아파오고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강렬한 음파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서영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황이 뒤집히고 말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시커먼 그림자가 자신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주먹이 그의 턱에 적중했다.
‘태초의 힘!’
쩌억…
푸른 불꽃에 휩싸인 준의 주먹이 꽂히는 순간, 대기가 요동치며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준의 주먹이 단숨에 서영수의 염력 갑옷을 박살내고 그의 머리통을 강타하자, 서영수는 이내 힘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져 피를 토했다.
이준은 얼얼해진 주먹을 흔들며 다시 검은 송곳의 손잡이를 붙잡은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영수가 이미 패했는데, 계속 싸울 생각인가?”
준의 한마디에 복잡하던 전장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영수가 졌다고?!”
다음 순간, 본원 학생들은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를 토하며 바닥을 기고 있는 서영수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 자식…… 그렇게 강하다는 소리야?”
영배와 수열 역시 전투를 멈추고 바닥을 기고 있는 서영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저 새끼, 가만두지 않겠어! 얘들아, 가자, 저 녀석들과 붙어보자고. 지금 여기서 신입생들한테 지면 본원에서 고개도 못 든다고!”
그 때, 누군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고, 일순 정적이 깨지며 세 개의 그림자가 준을 향해 돌격했다.
‘쳇…생각처럼 쉽지 않군.’
우두머리를 때려눕혀 전투를 마무리하려던 계획이 틀어지자, 준은 다시 검은 송곳을 손에서 놓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세 사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백성찬, 오하늘, 속전속결이야. 절대 봐주지 말라고!”
검은 송곳의 속박에서 벗어난 준의 속도는 종전의 두 배에 달했으니, 그를 향해 달려들던 셋 중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 쳐박혔다.
세 사람의 실력은 갓 대투사에 들어간 수준이었으니 6성 대투사인 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준의 염력은 6성 대투사 수준이었지만 그의 속도나 무투기, 힘, 기술 등을 종합해보면 실제로는 8성 대투사에 웃도는 실력이었으니 이제 막 대투사가 된 얼치기들 둘 셋이 모인다고 그를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 * *
한편 성찬과 영배는 아직도 막상막하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성찬의 무투기가 영배보다 뛰어나고 종류도 더 많았기 때문에, 싸움이 길어지면서 점차 그가 승기를 잡아갈 수 있었다.
반각 정도 싸움이 더 지속되자 마침내 성찬이 영배를 날려버렸고, 영배를 향해 은색 창을 치켜들자 영배가 먼저 나서서 항복을 선언했다.
영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백성찬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셋…?’
그러나 준의 발밑에 고꾸라진 세 명의 본원 학생을 보는 순간, 온 몸을 흠뻑 적신 땀이 말라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빌어먹을…!’
비록 지금까지 준을 따라다니며 얻은 것도 적지 않았고, 준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도 실감했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이 준보다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대와 자신 사이에 얼마나 큰 실력차가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바로 준을 영웅 보듯이 하는 다른 신입생들의 눈빛이었다.
‘웃긴 녀석들. 우리는 안중에도 없겠지. 이준 혼자였다면 절대 못했을 일이란 것도 모르고 말이야…빌어먹을 놈들! 제기랄!’
결국 그는 분을 참지 못 하고 이미 항복을 선언한 채 쉬고 있는 영배를 걷어찼다.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고르고 있던 영배는 갑자기 날아든 불의에 일격에 피를 토했지만, 백성찬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이…이게 무슨 짓이야! 항복했잖아!”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급소를 얻어맞은 영배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성찬의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의 분노는 준을 향한 것이었지만, 애꿎게도 분풀이 상대가 된 것은 영배였던 것이다.
그 때, 갑자기 이준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항복한 사람을 왜 또 공격해? 완전 무방비 상태인 사람을 때려서 뭐하려고?”
“쳇.”
그러자 성찬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이은과 윤영이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고, 준은 맘에 안 든다는 듯 혀를 한번차고는 영배에게 말없이 치료제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