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황금사자의 포효
“하하, 후배님, 기뻐하기엔 너무 일러. 아직 두루마리를 손에 넣은 것도 아니잖아.”
백성찬의 말대로 였다. 준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에는 아직 염력 결계가 남아 있었으니, 그 결계를 깨지 못하는 이상 그림의 떡이나 다름이 없었다.
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이은과 잠깐 눈빛을 교환한 뒤, 오른손으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염력 결계를 꽉 붙들고 왼손을 뻗어 천천히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러자 빨간 빛이 사방으로 터져 나오며 열기를 내뿜었다.
백성찬은 준이 2격 수련법을 손에 넣지 못하기를 빌고 또 빌며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준은 불덩이처럼 뜨거운 염력 보호막을 부수고 두루마리를 손에 넣는데 성공했다.
“하하! 좋았어!”
보물을 손에 넣은 준이 웃음을 터뜨리자, 백성찬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윤영과 오하늘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준의 손에 들린 붉은 두루마리를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오라버니! 축하해요!”
이은인 준이 엄청난 보물을 얻자, 제 일처럼 기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물건을 은에게 내밀었다.
“은아, 혹시 이거 너한테도 쓸모가 있을까?”
그리고 준이 2격 중급 수련법을 이은에게 건네는 순간,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모두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 속도 좋군. 2격 중급 수련법이라고…”
“제 정신이 아니군…”
“응?”
준이 자신에게 귀하디귀한 2격 수련법을 주려하자, 이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가 수련한 공법도 3격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불속성이잖아요. 당연히 오라버니가 가져야죠!”
“아니 사정이 좀 있어서… 가지고 있어도 쓸 수가 없어.”
하지만 준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붉은 두루마리를 이은에게 내밀었다.
“네가 안 가져가면 버릴 거야.”
결국 준이 반쯤 강제로 두루마리를 손에 쥐어주자, 이은은 우물쭈물하다가 그 물건을 받아들었다.
“고마워…사실 나도 고급 염력 수련법이 필요했거든.”
준에게 귀한 선물을 받은 은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2격 염력 수련법을 얻었다는 것 보다, 그것을 건넨 것이 준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더 기쁘게 했다.
“오라버니! 그럼 오라버니는 뭐가 필요해요? 내가 같이 찾아줄게요! 난 이걸 가지고 나가면 되니까!”
이은의 제안에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소리 무투기가 필요해.”
“네? 소리 무투기요? 고급 소리 무투기는 으음…정말 귀할 텐데 구할 수 있을까요?”
“그러게 말이야.”
“알았어요! 일단 찾아보죠! 여긴 정말 귀한 물건이 많은 것 같으니까요!”
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또 다시 보물찾기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각자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손에 넣기 시작했다.
백성찬이 손에 넣은 건 투명한 갑옷으로, 가한제국에서 율희가 이준에게 준 갑옷보다 더 뛰어난 물건이었다. 이윤영은 어디에 쓰이는 건지 모를 보라색 연금비약을 찾아냈다. 오하늘은 무투기를 하나 손에 넣었지만, 이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장서각이 닫히기 10분전 까지도 소리 무투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준이 소리 무투기를 구하는 것을 반쯤 포기할 무렵…갑자기 준의 영혼 탐지 능력에 무언가가 ‘탁’하고 걸려들었다.
“이 느낌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준은 화살 같이 그 기운을 붙잡았다.
하지만 결과는 아쉽기 짝이 없었다.
“오라버니! 설마?”
“찾긴 찾았는데 4격의 무투기야. 이 정도면…거의 쓸모가 없어.”
“그럼 어떻게 하죠? 계속 기다려볼까요?”
준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자, 이은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아니, 시간이 너무 없어.”
2격 염력 수련법을 넘기고 얻은 것이 4격 무투기라는 소리에, 이미 좋은 물건을 구하고 이준이 무엇을 구하는지만 눈이 빠져라 바라보고 있던 백성찬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됐어. 가자. 이건 등급이 너무 낮긴 하지만 일단 가져가봐야겠어.”
결국 준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통로 쪽으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이거 어떻게 하나, 이준 후배님, 내가 다 마음이 아프군.”
준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지 못하자, 신이 난 백성찬이 준을 비웃었다.
“뼈 부러지는 느낌이 그리운가보지?”
그러자, 기껏 장서각까지 들어와서 구한 게 4격 무투기라는 사실에 가뜩이나 짜증이 나있던 준의 눈에 순간 살기가 돌았고, 백성찬은 살기등등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준의 눈빛에 겁을 집어먹어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준이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려는 찰나, 갑자기 눈부신 빛이 쏟아지며 방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파앗!
다음 순간, 준이 맹수처럼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색의 빛줄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뿜어내고, 그 소리가 이내 눈에 보일 정도로 선연한 파장으로 변화해 온 방안을 휩쓸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모두들 눈을 휘둥그레 뜨고 허공으로 몸을 날리는 준을 바라봤다.
준은 마치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그 빛줄기를 붙잡았다. 하지만 준의 손에 붙들린 빛줄기는 미친 듯이 요동치며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오라버니, 빨리 물건을 뺄 수 있는지 확인해 봐요!”
이은의 목소리가 귓등을 때리자, 준은 황급히 오른 손으로 빛덩이를 꽉 붙잡은 채 왼손으로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펑!
하지만 투명한 빛은 맹렬한 기세로 준의 손을 밀어냈다. 반동이 어찌나 센지, 손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젠장! 이게 안 되다니!”
자꾸만 튕겨져 나가는 준의 손을 보며 백성찬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거! 그대로 잡고 있어요!”
바로 그 때, 이은이 준의 곁으로 날아가 그의 손에 들린 빛덩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투명한 빛덩이에서 빠져 나온 그녀의 손에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오라버니! 이것 봐요!”
그녀는 두루마리를 감싸고 있던 빛보다도 더 환하게 웃으며 신이 나서 준을 향해 달려갔다.
“은아! 정말 고마워!”
그토록 원하던 소리 무투기를 얻게 된 준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준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황금사자의 포효. 소리 무투기. 등급은 3격 고급, 사자와 호랑이의 울음소리로 모든 마수들을 복종하게 만든다. 영혼을 울릴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
설명을 읽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등급이 너무 낮으면 쓸모가 없고, 2격 이라면 지금으로는 익히기가 버거우니, 자신이 원하는 가장 좋은 무투기가 바로 3격 고급이었다.
이렇게까지 원하는 것이 딱 나와주다니 하고 하늘에 절이라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가자.”
준은 소리 무투기를 저장반지 안에 넣은 뒤 곧바로 이은의 손을 붙잡았다.
“쳇.”
이준과 이은이 신이나서 통로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백성찬의 손끝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고, 다섯 명이 모두 방을 떠나는 순간, 보물이 쏟아져 나오던 신비한 공간은 또 다시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 * *
철커덩.
굳게 닫혀있던 낡은 문이 천천히 얼리며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칠흑 같던 통로가 대낮 같이 환히 밝아졌다.
대문이 열리자, 다섯 사람이 한 명씩 계단으로 내려왔다. 마침내 장서각을 빠져 나온 그들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회색 망토를 걸친 노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보고 들은 내부 정보들은 일절 발설해선 안 됨을 명심 하거라.”
노인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자취를 감췄고, 곧이어 대건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다들 빈손으로 나오진 않았겠지?”
부원장의 질문에 다섯 명의 학생은 한결같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구나. 손에 넣은 물건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어쨌거나 수확이 있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이쪽으로 따라오거라. 일그러진 공간과 절대 접촉해선 안 된다.”
그들은 사고 없이 숨겨진 문을 통과했고, 문을 나온 뒤 뒤를 돌아보니 숨겨진 문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철통같은 보안과 수많은 보물, 기라성처럼 늘어선 강자들. 준은 가람아카데미가 왜 투기대륙을 뒤흔드는 세력 중 하나인지를 실감했다.
다시 어둡고 긴 통로를 지나 외원에 위치한 부원장의 집무실에 도착하자, 노인이 친절한 표정으로 다음 일정을 설명했다.
“좋다. 상품을 다 챙겼으니 이틀간은 아무것도 없이 편히 쉬거라. 그리고 이틀 후에는 본원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미리 하나 당부하자면, 본원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오로지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희들보다 먼저 본원에 간 아이들은 이미 본원에서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으니, 들어가자마자 그들을 꺾을 수는 없지.”
이 대목에서 대건은 다섯 명의 학생들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너희끼리 벽을 좀 허물고 최대한 뭉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가 좋을 수가 없을 테니.”
“설마 죽거나 불구가 되나요!?”
윤영의 어이없는 질문에 대건은 그만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이곳은 가람아카데미지 전장이 아니다. 다만…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하면 꽤나 괴로울 게다. 매년 그것 때문에 애써 들어간 본원에서 나와 가람아카데미를 떠나는 아이들까지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어쨌든…더 이상 볼 일 없다면 각자 돌아가거라. 이틀 후에 다시 여기로 오면 내가 너희들을 데리고 본원으로 들어가게 될게다.”
“감사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준이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예를 올린 뒤 이은과 함께 방을 나섰고, 나머지 셋이 그 뒤를 따랐다.
* * *
장서각에서 필요한 물건을 얻고 밖으로 나온 뒤 이틀, 이준은 학원의 커다란 뒷산으로 들어가 숨겨진 수련 장소를 찾아 두 가지의 무투기를 익히기 시작했다.
본원에 얼마나 대단한 인물들이 모여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다섯 명보다는 강할 것 같으니, 이틀 사이에 조금이라도 실력을 키워두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원에 가는데는 고작 이틀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염력을 수련하다고 해서 큰 발전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 자명했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번개의 춤’과 ‘황금사자의 포효’ 두 가지를 익히는 것이었다.
‘번개의 춤’은 2격 하급 무투기로 속도를 높여주는데 도움이 되었고, ‘황금사자의 포효’는 공격적인 소리형 무투기였으니, 이 두 가지를 익히면 짧은 시간이라도 상당히 실력을 늘릴 수 있었다.
다만 한가지 문제는…이틀 동안 이 정도 고급 무투기 두 개를 익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결국 준은 2격 무투기인 ‘번개의 춤’을 포기하고, 3격 상급의 소리 무투기를 먼저 익히기로 결정했다.
* * *
빽빽한 수풀로 둘러싸인 작은 폭포에서는 물줄기가 커다란 산봉우리 끝에서부터 수직으로 하강하며 ‘쏴아’ 하는 거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물줄기는 이내 암석에 부딪히며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있었고, 그 아래쪽에서는 한 청년이 상기된 얼굴로 입을 벌린 채 낮은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