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장서각
대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하하, 너희 두 사람도 왔구나.”
대건은 웃으며 둘을 바라봤다. 그는 특히 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몸속에서 염력이 부드럽게 움직이지만 용암 같이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하니 정말로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군.’
그는 준의 몸속에 천지의 불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더 이상 쓸데없는 말들을 늘어놓지 않겠다. 너희들도 여기에 모인 목적을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너희들은 이번 회차 선발 경기에서 5위 안에 들었기에 규칙에 따라 장서각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진다.”
대건은 그렇게 말하며 뒤에 있던 벽을 몇 차례 무심하게 두드렸다. 곧이어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새까만 통로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 오거라.”
대건은 다섯 명을 향해 손짓하며 먼저 까만 통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한 은영이 뒤따랐고, 이어서 하늘, 성찬이 다 들어가고 나서야 이준이 이은을 데리고 조심스레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의 곳곳에는 월광석이 박혀있어 은은한 빛으로 어두운 통로를 밝혀주고 있었다.
통로는 몹시 조용해 그들의 발자국 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통로 끝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렸고, 어둠에 길들여져 있던 학생들은 동시에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다섯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눈을 꿈뻑였다.
그들 앞에는 산골짜기가 오목하게 패여 있었고, 깎아 내린 듯한 절벽과 산벽이 우뚝 솟아 있었다.
삼면이 가파른 절벽이었고, 광활한 공터가 그 사이에서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공터에는 입이 떡 벌어질법한 커다란 누각이 세워져 있었다.
그곳이 바로 장서각이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 위엄 있는 건물의 모습에서는 가람아카데미의 역사와 명성이 고스란히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대건을 따라 또 다시 20미터 가량 걸음을 옮기자, 갑자기 대건이 서재 쪽을 향해 주먹을 들고 소리쳤다.
“이번 선발 경기에서 진출한 다섯 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가 이들을 이끌고 들어가려 하니, 문을 열어주시길 바랍니다!”
잠시 후…회색 망토 입은 사람 두 명이 대문 입구 쪽 갑자기 나타났다. 마치 유령이 갑자기 솟아난 것 같은 등장이었다. 준의 예민한 영혼 탐지능력으로도 털끝만큼의 기척조차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은신술이었다.
이은 역시 두 사람의 은신술에 놀랐는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가람아카데미의 명성이 헛것은 아니군. 점점 더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걸.’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대건을 비롯한 외원 학생들을 바라봤다. 눈앞에 나타난 두 사람은, 어쩌면 조각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그 때, 준의 반지에서 느껴지던 약로의 미약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약로와 만난 뒤 완전히 처음 있는 일 이었다.
‘설마 저 두 사람이 반지 안에 숨어있는 스승님의 기운을 느낄 정도로 대단한 자들인 건가?’
장서각을 지키는 두 사람은 그렇게 10분 가까이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마침내 외원의 5인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회색 망토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천지의 불꽃인가?”
그들의 목소리는 아주 가느다랗고 작았지만, 신기하게도 조용한 산골짜기를 꿰뚫고 온 천지에 울리는 느낌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는가?”
부원장인 대건조차 무시하던 두 사람이 준을 향해 관심을 보이자, 백성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대건의 태도로 보아 그 회색 망토들이 가람아카데미에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 그런 그들이 준에게 관심을 가지자 심기가 불편해졌던 것이다.
“흠. 푸른색에 연꽃 모양, 산의 형태라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천지의 불꽃 중 19번째 불꽃인 대지의 불꽃이구나.”
“호오! 그 어린 나이에 대지의 불꽃이라니. 천재가 확실하군.”
준의 실력을 단숨에 꿰뚫어본 둘은 이내 대건을 칭찬했다.
“이번에 데려온 친구들은 지난 번 녀석들보다 훨씬 낫군.”
두 사람의 칭찬에 대건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렇다면 공간 동결을 좀 풀어주시지요.”
‘공간 동결’ 이라는 생전 처음 듣는 말에 학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오라버니, 부원장님 앞쪽을 봐봐요.”
은의 말에 따라 노인의 앞쪽 공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사이로 미세한 주름이 보였다. 주름은 공간속에 감춰져 있어 육안으로는 거의 확인하기 어려었지만, 분명히 그 곳에 있었다.
곧이어 주름이 서서히 움직이며 공간이 커튼처럼 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공간 동결이다. 오직 투종급 이상의 강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지. 이 공간 동결은 수백 년 전부터 가람아카데미의 선배님이 걸어놓으신 것으로 이 두 분이 안 계시다면 투종 강자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란다.”
대건의 설명에 준의 눈동자가 두 배는 커졌다. 투종이면 운산과 동급이다. 그런 강자조차 뚫을 수 없는 결계라니…그렇다면 대체 이 결계를 만든 자는 어떤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잠시 후… 보이지 않는 파동이 확산 되며 공간이 완전히 접히고 양 끝이 맞닿자, 그들이 마주하고 있던 공간에 돌을 던진 호수처럼 동그란 모양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결의 파동이 멈추는 순간, 문 모양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자.”
문이 나타나자, 대건이 그들에게 손짓을 하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준을 비롯한 학생들은 뒤에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부원장의 뒤를 따랐다.
“감사합니다.”
대건이 두 정체불명의 노인들에게 인사를 건네자, 두 사내가 또 다시 무뚝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일일 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을 지나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르자, 대건이 장서각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알아서 장서각에 들어가게 된다. 단, 너희들이 얻고 싶은 게 있다고 할지라도 억지로 손에 넣으려고 해선 안 된단다.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염력으로 둘러싸여 있고, 자신의 손이 아무런 문제없이 그 염력을 뚫고 책을 만질 수 있다면 그 책을 가져올 수 있지. 물론 네가 얼마나 많이 만질 수 있든 간에 장서각 밖으로 가져나올 수 있는 건 단 한 권이다. 그리고…염력 결계를 뚫을 수 없다면, 그냥 포기하거라. 억지를 쓰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으니.”
대건의 설명이 끝나자, 드디어 장서각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장서각 앞에 있는 풀밭을 지나,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울퉁불퉁한 돌계단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돌계단은 이끼가 끼어 푸른색을 띠고 있었는데, 발로 밟고 이동하기에는 다소 미끄러웠지만, 큰 장애물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미끄러운 계단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 장서각에 도착하자, 쓸쓸하고 황량한 기운이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들어가거라. 문은 단 한 시간만 열린다. 그리고 한 시간 후면 네 손에 뭐가 들려있든 없든 간에 무조건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대건의 마지막 충고를 끝으로, 본격적인 보물찾기가 시작되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오자, 이준은 은의 손을 잡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드넓은 방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고, 방안에는 두터운 염력 장벽하나가 자리 하고 있었다. 거대한 염력 장벽은 찬란한 빛을 발하며 방 안을 대낮처럼 환히 밝히고 있었다.
“앞으로 본원에 들어가면 우리끼리 하나로 뭉쳐야 해요. 아직 본원에 들어가본 적은 없지만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그곳에는 수련을 위한 최적의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대요. 그리고 주먹 세기가 곧 서열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우리 같은 신입들은 흩어지면 끝장이죠.”
방안에 들어서자, 줄곧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윤영이 입을 열었다.
“하하, 맞습니다. 처음 들어간 신입들은 뭉치지 않으면 금방 괴롭힘을 당해요. 그래도 제 형님 한 분께서 본원에 들어가 이미 2년 동안 수련중이니, 조금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에 백성찬 역시 윤영의 말에 맞장구를 치듯 자신의 형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준은 그들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사방을 이리저리 살폈다.
“뭘 자꾸 보는 거야? 보니까 주변에 이 이상한 염력 결계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이쪽으로 들어가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
준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방안을 살피자, 이윤영은 불쾌하다는 듯 팔짱을 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때, 어디선가 미약하게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 소리는 너무 작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 작은 바람 소리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실로 범상치 않은 것이었다.
“저기에 뭐 좋은 물건이라도 있나?”
바로 그 때, 갑자기 염력 결계에서 보라색 섬광이 터져 나와 이은에게로 향했다.
갑작스런 빛에 놀란 이은이 손을 들어 빛을 막아내자, 보랏빛이 서서히 옅어지며 갑자기 염력으로 둘러싸인 두루마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3격 상급 수련법…인데?”
“뭐? 공법?”
이은의 말에 이준을 포함한 나머지 셋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찾아가지 않아도 스스로 두루마리가 날아들다니…참으로 신비한 곳 이었다.
그리고 다섯 명의 학생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 또 다시 바람 소리와 함께 초록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준이 잽싸게 몸을 날려 두 손으로 그 녹색 빛을 붙잡자, 빛이 사라지며 비취색의 약재가 그 우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천사의 열매?”
천사의 열매는 그대로 복용해도 한 계단을 뛰어넘을 수 있는 약재로, 연금비약을 만들 수만 있다면 투왕 강자를 바로 승급시킬 수 있을 정도의 효용을 자랑하는 귀하디귀한 열매였다.
그리고 또 다시 염력 결계에서 빛이 터져 나오자, 백성찬을 비롯한 나머지 학생들이 즉시 몸을 날렸다.
“하하! 내꺼다!”
이번에 빛줄기를 붙잡은 것은 백성찬이었다.
하지만 빛은 마치 생명이 있는 냥 몸부림치며 그를 뿌리쳤고, 갑자기 터져 나온 거센 반발력에 백성찬의 몸이 반대편 벽으로 날아가 처박히고 말았다.
“컥…!”
그렇게 약 15분…계속해서 빛이 터져 나오고, 이은의 손에는 이미 대여섯 개의 보물들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녀의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다른 빛줄기를 붙잡았다.
다음 순간, 붉은 빛이 사방을 비추며 방안의 온도가 상승했다.
“왔다!”
준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빠르게 그 붉은 색의 빛을 낚아챘다.
빨간 빛이 옅어지자, 붉은색 두루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9단 봉황불꽃, 2격 중급 염력 수련법…!”
준은 두루마리 위에 적힌 글자를 읽자마자 마른 침을 삼켰다. 2격 중급이라면, 자신이 본 가장 강력한 염력 수련법였다.
누군가가 2격 수련법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물건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만한 물건이었다.
2격 중급 염력 수련법이라는 말에 준의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 셋이 함께 달려들었다가 이준에게 박살이 났었으니, 제 아무리 탐이 난다해도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