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잠깐의 평화
경기장 중앙에 자리한 부원장 대건과 다른 원로들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자신의 손녀가 눈 앞에서 벌레처럼 짓밟혔으니, 대건의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허허. 화끈하구만…”
하지만 화 노인은 대건의 굳은 표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여댔다.
“부원장님! 에…이건 규칙을 어긴 걸로 봐야 할까요?”
그 때, 심판석에 있던 중년이 난감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뗐다. 부원장이 끔찍히도 아끼는 손녀딸이 바로 그 경기장에서 처참하게 짓밟혔으니, 그 역시 마음이 영 편치 않았던 것 이다.
“이번 경기 자체가 그리 공정하지 않았으니, 이준 학생도 규칙을 어겼다고 보긴 힘들겠지요. 게다가 그 친구의 실력을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니 뭐… 됐습니다. 다른 학생들을 죽인 것도 아니고…”
하지만, 뜻 밖에도, 대건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마음속으로 이 결과를 흡족하게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나 제멋대로에 할아버지를 믿고 천방지축 날뛰는 이윤영에게 오늘의 일이 좋은 교훈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부상이 조금 더 심했거나 죽어버렸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겠지만, 그 정도 부상은 투사로써 살아가는 이상 당연히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한편, 준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이은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보다 전투 중에 승급이라니…정말 놀라서 죽는 줄 알았다구요.”
상황이 정리되자 긴장이 풀렸는지 이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준은 다정한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를 달래며 심판을 바라봤다.
“경기가 끝난 게 맞나요? 아니면 더 확시한 마무리가 필요한가요?”
“아, 아니야! 경기가 끝났지. 맞아, 끝났어!”
심판이 황급히 소리쳤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준은 정말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놈이었다.
“선발경기가 종료됐습니다! 이번 경기에서 선발 된 다섯 명의 학생은 이준, 이은, 오하늘, 이윤영, 그리고 백성찬입니다!”
공식적으로 승리가 선언되자,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던 관객석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파격적인 결말에 관객석은 완전히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박수 소리가 커질수록 준에게 패배한 세 강자의 가슴에는 비참한 기분이 스며들고 있었다.
“저 나쁜 놈…! 악랄한 놈! 어떻게 승부가 났는데도 연약한 여자를 이렇게 짓밟을 수 있어!”
한참을 말 없이 비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윤영이 입을 열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또래에게 이토록 비참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그녀였으니,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 있었다.
오하늘은 아무 말도 없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백성찬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세 명의 강자들이 무슨 기분을 갖든 말든, 본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준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본원에 가면 ‘구름의 불꽃’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웃지 않을래야 웃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이다.
잠시 후 이준과 이은 두 사람은 시끄럽게 울리는 함성 소리를 뒤로 하고 광장을 빠져나갔다.
* * *
선발전이 끝난 지 며칠 뒤.
준은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요즘 들어 어딜 가든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준은 자신을 쫓아다니는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조용히 숲길을 걸었다.
가람 아카데미의 규칙에 따르면, 선발 되고 7일 안에 5위 내에 들었던 학생들은 본원에 들어갈 준비의 일환으로 장서각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자신과 맞는 물건들을 찾아 소장할 수도 있었다.
‘장서각에는 어떤 물건들이 있으려나…’
그리고 준이 나뭇잎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 익숙하지만, 조금은 불편한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귀여운 외모의 어여쁜 소녀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안이었다.
“와, 이안, 정말 이준이 네 사촌 오라버니였어? 어, 온다, 온다……”
이안의 곁에 있던 소녀들은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이준을 보며 잔뜩 흥분한 듯 빨개진 얼굴로 어쩔 바를 몰라했다.
선발전 이래로 준은 그야말로 외원이 최강자로 우뚝 섰으니, 많은 학생들이 그를 동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준은 이런 시선이 불편하고 부담스럽기만 했다.
준은 마지못해 이안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 뒤 몇 마디 안부를 묻고는 다시 그녀를 지나쳐 발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 안부를 묻는 준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려왔다. 차라리 옛날 일을 언급하며 화라도 냈으면 좋으련만, 자신을 불편해하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 딱 그 정도의 거리만을 유지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왔다.
“안아, 잠깐 시간좀 내줄 수 있을까? 할 얘기가 있어서.”
하지만 이안이 막 자리를 떠나려던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은 깜짝 놀라 굳어버린 이안을 데리고 조용히 호숫가로 걸음을 옮겼다.
호수에 도착하자, 준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다가 천천히 얼마 전 이씨 가문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안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이씨 가문의 일원이고, 지금 그는 한시적이나마 이씨 가문의 수장이었으니, 이안에게도 그간 일어났던 일이나, 이씨 가문의 근거지가 타르 사막으로 옮겨졌다는 것에 대해 말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가문이 근거지를 옮겼다고요? 운남종 때문인가요?”
“그래…”
준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음을 짓다가 긴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내가 장로 한명을 죽였거든. 아마도 내가 가한제국에 돌아가면, 운남종 놈들이 날 찾아 죽이려고 난리가 나겠지. 그리고 너 역시 가한제국에 돌아가지 않았으면 해.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타르 사막으로 옮겨갔고, 그곳은 운남종의 영향력이 비교적 미치지 않는 곳이니 어떻게든 되겠지만, 다른 곳에서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준의 말이 끝나자, 이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준을 바라봤다.
“너무 걱정 마요. 가문에서도 오라버니를 비난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그랬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피와 땀으로 지키신 가문을 어떻게든 되돌려 놓을 거야.”
“네, 지금의 오라버니라면…”
이안은 저도 모르게 ‘지금의’ 오라버니라고 말을 해놓고는 화들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 다 지나간 일인데 뭐. 어린 애도 아니고.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쓰지마.”
준은 평온한 표정으로 호수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운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 문제를 언제까지 질질 끄는 건 내가 옹졸해서 그런 거지, 네 잘못이 아니야. 어릴 때 일은 어릴 때 일로 묻어둬야지. 어쨌든 너는 우리 가문의 일원이고, 겨우 그런 일로 언제까지고 불편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예전에 비하면 안 좋은 마음도 많이 사라졌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니까. 너도 조금 더 편하게 나를 대했으면 좋겠다. 그러니 가람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와. 아직 운남종에 맞설 힘은 없지만, 이 학원 내에서 내 가족을 지킬 정도의 힘은 있으니까.”
이준의 다정한 말에 이안의 얼굴에는 금세 화색이 돌았다.
“좋아. 그럼 나 먼저 갈게. 무슨 일 있으면 꼭 예진 선생님 숙소 쪽으로 찾아오고.”
준은 이안의 어깨를 한번 토닥이고는 다시 작은 골목으로 사라졌고, 이안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 * *
예진 선생이 있는 숙소로 돌아가자, 예진과 이은, 이옥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고, 그녀들 앞에는 교사 복장을 한 중년의 사내 하나가 서있었다.
“오라버니, 이 분은 도록 스승님이에요.”
은이 도록을 소개하자, 예진이 씨익 웃으며 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성찬이 윤영이, 오하늘까지, 셋 모두 상처가 다 나았어. 그러니 규정대로라면 오늘 오후에 장서각에 들어가야 해.”
* * *
넓은 방안에는 책장들이 끝도 없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책장 속에는 각양각색의 오래된 서적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방의 중앙에는 세 사람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책상 뒤로 백발의 노인이 손에 든 자료들을 느긋하게 넘기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백성찬과 이윤영, 오하늘의 안색은 아직 조금 창백했지만, 전에 비해서는 한 눈에 보기에도 제법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내가 대신 혼내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다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능력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가서 이준이랑 다시 한 번 붙어보거라. 가람 아카데미에서 그런 식의 결투를 막지 않으니 너희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해도 좋다.”
“흥. 내가 뭐 해달라고 했나요. 그날 제가 그렇게 지는 바람에 손도 제대로 못쓰고 끝나서 누구 실력이 더 뛰어난지는 아직 모른다고요.”
노인의 근엄한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이윤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그냥 그 녀석이 제가 여자인데도 그렇게 가차 없이 공격한 게 화가 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귀하게 자랐는데…”
손녀의 귀여운 투정에 대건은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귀하게 자란걸 알긴 아는구나. 그런데 셋이서 한 명을 덮치는데 어떻게 봐주겠니. 너희를 봐줬다가는 자신이 위험할 텐데 말이다. 물론 마지막 한방은…내가 보기에도 좀 과하긴 했다만…”
세 사람의 표정이 영 좋지 않자, 노인은 세 사람을 주욱 흝어보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일로 괜히 원한을 갖지 말거라. 대회중에 있었던 일이고, 너희가 원인을 제공한 면도 있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는 어찌됐든 같은 가람아카데미출신이다. 가람아카데미의 인재끼리 서로 원한을 가져서 어쩌자는 게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대요. 절대 못 잊어요 저는.”
하지만 윤영은 계속해서 어깃장을 놓아댔다.
“적으로 여기진 않습니다. 다만, 꼭 뛰어넘고 싶은 상대이긴 합니다.”
오하늘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아, 대결이 다 그렇죠. 서로 때리고 다치는 건 일상적인 일인데, 그런 데에 원한을 품지는 않습니다.”
백성찬은 모두 이해한다는 듯 온화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선 두 사람 때와는 달리, 백성찬의 대답에 대건의 표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산전수전 다 거친 그가, 속이 뻔히 보이는 어린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굳이 더 말 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문이 열리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두 명의 발소리가 장서각을 잔잔하게 울렸다.
“부원장님, 이준과 이은이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하게.”
대건은 손에 든 책을 덮고 온화하게 웃으며 세 사람을 향해 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겼다.
“너희가 나중에 본원에 들어가게 되면 함께 싸워야 할 일이 많을게다. 그러니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거라. 본원에 들어가서 동기끼리 뭉치지 않으면 그리 좋은 결과를 볼 수 없단다. 그리고 본원에서는 오직 본인의 실력만 가지고 평가하니, 다른 사람 덕 볼 생각일랑 아예 말고.”
부원장은 그렇게 말하며 이윤영을 똑바로 쳐다봤고, 이윤영은 또 다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부원장이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이 하나 없었으니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