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이은의 실력
“10분만 부탁해.”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황급히 자리에 앉아 몸속을 미친 듯이 휘젓고 다니는 염력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8명을 상대하고 온 이은에게 백성찬을 맡기는 것이 영 불안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이은이 준을 위해 나서자, 백성찬의 가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다.
“오하늘, 이윤영. 셋이 힘을 합쳐 이은과 이준을 끝장내지. 어때? 저쪽은 둘, 우리는 셋. 2대 3이 2대 1대1대1 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말이야.”
백성찬은 끌어 오르는 질투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고개를 돌려 오하늘과 이윤영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때 마침 그 둘도 상황을 정리한 상태였으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좋아, 우선 이준을 몰아내자.”
백성찬은 싸늘한 표정으로 이준과 이은을 바라보며 바닥에 떨어진 창을 주워들었다.
하지만, 외원 최고의 강자라고 평가받는 다섯 중 셋이 연합했음에도 이은은 추호도 물러설 마음이 없는 듯 더욱 세차게 금색 염력을 뿜어대고 있었다.
“움직이자.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없어. 저놈이 승급을 마치기 전에 끝내는게 최선이야.”
백성찬의 말대로였다. 이은을 먼저 격파하고 승급중인 이준을 덮칠 수 있다면 상황은 쉽게 정리될 것 이다.
반대로 준이 승급에 성공한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것이 뻔했으니, 오하늘과 이윤영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염력을 뿜어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시선이 쏟아지는 가운데, 세 명의 최강자와 그들과 조를 짰던 네 명의 무투사가 동시에 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보호의 빛!”
그 때, 이은의 몸에서 금빛 섬광이 뻗어나가 일곱 명의 참가자를 가격했고, 그 중 넷이 피를 토했다.
“마…말도 안돼…”
그리고 무시무시한 이은의 실력 앞에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뱉기도 전에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와 함께 새빨간 형상이 이은을 향해 날아들었다.
쾅! 쾅!
음침한 빛을 내뿜는 새빨간 형상과 금빛으로 빛나는 이은이 맞부딪히자, 고막을 자극하는 굉음이 광장 안을 뒤덮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빨간 그림자가 금빛 섬광에 밀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 순간, 숨 돌릴 틈도 없이 천둥소리와 함께 은빛 섬광이 준을 덮쳤다.
쾅!
하지만 이은의 손끝에서 금빛 섬광이 쏘아져 나가 백성찬의 무투기를 폭발시켜버리자, 광장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과 2~3분 사이, 8명의 무투사를 탈락시키고 숨돌릴 틈도 없이 다음 전투에 돌입해 4명의 무투사를 날려버린 뒤 홀로 외원 최강의 3인을 상대하는 그녀의 실력은 대단한 것을 넘어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은의 이런 공포스러운 실력이 나머지 셋의 자존심을 자극했는지, 백성찬과 오하늘, 이윤영의 몸에서 더욱 무시무시한 기세로 염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세 개의 그림자가 또 다시 준을 향해 날아들었고, 금빛 섬광이 광장 안에 휘몰아쳤다.
펑—!
몇 차례의 격돌이 있고, 백성찬과 이윤영이 뒤로 밀려났다.
“안돼!”
하지만 이은이 숨을 고르는 사이,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새빨간 형상 하나가 그녀를 지나쳐 준에게로 날아들었고, 이은이 사색이 되어 오른손을 휘두르며 오하늘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만일 지금 상태에서 이준이 오하늘의 공격을 받는다면, 운이 좋아도 몇 달은 요양해야 할 부상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쾅!
이은은 사력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고, 결국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무시무시한 공격에 오하늘도 결국 방향을 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다시 숨 돌릴 틈도 없이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이윤영이 이은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 사이, 이번에는 백성찬이 준을 향해 달려가 주먹을 휘둘렀다.
“안돼, 그만 둬!”
퍽!
그러나…백성찬의 주먹에 맞은 것은 이준이 아니라 이은이었다. 이은이 몸으로 준을 지켜낸 것이다.
“크윽…”
이은은 백성찬의 공격에 당하는 와중에도 반격의 손길을 멈추지 않았고,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힌 백성찬은 결국 아쉬운 표정으로 뒤로 몸을 물릴 수 밖에 없었다.
“후우…정말 비겁하고 잔인하군요. 승급 도중에 공격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도…굳이 내가 아니라 오라버니를 노리다니…”
이은은 싸늘한 표정으로 세 명의 강자들을 비난했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갑자기 그녀의 머리카락이 길어지며 온 몸에서 해일과도 같은 기세로 염력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리는 점점 길어져 어느 새 허리를 지나 엉덩이 부근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염력이 정점에 달하려는 순간, 갑자기 따뜻한 손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고마워 은아. 이제부터 나한테 맡겨.”
손목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이은의 눈에서 살기가 물러나고, 활화산처럼 폭발하던 그녀의 염력이 서서히 평상시처럼 잔잔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젠장…”
반면, 승급에 성공한 준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는 세 명의 표정에는 시커멓게 그늘이 지고 있었다.
“은아, 일단 멀리 떨어져 있어. 지금부터는 내가 처리할게.”
“오라버니, 저 세 명은 모두 5, 6성 대투사예요. 염력 수련법도 상급이고, 게다가 고급 무투기까지…”
“괜찮아. 나한테 맡겨.”
준은 불안해하는 이은을 달래고는 푸른 불꽃을 끌어내 온 몸을 뒤덮었다. 공기마저 태워버릴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광장안에 몰아치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알았어요…그럼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위험한 상황에서는 나도 힘을 보탤게요. 그건 괜찮죠?”
결국 이은이 마지못해 뒤로 물러나자, 준이 서늘한 표정으로 앞에 선 세 사람을 노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기회를 주지. 몸 성히 선발전을 마치고 싶다면 지금 제 발로 경기장 밖으로 걸어 나가.”
“큭큭큭! 겨우 1성 정도 승급한 것 가지고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군 후배님…아니면 우릴 과소평가 하는 건가?”
살기등등한 준의 태도에 백성찬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받아치며 창을 붙잡았다. 오하늘 역시 불쾌하다는 듯 말없이 조용히 미간을 찌푸리며 검을 움켜쥐었다.
셋 중 누구도 물러서지 않자, 준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염력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푸른 불꽃이 일순 치솟았다가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곧이어 그의 눈동자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고, 갑자기 경기장 전체에 무시무시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숨이 턱턱 막히고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의 열기였다.
“투령?”
준의 몸에서 폭발하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일순 백성찬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이윤영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크게 뜨고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대투사 수준의 염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륵!
그리고 두 사람이 뭔가 대응을 하기도 전에 한줄기의 염력이 열기를 토하며 날아들었고, 뒤따라 시커먼 형상이 세 명을 향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천계의 불꽃을 시전한 준의 속도는 실로 투령 강자에 필적할 정도였으니, 세 사람은 몸을 빼지도 못 한 채 황급히 손을 들어 상대의 공격에 맞섰다.
콰직!
눈 깜짝할 새에 푸른 불꽃이 그들의 팔을 내리치자, 둔탁한 소리가 광장안에 울려 퍼졌다.
준의 공격은 일격에 셋을 뒤로 물리고도 남을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와 위력 앞에 세 사람은 동시에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뒤로 밀려난 백성찬은 이를 악문 채 자신의 은색 염력으로 온 몸을 덮은 뒤 장창을 움켜잡았다. 그의 장창에 또 다시 은색 섬광이 깃들며 기묘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오하늘과 이윤영 역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염력을 끌어냈다.
그러자 짙은 녹색과 피처럼 붉은 염력이 피어올랐다. 이윤영의 손에는 채찍이, 오하늘의 손에는 새빨간 검이 들려있었다.
준은 상대의 반격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한 번의 공격 이후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무언가를 준비했다.
잠시 후…갑자기 준의 입에서 보라색 불꽃이 쏟아져 나왔다.
곧이어 그가 오른손을 들어 흔들자, 푸른 불꽃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순간에 실력을 일시적으로 끌어 올리는 비밀 공법이라도 쓴 게 아닐까요? 그게 아니고선 갑자기 힘이 이렇게 증가할 수가 없을 텐데요.”
준의 몸 안에서 폭탄처럼 터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염력을 감지한 대건이 다른 노인들의 의견을 물었다.
“으음…아마도 그런 것 같군요. 분명히 투령급의 힘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아이들도 보통 실력은 아니니…쉽게 승부가 나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노인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화 노인은 곧바로 그의 의견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음… 아닐 겁니다. 제 생각에는 지금 준비하는 일격으로 모든 게 정리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요.”
……
“번개의 대지!”
“피어나라, 독사 넝쿨!”
“피의 저주!”
그 때, 세 사람의 강자가 동시에 뛰쳐나가며 자신이 가진 최강의 무투기를 펼쳤고, 은색과 적색, 녹색의 염력이 뒤엉키며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준의 손 위에는 융합을 마친 청보라색의 불꽃이 그 신비로운 자태를 뽐내며 일렁이고 있었다.
콰-앙!
다음 순간, 거대한 힘들이 맞부딪히며 굉음과 함께 광장 전체가 희뿌연 연기에 뒤덮였다.
쿠르릉…!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연기가 흩어지자, 사람들의 시야에 폐허가 되어버린 경기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단단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광장의 바닥은 이미 완전히 바스라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공포스러운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연기가 완전히 걷힐 무렵, 푸른색의 사람 형상 하나가 깨어진 돌 조각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구멍에는 만신창이가 된 세 사람의 강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
“이준은 어디 있지…?”
백성찬은 입가에 묻은 혈흔을 닦으며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봤다.
“젠장…”
오하늘은 사지를 덜덜 떨면서 힘에 부친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지막하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쾅!
백성찬의 한 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한쪽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아…아직 안 죽었어! 녀석이 기운이 느껴져!”
이윤영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백성찬의 얼굴이 더욱 더 새하얗게 질려갔다.
소음이 일어난 곳에서는 이준이 멀쩡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우리 셋을 상대로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다고…?”
누가 봐도 명백한 이준의 승리였다. 그러나 준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다.
“너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우린 이미……”
승부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준의 눈에서는 살기가 떠나지 않고 있었고, 백성찬이 그 심상찮은 살기를 감지했을 때는 이미 푸른 불꽃을 뒤집어 쓴 맹수가 그의 목전까지 도달해 있었다.
우두둑.
다음 순간,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백성찬이 무릎을 꿇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오하늘과 이윤영이 잽싸게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지만, 흉흉한 살기를 내뿜는 맹수가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데는 얼마의 시간도 필요치 않았다.
“왜…왜 이러는 거야! 커헉…!”
백성찬 다음은 이윤영이었다. 준의 주먹이 내리꽂히자, 이윤영은 붉은 피를 토해내며 바닥을 기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가람아카데미 외원의 ‘사신’ 오하늘 이었다.
퍽…!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준이 보여준 잔혹함 앞에 모든 학생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누가 보아도 전투 불능의 상대를 굳이 쫓아가 벌레를 밟듯 밟아버리는 그 모습은 가람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에게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공포를 선사했다.
놀란 것은 예린 선생과 이옥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토끼 눈을 한 채 서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