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번개의 폭주
“그럼, 경기 규칙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했겠지요?”
“네! 이해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대건이 손을 들어 올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본원 선발경기의 마지막 대결을 시작합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용하던 광장이 형형색색의 빛으로 물들었고, 학생들 중 대다수는 곧바로 전투를 시작하지 않고 경기장 구석으로 몸을 날렸다.
“하하, 부원장님, 아주 좋은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공정한 시합은 아닐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방식이 학생들의 기량을 보다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일 것 같군요.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와 손을 잡고 누구와 싸우느냐, 사방에서 덮쳐오는 적들에게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들이 단순한 전투 실력보다 더 중요한 요소니까요”
“저도 예전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이것저것 시도해볼까 싶어 해본 것뿐입니다.”
그렇게 노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경기장에서는 이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뒤에서 들이닥칠 상대가 두려워 누군가와 연합을 한 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홀로 떨어진 몇 명인가가 협공을 당해 순식간에 탈락을 하고 말았다.
한편 이준과 이은은 광장 끄트머리에서 푸른색과 금색의 염력을 뿜어내며 경쟁자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렇게 외원 최강의 5인 중 2인이 서로 등을 맞대고 방어 태세에 들어가자, 경기장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 하고 눈치만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성찬이나 오하늘을 주축으로 동맹이 결성되면 이런 상황이 유지될 리가 없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개인간의 전투가 점점 동맹간의 싸움으로 넘어가는 분위기가 되어가자, 준이 검은 송곳은 빼들고 광장 중앙으로 나아갔다.
준의 몸에서 푸른 염력이 치솟는 순간, 백성찬, 이윤영, 오하늘의 몸에서도 무시무시한 기운이 치솟았고, 낯선 사내 둘에게서도 강렬한 염력이 터져 나왔다.
두 사내의 뒤로는 나름대로 실력이 괜찮아 보이는 네댓 명의 참가자들이 서 있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가장 강한 세 세력은 백성찬, 오하늘, 이윤영을 우두머리로 하는 조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오하늘 쪽의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준과 이은은 전체 참가자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둘이 뭉친 것이었으니, 다른 세력들도 결코 그들을 쉬이 볼 수 없었다.
“오라버니, 어딜 먼저 공격하는 게 좋을까요?”
“일단 기다려보자. 아직 경기장 안에 30명이나 남아 있어. 백성찬이나 오하늘 같은 강자들도 있으니까 우리 둘이서 섣불리 덤비는 건 별로 현명한 행동이 아니야. 저들끼리 싸우다 어느 정도 힘이 빠지면 움직이자. 다른 녀석들도 우리를 먼저 치다가 다른 조에게서 공격을 받을게 두려워서 우리를 먼저 공격하기는 어려울 거야.”
준의 말대로였다. 백성찬 일당들은 이준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냈지만, 괜히 나섰다가 다른 연합들의 견제를 받아 동시에 공격을 받을까 두려웠는지 섣불리 나서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백성찬, 이윤영, 오하늘, 세 명을 주축으로 한 동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애매한 세력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갔고, 공격을 받지 않았음에도 자진해서 경기를 포기하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그렇게 연합이 하나 둘씩 깨어지고 사람들이 흩어지자, 드디어 준이 행동을 개시했다.
“지금 일행이 없는 사람 중 좋은 등수를 받고 싶은 자가 있다면 이쪽으로 와도 좋아!”
이준의 한 마디에 짝을 잃은 7명의 참가자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러자, 한 순간에 두 명밖에 없던 연합이 다른 큰 세력과 맞붙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물론 머릿수만 늘었을 뿐, 실력은 여전히 백성찬 무리들이 우세했다.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준과 은에게 필요한 것은 오하늘이나 백성찬 같은 강자를 상대해줄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은이 그들을 상대할 때 뒤를 지켜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면 충분했다.
그 무렵, 드디어 백성찬이 이빨을 드러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준을 향해 걸어가며 서서히 자신의 은색 염력을 폭발시켰다.
“왜? 근질근질 했나봐?”
준은 검은 송곳에 푸른 염력을 두르며 백성찬과 맞설 채비를 갖추었다.
“네 명이 가서 이준 뒤에 있는 놈들을 경기장 밖으로 쫓아내고, 나머지 네 명은 이은 후배님을 잠깐 잡고 있어줘. 이준은 내가 맡지.”
백성찬이 기다란 창을 뽑아들며 명을 내리자, 나머지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백성찬이 이준과 싸울 준비를 하는 사이, 오하늘과 이윤영은 나머지 두 세력을 제거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마침내 준과 백성찬이 대치하자, 관객석에서 커다란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
검은 송곳에 푸른 염력이 일자, 강렬한 파동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속전속결로 끝내자. 시간 끌지 말고.”
“3분이면 돼.”
준이 입을 열자, 이은의 몸에서 찬란한 금빛 염력이 솟구치며 그녀를 감쌌다. 금빛 섬광에 둘러싸인 그녀는 땅 위에 태양이 내려앉은 듯 눈부셨다.
등 뒤에서 맹렬한 염력이 치솟자,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검은 송곳과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달려드는 순간, 백성찬의 손에 들린 창에서 눈부신 은색 섬광이 뿜어져 나와 작은 뱀처럼 창대를 휘감았다.
챙!
두 사람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맞붙었고, 이내 은색 장창과 검은 송곳이 얽히며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백성찬의 장창에 흐르던 은빛 섬광이 검은 송곳과 맞부딪히자마자 이내 살아있는 것처럼 상대의 무기를 타고 흘렀다.
준은 이에 맞서 재빠르게 몸속의 염력을 끌어내 온 몸을 염력 갑옷으로 뒤덮었다.
치직-
다음 순간, 번개 속성 염력 특유의 독특한 소음이 울려 퍼지며 준의 몸에 닿았지만, 뱀처럼 작게 쪼개진 염력으로 준의 갑옷에 흠집을 낼 수는 없었다.
준은 자잘한 공격 따위는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과감하게 검은 송곳을 휘둘러 백성찬의 머리를 노렸다.
검은 송곳이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고, 백성찬이 번개처럼 뒤로 몸을 날렸다.
‘과연…번개 속성 염력다워.’
준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백성찬을 향해 몸을 날리며 눈을 돌려 흘깃 이은쪽을 바라봤다.
지금 이은의 앞에는 무투사 최고 단계의 강자 넷이 서있었지만, 이은은 밀리기는커녕 여유롭게 그들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정말 3분 안에 정리될지도 모르겠는 걸. 역시 대단해.’
“어딜 한 눈을 팔아!”
바로 그 때, 기다란 창에 은색 회오리가 몰아치며 눈부신 섬광이 쏟아져 나왔다.
콰르릉…!
“죽어라!”
곧이어 백성찬은 두 발을 옆으로 옮기며 바닥에 장창을 내리꽂았고, 그 순간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폭발했다.
“번개의 폭주!”
그리고 은빛 염력으로 둘러싸인 장창이 바닥에 닿는 순간, 창을 감싸고 있던 은빛 회오리가 무수히 많은 전기로 나뉘어 바닥을 타고 뻗어나갔다.
바닥을 타고 흐르는 전류는 은색 뱀을 연상시켰고, 그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눈으로 쫓기 힘들 지경이었다.
현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백성찬의 무시무시한 공격 앞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번개의 폭주는 그가 자랑하는 3격 고급 무투기로, 백성찬은 과거 이 기술로 투령 강자에게도 중상을 입힌 적이 있었다.
쾅!
그리고 수많은 은빛 전류가 준에게로 몰려들어 폭발하는 순간, 희뿌연 먼지가 일며 시야를 가렸다.
공격이 성공한 것을 확인한 백성찬의 얼굴에 막 미소가 떠오르려는 순간, 광풍이 일며 돌연 연기와 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확실히 실력은 있군.”
흩어지는 먼지 속에서 푸른 불꽃에 둘러싸인 이준이 나타나자, 백성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순식간에 백성찬의 등 뒤에 푸른 불꽃으로 뒤덮인 그림자가 나타났다.
백성찬은 상대의 주먹이 자신의 몸에 닿기도 전부터 느껴지는 끔찍한 열기에 화들짝 놀라 다시 번개처럼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이미 큰 공격을 한번 사용한 백성찬의 속도는 처음만큼 날렵하지는 못 했고, 결국 검은 그림자가 승냥이처럼 그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내리꽂았다.
캉!
그는 창을 들어 간신히 준의 공격을 막아내며 전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한걸음을 물러나면 상대도 한걸음을 따라왔고, 그가 두 걸음을 물러나면 상대도 두 걸음을 따라왔다. 검은 송곳을 놓고 맨 몸으로 달려드는 준의 속도는 백성찬의 그것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크윽… 빌어먹을!’
이준은 상대를 계속해서 추격하며 맹렬한 기세로 온 몸 이곳저곳에 무작우로 공격을 퍼부어댔고, 결국 얼마나 지나지 않아 백성찬의 손에서 창을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백성찬이 창을 놓치는 순간, 패배는 거의 확정적이었다. 그의 공격은 모두 준의 푸른 불꽃에 막혔고, 도리어 공격한 그의 손발이 상대의 불꽃에 의해 계속해서 화상을 입고 있었다.
……
“호오… 이준이 몸에 두르고 있는 저 불꽃…천지의 불꽃 아닙니까?”
화노인은 눈이 휘둥그레져 옆에 있던 다른 노인을 바라봤다.
“그런 것 같군요. 가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섬뜩한 온도로 보아하니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투황들도 손에 넣기 힘들 물건을 어떻게 저 아이가 가지고 있을까요?”
“이준 저 친구는 연금술과로 데려가야겠군요.”
“뭐…마음대로 하시지요. 어쨌거나 우리 가람아카데미에 훌륭한 학생이 한 명 더 늘어나는 것이니 저도 거절할 이유가 없지요.”
……
그 사이 또 한 방, 매서운 주먹이 백성찬의 가슴에 내리 꽂혔고, 그 순간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백성찬 몸을 감싸고 있던 은빛 염력 갑옷이 조각났다.
동시에 백성찬을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가량의 바닥이 갈라지며 그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울컥하고 치솟아 올랐다.
“빌어먹을 자식이…”
다음 순간, 백성찬의 저장반지에서 연금비약 한 알이 튀어나왔고, 그는 황급히 그것을 자신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바로 그 때, 준은 전신의 혈관에서 무시무시한 힘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해일처럼 일어난 염력이 돌연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폭발하자, 준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준의 몸에서 쏟아지는 갑작스런 기운에 관객석 곳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설마… 지금 싸우다 말고 승급한 거야?”
“그런 것 같은데?”
“끝났구만…”
평상시라면 승급은 좋은 일이지만, 전투 상황에서 승급이라니, 불운도 이런 불운이 없었다. 관객석 곳곳에서는 아쉬움 가득한 탄식이 쏟아졌다.
승급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승급 중에 공격을 받으면 가볍게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고, 심하게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제길! 말도 안돼!’
준은 갑작스레 찾아온 신체의 변화에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전투중에 승급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도한 승급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몸속에서 변화가 찾아온 것이니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하. 하늘이 내 편인 것 같군.”
뜻 밖의 행운에 백성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저장반지에서 꺼낸 연금비약을 씹어 삼킨 뒤 재빨리 바닥에 떨구어져 있는 자신의 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약기운이 퍼져나가자 빠르게 몸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오라버니, 승급부터 끝내요! 내가 잠깐 붙잡아 두고 있을게!”
그 순간, 금빛 섬광이 빠르게 준의 앞을 막아섰다. 고개를 돌리자, 백성찬과 동맹을 짰던 8명의 참가자가 모두 경기장 밖으로 밀려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